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분자는 의자 위에서 춤춘다"
화학 시간에 벤젠 고리를 그릴 때, 우리는 보통 종이 위에 평평한 육각형을 그립니다. 마치 거북이 등껍질이나 벌집 모양처럼 납작하게 말이죠.
하지만 20세기 중반, 화학자들은 이상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똑같은 육각형 고리를 가진 물질인데도, 어떤 것은 반응이 빠르고 어떤 것은 느리며, 어떤 것은 안정하고 어떤 것은 불안정했습니다. 평면 그림으로는 도저히 설명이 안 되는 차이였습니다.
"혹시 우리가 분자를 너무 납작하게만 생각한 게 아닐까?" "분자가 만약 입체적으로 꼬여 있다면?"
오늘 소개할 1969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들은 분자를 2차원 평면에서 끄집어내어 '3차원 입체 공간' 속에 앉힌 인물들입니다.
분자가 가장 편안해하는 자세인 '의자(Chair) 형태' 를 밝혀낸 노르웨이의 화학자 오드 하셀(Odd Hassel). 그리고 그 입체 구조가 화학 반응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형태 분석(Conformational Analysis)' 의 원칙을 세운 영국의 화학자 데릭 바턴(Derek H.R. Barton).
종이 위의 화학을 공간의 화학으로 바꾼 그들의 입체적인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 오드 하셀 : 감옥에서 피어난 상상력
이야기의 시작은 1940년대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입니다. 오드 하셀은 '사이클로헥세인(Cyclohexane)' 이라는 탄소 6개짜리 고리 화합물을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에도 탄소 고리가 평평하지 않을 거라는 추측은 있었지만, 정확한 모양은 몰랐습니다. 하셀은 전자 회절(Electron Diffraction)이라는 기술을 이용해 기체 상태의 분자 구조를 촬영했습니다.
하지만 1943년, 나치 독일이 노르웨이를 점령하면서 하셀은 수용소에 갇히게 됩니다. 그는 감옥에서도 동료들과 토론하며 머릿속으로 분자의 모양을 그렸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풀려난 그는 연구를 완성했습니다.
"사이클로헥세인 고리는 평평하지 않다. 탄소들이 위아래로 엇갈리며 마치 사람이 앉는 '의자(Chair)' 모양을 하고 있다!"
그는 이 의자 형태가 가장 에너지가 낮고 안정적인 상태이며, 분자가 다른 모양(배 모양 등)으로 억지로 비틀리면 에너지가 높아져 불안정해진다는 사실을 밝혔습니다.
또한 의자 모양에서 탄소에 붙은 수소들이 '수직(Axial)' 으로 서 있는지, '수평(Equatorial)' 으로 누워 있는지에 따라 성질이 달라진다는 것도 발견했습니다.
🧐 데릭 바턴 : 입체 구조가 반응을 지배한다
하셀이 '구조'를 밝혔다면, 영국의 유기화학자 데릭 바턴은 그 구조가 실제 화학 반응에서 어떤 '기능' 을 하는지를 규명했습니다.
1950년, 바턴은 하버드 대학에 초빙 교수로 가 있었습니다. 그는 도서관에서 하셀의 논문을 읽고 전율을 느꼈습니다. "이거다! 스테로이드나 호르몬 같은 복잡한 물질들의 반응이 제각각인 이유가 바로 이거였어!"
당시 스테로이드 화학자들은 똑같은 화학식을 가진 물질이 왜 반응 속도가 10배, 100배씩 차이 나는지 몰라 헤매고 있었습니다. 바턴은 하셀의 '의자 이론'을 스테로이드 같은 복잡한 분자에 적용했습니다.
[ 바턴의 통찰 ]
- 분자 내의 작용기가 '수평(Equatorial)' 위치에 있으면, 탁 트인 공간에 나와 있어서 다른 물질과 쉽게 반응한다. (반응 빠름)
- 반대로 '수직(Axial)' 위치에 있으면, 위아래로 튀어나온 다른 원자들에 가려져서(입체 장애) 접근하기 힘들다. (반응 느림)
그는 단 4페이지짜리 짧은 논문으로 수십 년간 풀리지 않던 유기화학의 난제들을 단숨에 해결해 버렸습니다.
"분자의 화학적 성질은 평면도가 아니라, 3차원 공간에서의 '형태(Conformation)'가 결정한다."
이것이 바로 '형태 분석(Conformational Analysis)' 의 시작이었습니다.
⚡️ 왜 중요한가? : 열쇠는 구멍에 맞아야 한다
바턴과 하셀의 발견은 단순히 분자 모양 맞추기 게임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생명의 원리' 와 직결됩니다.
효소와 기질, 호르몬과 수용체, 약물과 바이러스. 이 모든 상호작용은 '열쇠와 자물쇠' 처럼 3차원 모양이 딱 들어맞아야만 일어납니다.
- 아무리 성분이 같아도, 모양이 비틀려 있으면(다른 형태) 약효가 없습니다.
- 반대로 모양을 알면, 그 모양에 딱 맞는 신약을 설계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제약 회사들이 신약을 개발할 때 컴퓨터로 분자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가장 편안한 자세(최적 형태)'를 찾는 것은, 바로 바턴과 하셀이 만든 규칙을 따르는 것입니다.
🏆 노벨상 : 화학의 차원을 높이다
1969년, 스웨덴 왕립과학원은 데릭 바턴과 오드 하셀에게 노벨 화학상을 수여합니다. 수상 이유는 "형태(Conformation)의 개념을 발전시키고 화학에 적용한 공로" 였습니다.
이들의 수상은 유기화학이 '2D(평면)'에서 '3D(입체)' 로 도약했음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사건이었습니다.
바턴은 훗날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지식이 아니라 상상력이다. 나는 분자가 살아 움직이는 모습을 상상했다."
📚 TMI : 100달러짜리 아이디어
1. 4페이지의 기적
바턴이 1950년에 쓴 그 전설적인 논문(Experientia)은 고작 4페이지였습니다. 그는 이 논문을 쓰기 위해 몇 달을 고민했지만, 정작 집필은 하룻밤 만에 끝냈다고 합니다. "모든 것이 너무나 명확해서 그냥 받아적기만 하면 되었다"고 합니다.
2. 하셀의 불운과 극복
하셀은 나치 수용소에 갇혀 있을 때도 동료들에게 화학 강의를 하며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는 전쟁이 끝난 후 연구 장비가 다 망가진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고 낡은 장비를 고쳐 연구를 완성했습니다.
3. 일요일의 실험
바턴은 지독한 일벌레였습니다. 그는 일요일 아침에도 실험실에 나와 제자들을 기다리곤 했습니다. 제자들이 안 나오면 전화를 걸어 "자네, 오늘 실험 결과가 궁금하지 않나?"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제자들에게는 공포였겠지만, 그 열정이 위대한 발견을 만들었습니다.
🌏 맺음말 : 세상은 입체다
데릭 바턴과 오드 하셀은 우리에게 "평면을 믿지 마라" 고 가르쳐 줍니다.
종이 위에 그려진 납작한 화학식은 분자의 진짜 모습이 아닙니다. 실제 분자들은 공간 속에서 의자처럼 꺾이고, 배처럼 휘어지며 끊임없이 가장 편안한 자세를 찾아 춤을 춥니다.
그 춤사위(형태)가 바로 물질의 성격을 결정하고, 나아가 생명의 미묘한 차이를 만들어냅니다. 우리가 오늘날 입체 영화를 보듯 분자를 입체적으로 이해하게 된 것은, 1969년 두 거장이 씌워준 3D 안경 덕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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