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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_Novel/305_노벨화학상

[1962 노벨화학상] 맥스 페루츠 & 존 켄드류 : 보이지 않는 생명의 건축물, 헤모글로빈과 미오글로빈의 3차원 지도를 그리다

by 어셈블러 2025. 1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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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는 왜 붉고, 근육은 어떻게 힘을 쓰는가?"

 

1950년대, 생물학계는 거대한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습니다. 왓슨과 크릭이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밝혀내며 유전 정보의 비밀을 풀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DNA는 설계도일 뿐입니다. 실제로 우리 몸을 움직이고, 숨 쉬게 하고, 소화시키는 일꾼은 바로 '단백질(Protein)' 입니다.

당시 과학자들은 단백질이 아미노산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1958년 생어의 발견)은 알았지만, 그것이 '어떻게 생겼는지' 는 전혀 몰랐습니다. 수천 개의 원자가 뭉쳐 있는 이 거대한 덩어리는 현미경으로도 보이지 않았고, 화학식으로 쓰기엔 너무 복잡했습니다.

"단백질의 모양을 알 수 없다면, 단백질이 어떻게 일하는지도 영원히 알 수 없다."

마치 자동차 엔진의 내부 구조를 보지 않고서는 엔진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는 것과 같았습니다.

오늘 소개할 1962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들은 20년이 넘는 끈질긴 노력 끝에, 이 보이지 않는 단백질의 '3차원 입체 구조' 를 인류 최초로 눈앞에 보여준 영국의 과학자들입니다.

피 속에서 산소를 나르는 트럭 '헤모글로빈' 의 구조를 밝힌 뚝심의 과학자 맥스 페루츠(Max Perutz). 그리고 근육 속에 산소를 저장하는 창고 '미오글로빈' 의 구조를 밝힌 천재적인 분석가 존 켄드류(John Kendrew).

이들이 엑스선 사진 수만 장을 찍어 완성한 '생명의 지도' 덕분에, 우리는 비로소 생명 현상을 '분자의 기계적 움직임'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 불가능에 도전하다 : 단백질에 엑스선을 쏘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맥스 페루츠는 케임브리지 대학의 캐번디시 연구소(러더퍼드, 톰슨 등이 있던 그곳)에서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그의 목표는 '헤모글로빈(Hemoglobin)' 의 구조를 밝히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선택한 도구는 'X선 결정학(X-ray Crystallography)' 이었습니다. 단백질을 결정(Crystal)으로 만든 뒤 엑스선을 쏘면, 원자에 부딪힌 엑스선이 사방으로 흩어지며(회절) 필름에 점들을 찍습니다. 이 점들의 위치와 밝기를 수학적으로 역추산하면 원자의 위치를 알아낼 수 있다는 원리였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복잡성' 이었습니다. 이전까지 이 방법으로 밝혀낸 것은 소금(NaCl)이나 작은 비타민 정도였습니다. 원자가 기껏해야 수십 개 수준이었죠. 그런데 헤모글로빈은 원자가 무려 수천 개가 넘는 거물이었습니다. 필름에 찍힌 수만 개의 점들은 해독 불가능한 암호처럼 보였습니다.

동료들은 말렸습니다. "맥스, 그건 불가능해. 에베레스트산을 맨손으로 오르는 격이야." 하지만 페루츠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무려 22년 동안이나 이 문제에 매달렸습니다.

 

🧐 신의 한 수 : 중금속을 달아라

 

아무리 찍어도 해독이 안 되자, 페루츠는 기막힌 아이디어를 떠올립니다.

"단백질 결정의 특정 위치에 아주 무거운 원자(수은, 금)를 딱 하나만 붙여보면 어떨까?"

무거운 금속 원자는 전자가 많아서 엑스선을 아주 강하게 튕겨냅니다.

  1. 원래 단백질 사진을 찍는다.
  2. 금속을 붙인 단백질 사진을 찍는다.
  3. 두 사진을 비교하면, 금속 때문에 달라진 점들이 보인다.

이 차이를 기준점(Reference) 삼아 계산하면, 나머지 원자들의 위치도 파악할 수 있다는 논리였습니다. 이를 '동형 치환법(Isomorphous Replacement)' 이라고 합니다.

페루츠의 이 아이디어는 적중했습니다. 드디어 안개 속에 싸여 있던 단백질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 존 켄드류 : 고래 고기에서 찾은 '미오글로빈'

 

페루츠가 헤모글로빈과 씨름하는 동안, 그의 제자이자 동료인 존 켄드류는 조금 더 작은 단백질인 '미오글로빈(Myoglobin)' 에 도전했습니다.

미오글로빈은 근육 속에 산소를 저장하는 단백질로, 잠수하는 동물에게 특히 많습니다. 켄드류는 페루에서 잡힌 향유고래의 근육을 구해 실험했습니다.

