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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_Novel/305_노벨화학상

[1917 노벨화학상] 수상자 없음 : 포화 속에서 홀로 피워낸 원소, 리제 마이트너와 '프로트악티늄'

by 어셈블러 2025. 1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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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 그리고 텅 빈 실험실

 

1917년, 유럽은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호 속에 갇혀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젊은이들은 전선으로 끌려갔고, 과학자들은 독가스와 폭탄을 만드는 데 동원되었습니다. 노벨 위원회는 1916년에 이어 1917년에도 "수상자 없음" 을 발표하며 침묵을 지켰습니다.

하지만 베를린의 한 연구소, 텅 빈 실험실에는 홀로 남아 맹독성 방사능 물질과 사투를 벌이는 한 여성이 있었습니다.

그녀의 연구 파트너였던 오토 한(Otto Hahn)은 독가스 부대로 징집되어 떠났고, 다른 동료들도 모두 사라졌습니다. 공습경보가 울리고 식량이 부족해 굶주리는 상황에서도 그녀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찾고 있었던 것은 우라늄 붕괴 사슬의 잃어버린 고리, 아직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91번 원소' 였습니다.

오늘 소개할 인물은 노벨상을 받지는 못했지만, 1917년 화학계의 진정한 주인공이었던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리제 마이트너(Lise Meitner) 입니다.

훗날 핵분열을 발견하고도 노벨상을 도둑맞게 되는 비운의 여인. 하지만 그 누구보다 강인했던 그녀가 전쟁의 폐허 속에서 어떻게 새로운 원소 '프로트악티늄(Protactinium)' 을 발견했는지, 그 고독한 투쟁의 기록을 소개합니다.

 

📜 지하실의 물리학자 : "여자는 연구실에 들어올 수 없다"

 

리제 마이트너는 1878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유대인 변호사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물리학에 천재적인 재능이 있었지만, 당시 여성에게는 과학자의 길이 험난했습니다.

1907년, 그녀는 막스 플랑크의 강의를 듣기 위해 베를린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운명적인 파트너인 화학자 오토 한을 만납니다. 두 사람은 방사능 연구에 의기투합했지만, 연구소장의 방침은 단호했습니다.

"여자는 연구소에 들어올 수 없다. 머리카락이 기계에 끼면 위험하다는 핑계지만, 사실 그냥 여자가 싫다."

결국 마이트너는 정식 연구실이 아닌, 건물 지하에 있는 '목공소(Wood shop)' 를 개조한 허름한 방에서 실험해야 했습니다. 화장실조차 쓸 수 없어 근처 식당까지 뛰어갔다 와야 했고, 월급도 한 푼 없는 '무보수 객원 연구원' 신세였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오토 한은 화학적 분석을, 마이트너는 물리학적 해석을 맡아 환상의 호흡을 자랑하며 방사능 연구의 최전선을 달렸습니다.

 

🧐 전쟁이 갈라놓은 듀오, 그리고 홀로서기

 

1914년, 전쟁이 터지자 모든 게 변했습니다. 오토 한은 군대에 징집되어 프리츠 하버(1918년 수상자)가 이끄는 독가스 부대로 배치되었습니다. 연구소에는 마이트너 혼자 남겨졌습니다.

그녀는 낮에는 병원에서 엑스선 기사로 자원봉사를 하며 부상병들을 돌봤고, 밤에는 지하 실험실로 돌아와 연구를 계속했습니다.

당시 과학자들의 경쟁 주제는 '악티늄(Actinium)의 어미' 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방사성 붕괴 사슬에서 악티늄으로 변하기 직전의 원소가 무엇인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마이트너는 피치블렌드(우라늄 광석) 잔여물을 녹이고 끓이며 91번 원소를 추적했습니다. 그것은 매우 위험하고 고독한 작업이었습니다. 전선에 있는 오토 한에게 편지로 실험 결과를 알리면, 한이 답장으로 조언을 해주는 식의 '편지 연구' 가 이어졌습니다.

1917년, 마이트너는 마침내 아주 미세한 양의 새로운 방사성 물질을 분리해 냅니다. 이 물질은 알파 붕괴를 하며 악티늄으로 변했습니다.

"찾았다! 이것이 악티늄의 조상(Parent), '프로트악티늄(Protactinium)'이다!"

그녀는 전쟁의 공포와 고립 속에서, 오직 자신의 손으로 91번 원소의 존재를 세상에 증명해 냈습니다.

 

⚡️ 가려진 이름 : 1944년의 예고편

 

1918년, 마이트너와 한은 공동 명의로 프로트악티늄 발견을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학계의 스포트라이트는 주로 남성인 오토 한에게 쏟아졌습니다. 마이트너는 그저 한의 유능한 조수 정도로 인식되곤 했습니다.

이것은 훗날 일어날 더 큰 비극의 예고편이었습니다. 1938년, 마이트너는 나치를 피해 스웨덴으로 망명한 상태에서 '핵분열(Nuclear Fission)' 의 원리를 세계 최초로 규명했습니다. 우라늄이 쪼개져 엄청난 에너지를 낸다는 사실을 수학적으로 계산해 낸 것입니다.

하지만 1944년 노벨 화학상은 실험을 수행했던 오토 한 단독에게만 수여되었습니다. 마이트너의 이름은 철저히 배제되었습니다. "망명한 유대인 여성 과학자를 챙겨주기엔 정치적으로 부담스럽다"는 노벨 위원회의 편견과 오토 한의 침묵 때문이었습니다.

마이트너는 훗날 이에 대해 씁쓸해하면서도, 친구였던 한을 원망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녀는 평생 독신으로 살며 과학과 결혼한 삶을 살았습니다.

 

🏆 1917년의 의미 : 잊힌 영웅들을 위하여

 

1917년의 노벨상은 비어 있었지만, 그 해 과학계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리제 마이트너가 발견한 프로트악티늄은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를 채우는 중요한 퍼즐 조각이 되었고, 그녀가 닦은 방사화학 기술은 훗날 원자력 시대를 여는 열쇠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과학계는 그녀의 업적을 기려 109번 원소에 '마이트너륨(Meitnerium)' 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노벨상을 받지는 못했지만, 아예 원소주기표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은 영원한 승리자가 된 것입니다.

 

🌏 맺음말 : 지하실에서 우주를 보다

 

리제 마이트너의 삶은 '유리천장''전쟁' 이라는 이중의 벽에 갇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어두운 지하실에서, 우주를 구성하는 근원적인 물질을 찾아냈습니다.

1917년의 빈자리는 단순히 수상자가 없었던 해가 아니라, 차별과 폭력 속에서도 결코 꺾이지 않았던 한 여성 과학자의 투혼이 빛났던 해로 기억되어야 합니다.

"인생은 평탄하지 않다. 하지만 우리가 끈기를 가지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믿는다면 그 어떤 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 리제 마이트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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