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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_Novel/305_노벨화학상

[1948 노벨화학상] 아르네 티셀리우스 : 섞여 있는 단백질을 전기로 나누다, '전기영동'의 창시자

by 어셈블러 2025. 1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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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는 물보다 진하다. 하지만 그 안에 무엇이 있을까?"

 

우리가 병원에서 피 검사를 하면, 간 수치가 어떻고 항체가 있느니 없느니 하는 복잡한 결과지를 받습니다. 투명한 노란색 액체인 '혈청(Serum)' 속에 녹아 있는 수백, 수천 가지의 단백질들을 어떻게 일일이 구별하고 분석할 수 있는 걸까요?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이것은 불가능의 영역이었습니다. 화학자들은 혈청 속에 '알부민'과 '글로불린'이라는 단백질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았지만, 그것들을 따로따로 분리해낼 방법이 없었습니다. 끓이거나 화학 약품을 쓰면 단백질이 변성되어(익어서) 못 쓰게 되고, 거름종이로 거르기엔 너무 미세했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는 상태 그대로, 아주 조심스럽게 단백질을 종류별로 줄 세울 방법은 없을까?"

오늘 소개할 1948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는 이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기(Electricity)' 를 도구로 선택한 인물입니다.

스웨덴의 생화학자이자 1926년 노벨상 수상자 테오도르 스베드베리의 수제자였던 아르네 티셀리우스(Arne Tiselius).

그는 단백질마다 전기를 띠는 성질이 다르다는 점을 이용해, 섞여 있던 단백질들을 마라톤 경주시키듯 분리해 내는 '전기영동(Electrophoresis)' 기술을 완성했습니다.

오늘날 범죄 수사에서 DNA를 분석하고, 친자 확인을 하고, 신종 바이러스를 검사하는 모든 기술의 시초가 된 그의 발명품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 스승의 그늘을 벗어나 : 원심분리기에서 전기장으로

 

1902년 스톡홀름에서 태어난 아르네 티셀리우스는 웁살라 대학에서 테오도르 스베드베리의 제자로 연구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스승인 스베드베리는 '초원심분리기' (1926년 노벨상)를 발명해 무게 차이로 단백질을 분리하는 대가였습니다. 티셀리우스도 처음에는 원심분리기를 다뤘습니다. 하지만 그는 곧 한계를 느꼈습니다.

"무게가 비슷한 단백질끼리는 원심분리기로도 구별이 안 된다. 다른 방법이 필요해."

그는 단백질의 또 다른 특성인 '전하(Charge)' 에 주목했습니다. 단백질은 아미노산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용액 속에서 양(+)전하를 띠거나 음(-)전하를 띱니다.

"이 용액에 전기를 걸어주면(+, -), 단백질들이 자기 전하에 따라 각자 다른 속도로 이동하지 않을까?"

이것이 바로 '전기영동(Electrophoresis)' 의 기본 아이디어였습니다. 이론은 간단했지만, 현실은 시궁창이었습니다.

 

🧐 4도의 마법 : 열(Heat)을 잡아라

 

티셀리우스가 처음 만든 장치로 실험을 했을 때, 결과는 엉망이었습니다. 전기를 걸어주자 용액이 뜨거워지면서 '대류 현상' 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마치 냄비에 물을 끓이면 물이 빙글빙글 돌며 섞이듯이, 기껏 전기로 분리해 놓은 단백질들이 열 때문에 다시 뒤섞여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열 때문에 단백질이 익어버리기도 했습니다.

티셀리우스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려 7년 동안 연구를 중단하고 물리학과 화학을 다시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1937년, 완벽하게 개선된 '티셀리우스 장치(Tiselius Apparatus)' 를 들고 돌아왔습니다.

 

❄️ 티셀리우스의 해결책

 

  1. U자관: 기다란 U자 모양의 유리관을 사용해 바닥에 무거운 단백질이 모이게 했습니다.
  2. 4℃ 냉각: 이것이 핵심이었습니다. 물은 4도에서 밀도가 가장 높고 대류가 가장 적게 일어납니다. 그는 장치 전체를 4도로 유지하여 열에 의한 섞임을 원천 봉쇄했습니다.
  3. 광학 시스템: 단백질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슐리렌(Schlieren) 광학법' 이라는 특수 촬영 기술을 도입해, 단백질이 이동하면서 생기는 미세한 굴절률 변화를 사진으로 찍었습니다.