1958년, 켄드류는 마침내 인류 역사상 최초로 단백질의 3차원 구조를 해독해 냅니다. 그 모습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단백질이 다이아몬드나 소금처럼 규칙적이고 예쁜 모양일 거라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드러난 미오글로빈의 모습은 마치 '소시지들이 꼬불꼬불 뭉쳐 있는 덩어리'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질서가 있었습니다. 라이너스 폴링(1954년 수상자)이 종이접기로 예측했던 '알파 나선(Alpha helix)' 구조가 실제로 존재했던 것입니다. 켄드류의 지도는 복잡해 보이는 생명체 속에 정교한 나선형 파이프들이 얽혀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 맥스 페루츠 : 숨 쉬는 분자, 헤모글로빈

 

1959년, 페루츠도 마침내 헤모글로빈의 구조를 밝혀냈습니다. 헤모글로빈은 미오글로빈 4개가 뭉쳐 있는 것과 비슷한 거대한 구조였습니다. (4량체)

페루츠의 발견이 위대한 점은, 그가 "살아 움직이는 기계" 로서의 단백질을 보여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산소가 없을 때''산소가 결합했을 때' 의 구조를 각각 따로 찍어서 비교했습니다.

  1. 산소가 없을 때: 헤모글로빈의 4개 덩어리는 꽉 닫혀 있습니다. (긴장 상태)
  2. 산소가 붙을 때: 첫 번째 산소가 붙으면, 전체 구조가 '철컥' 하고 비틀리면서 느슨해집니다. 그러면 나머지 산소들이 아주 쉽게 달라붙습니다. (이완 상태)

"헤모글로빈은 폐에서는 문을 활짝 열어 산소를 담고, 조직에 가면 문을 닫아 산소를 쥐어짜 뱉어낸다. 이것은 말 그대로 '분자 수준의 호흡'이다."

이것은 단백질이 고정된 조각상이 아니라, 모양을 바꾸며 기능을 수행하는 '나노 머신' 임을 증명한 역사적인 발견이었습니다.

 

🏆 1962년 : 분자생물학의 화려한 대관식

 

1962년, 스웨덴 한림원은 맥스 페루츠와 존 켄드류에게 노벨 화학상을 수여합니다. 수상 이유는 "구형 단백질의 구조에 관한 연구" 였습니다.

흥미롭게도, 같은 해(1962년) 노벨 생리의학상은 왓슨, 크릭, 윌킨스가 받았습니다. (DNA 구조 발견) 이들은 모두 케임브리지 대학의 '캐번디시 연구소' 출신이거나 관계가 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 DNA 구조 (설계도) → 생리의학상
  • 단백질 구조 (일꾼) → 화학상

1962년은 인류가 생명 현상의 두 가지 핵심 축인 '정보(DNA)'와 '기능(단백질)'을 모두 분자 수준에서 이해하게 된, 생물학 역사상 가장 기념비적인 해로 기록됩니다.

 

📚 TMI : 얼음 항공모함과 과학자의 집념

 

1. 페루츠와 '하박국 프로젝트'

2차 대전 중, 영국은 철이 부족해지자 엉뚱한 계획을 세웁니다. "빙하로 항공모함을 만들자!" 이 '하박국 프로젝트(Project Habbakuk)' 의 핵심 연구원이 바로 페루츠였습니다. 그는 얼음에 톱밥을 섞으면 강철처럼 단단해지고 잘 녹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파이크리트). 비록 이 항공모함은 만들어지지 못했지만, 그의 결정학 지식이 엉뚱한 곳에서 쓰인 사례입니다.

2. 22년의 기다림

페루츠가 처음 헤모글로빈 결정을 찍기 시작한 것은 1937년이었습니다. 구조를 푼 것은 1959년입니다. 무려 22년 동안 그는 매일 지하 실험실에서 엑스선을 쐬고 수학 계산을 했습니다. "나는 내가 죽기 전에 이 문제를 풀 수 있을지 몰랐다"는 그의 회고는 과학자의 끈기가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3. 왓슨과 크릭의 보스

DNA 이중나선을 밝힌 왓슨과 크릭이 소속된 연구 팀의 리더가 바로 맥스 페루츠였습니다. 페루츠는 자신의 연구도 바쁜 와중에, 혈기 왕성하고 사고뭉치였던 두 젊은 천재를 감싸주고 지원해 주었습니다. 그는 진정한 리더였습니다.

 

🌏 맺음말 : 구조가 기능을 말한다

 

맥스 페루츠와 존 켄드류는 우리에게 "구조를 알면 기능을 알 수 있다(Structure determines Function)" 는 생물학의 대원칙을 확립해 주었습니다.

왜 피는 붉은지, 왜 숨을 쉬어야 하는지, 그 막연했던 생명 현상이 수천 개의 원자가 정교하게 조립된 기계 장치의 작동 결과임이 밝혀졌습니다.

오늘날 신약을 개발할 때, 컴퓨터 화면에 바이러스 단백질을 띄워놓고 그 틈새에 맞는 약물을 디자인하는 모든 과정은, 1962년 두 과학자가 처음으로 그려낸 그 꼬불꼬불한 분자 지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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