 

⚡️ 알파, 베타, 감마의 탄생

 

1937년, 티셀리우스는 개량된 장치에 '말의 혈청' 을 넣고 전기를 걸었습니다. 이전까지 과학자들은 혈청 속에 '알부민'과 '글로불린' 두 가지만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슐리렌 사진을 현상해 보니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습니다. 가장 빠르게 이동한 알부민 뒤로, 글로불린이라고 뭉뚱그려 불렀던 덩어리가 세 개의 봉우리로 갈라져서 이동하고 있었습니다.

티셀리우스는 이 세 봉우리에 그리스 문자로 이름을 붙였습니다.

"알파(α), 베타(β), 그리고 감마(γ) 글로불린."

이것은 현대 면역학의 시작을 알리는 발견이었습니다. 특히 가장 느리게 이동한 '감마 글로불린' 이 바로 우리 몸의 면역을 담당하는 '항체(Antibody)' 라는 사실이 훗날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면역 글로불린(IgG)'의 정체가 바로 티셀리우스의 장치 위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

 

✍️ 흡착 분석 : 또 하나의 분리 기술

 

티셀리우스의 업적은 전기영동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흡착 분석(Adsorption Analysis)' , 즉 '크로마토그래피' 기술도 획기적으로 발전시켰습니다.

전기를 띠지 않는 물질은 전기영동으로 분리할 수 없습니다. 티셀리우스는 활성탄(숯)이나 특수 가루를 채운 관에 혼합물을 통과시키면, 물질마다 달라붙는 힘이 달라서 분리된다는 원리를 정교하게 다듬었습니다.

그는 이 방법을 통해 아미노산, 펩타이드, 당류 같은 작은 분자들까지 완벽하게 분리해 냈습니다.

"섞여 있으면 알 수 없다. 나누어야만 알 수 있다." 그는 화학의 가장 기본인 '분리(Separation)' 기술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장인이었습니다.

 

🏆 노벨상 : 생명과학의 도구를 만들다

 

1948년, 스웨덴 왕립과학원은 아르네 티셀리우스에게 노벨 화학상을 수여합니다. 수상 이유는 "전기영동과 흡착 분석에 관한 연구, 특히 혈청 단백질의 복잡한 성질을 규명한 공로" 였습니다.

스승인 스베드베리에 이어 제자인 티셀리우스까지 노벨상을 받으면서, 웁살라 대학은 분리 분석 화학의 세계적인 메카가 되었습니다.

티셀리우스의 기술은 이후 엄청난 파급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1950년대, 라이너스 폴링은 이 기술로 '겸상 적혈구 빈혈증' 환자의 헤모글로빈이 정상인과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최초의 분자 질환 규명) 오늘날 분자생물학 실험실에서 매일 쓰는 '젤 전기영동(Gel Electrophoresis)' 은 티셀리우스의 장치를 간편하게 개량한 것입니다. DNA 검사, 친자 확인, 범죄 수사 등 현대 과학 수사의 9할은 그의 아이디어에 빚지고 있습니다.

 

📚 TMI : 노벨 재단의 얼굴

 

1. 노벨 재단 의장

티셀리우스는 노벨상을 받은 후, 1960년부터 1964년까지 노벨 재단 의장을 역임했습니다. 그는 노벨상의 권위를 높이고 공정한 심사 시스템을 만드는 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스웨덴 과학계의 대부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2. 거대한 장치

티셀리우스가 처음 만든 전기영동 장치는 길이가 6미터나 되는 거대한 가구 같았습니다. 냉각 시스템과 광학 장비가 워낙 컸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손바닥만한 플라스틱 통에서 하는 실험이, 당시에는 집채만 한 기계가 필요한 최첨단 실험이었습니다.

3. 겸손한 성품

그는 평생 겸손하고 온화한 성품으로 존경받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발견이 생물학자들에게 유용한 도구가 되기를 바랐으며, 특허를 독점하기보다 기술을 널리 알리는 데 힘썼습니다.

 

🌏 맺음말 : 보이지 않는 것을 줄 세우다

 

아르네 티셀리우스는 우리에게 "섞여 있는 것은 혼돈이지만, 나누어 놓으면 질서가 된다" 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피 한 방울 속에 엉켜 있던 수천 가지의 단백질들은, 그가 만든 전기의 길 위에서 질서 정연하게 자신의 정체를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그중에서 우리를 병균으로부터 지켜주는 '항체(감마 글로불린)'가 발견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정밀한 진단 의학의 혜택은, 100년 전 4도의 차가운 물속에서 흔들림 없이 단백질을 지켜보던 티셀리우스의 끈기 덕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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