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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_Novel/306_노벨평화상

[1946 노벨평화상] 에밀리 그린 발치 & 존 롤리 모트 : 교수직을 잃은 여성과 YMCA의 지도자, 세계를 치유하다

by 어셈블러 2025. 1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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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을 내려놓은 뒤에야 비로소 평화의 작업이 시작된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습니다.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은 패망했고, 총성은 멈췄습니다. 하지만 세계는 상처투성이였습니다. 수천만 명이 죽었고, 유럽과 아시아는 폐허가 되었으며, 살아남은 사람들은 굶주림과 증오 속에 남겨졌습니다.

전쟁이 끝났다고 평화가 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진정한 평화는 무너진 건물을 세우고, 갈라진 마음을 잇는 '치유(Healing)''재건(Reconstruction)' 의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1946년, 전쟁 후 처음으로 재개된 노벨 평화상 시상식에서 위원회는 평생을 바쳐 이 치유의 작업을 해온 두 명의 미국인을 호명했습니다.

전쟁 반대를 외치다 교수직에서 쫓겨났지만, 끝까지 국제 연대를 포기하지 않았던 여성 사회학자 에밀리 그린 발치(Emily Greene Balch). 그리고 종교와 국경을 초월해 전 세계 청년들을 하나로 묶으며 YMCA를 이끌었던 영적 외교관 존 롤리 모트(John Raleigh Mott).

총칼이 아닌 '대화''봉사' 로 세계를 연결하려 했던 두 거장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 에밀리 그린 발치 : 해직 교수가 된 평화주의자

 

에밀리 그린 발치는 1867년 미국 보스턴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브린마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파리와 베를린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당대 최고의 여성 지식인이었습니다.

1896년, 그녀는 웰슬리 대학(Wellesley College)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녀의 강의는 학생들에게 인기가 높았고, 그녀는 빈민가 문제와 이민자 문제 해결에 앞장서는 존경받는 학자였습니다.

하지만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그녀의 인생은 급격하게 바뀝니다. 미국 사회 전체가 참전 열기에 휩싸였을 때, 발치는 "전쟁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며 반전 평화 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녀는 1915년 제인 애덤스(1931년 수상자)와 함께 헤이그 국제 여성 대회에 참석했고, 전쟁 당사국들을 돌며 중재를 호소했습니다. 이 행동은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대학 이사회는 그녀를 "비애국적이고 위험한 인물"로 낙인찍었고, 결국 1918년 그녀를 교수직에서 해고했습니다.

20년 넘게 몸담았던 강단에서 쫓겨났지만, 그녀는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진리를 가르치는 학자가 전쟁이라는 거대한 거짓말에 침묵할 수는 없다."

그녀는 학교를 떠나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갔습니다. 제네바로 건너가 '평화와 자유를 위한 여성 국제연맹(WILPF)' 의 사무총장을 맡아, 국제 연맹의 활동을 지원하고 군축 운동을 이끌었습니다. 그녀에게 평화는 강의실의 이론이 아니라, 삶 그 자체였습니다.

 

🧐 존 롤리 모트 : 세계를 여행한 영적 외교관

 

에밀리 발치가 지성으로 평화를 외쳤다면, 존 롤리 모트는 신앙과 봉사로 평화를 실천했습니다. 1865년 뉴욕에서 태어난 모트는 코넬 대학 시절, 기독교 신앙에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그는 선교사가 되어 특정 지역에 가는 대신, 전 세계의 청년들을 연결하는 일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YMCA(기독교청년회)WSCF(세계기독학생연맹) 의 지도자가 되어 전 세계를 누볐습니다.

그가 평생 여행한 거리는 무려 300만 킬로미터. 지구를 75바퀴나 돈 셈입니다. 당시 비행기도 없던 시절에 배와 기차로만 이룬 기록입니다.

그의 목표는 단순했습니다. "전 세계 청년들이 서로 만나 친구가 된다면, 미래에는 전쟁이 사라질 것이다."

그는 탁월한 조직가이자 모금가였습니다. 록펠러 같은 부호들을 설득해 막대한 자금을 모았고, 그 돈으로 전 세계에 YMCA 건물을 짓고 청년들을 교육했습니다.

특히 1차 대전과 2차 대전 중 그의 활약은 눈부셨습니다. 그는 전쟁 포로들을 돕기 위해 '전쟁 포로 지원 기금' 을 모금했는데, 무려 2억 5천만 달러를 모았습니다. 이 돈으로 적십자와 협력하여 포로들에게 책, 운동기구, 악기를 보내고 종교 행사를 열어주었습니다.

"철조망 속에 갇힌 젊은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빵뿐만이 아니다. 그들이 인간임을 잊지 않게 해줄 정신적인 양식이 필요하다."

그는 종교인이라기보다는, 국경 없는 세상을 꿈꾸는 '국제적인 정치가' 에 가까웠습니다. 윌슨 대통령은 그를 주중 대사로 임명하려 했지만, 그는 "나는 이미 세계의 대사입니다"라며 정중히 거절했습니다.

 

⚡️ 2차 대전과 유엔의 탄생

 

발치와 모트는 2차 대전 중에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발치는 고령의 나이에도 나치 박해를 받는 난민들을 돕는 활동을 했고, "전쟁이 끝나면 국제 연맹보다 더 강력한 기구가 필요하다"며 '국제 연합(UN)' 의 필요성을 역설했습니다.

모트 역시 전쟁 중에도 끊임없이 각국 지도자들을 만나며 평화적 해결을 호소했습니다. 비록 전쟁을 막지는 못했지만, 그들이 뿌려놓은 '국제주의'의 씨앗은 전후 세계 질서를 재편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 노벨상 : 평생의 헌신에 대한 보상

 

1946년, 노르웨이 노벨 위원회는 에밀리 그린 발치와 존 롤리 모트에게 노벨 평화상을 수여합니다. 1945년 코델 헐(유엔 창설 공로)에 이어,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고 국제 협력의 기반을 닦은 인물들에게 상을 준 것입니다.

  • 에밀리 그린 발치: 평화와 자유를 위한 여성 국제연맹(WILPF)을 이끌며 평화 운동을 지속한 공로.
  • 존 롤리 모트: 국경을 초월한 종교 협력과 청년 운동, 그리고 전쟁 구호 활동의 공로.

발치는 79세, 모트는 81세였습니다. 평생을 평화에 바친 두 노병에 대한 늦었지만 확실한 헌사였습니다.

발치는 수상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전 세계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협력하며 살아가는, 적극적이고 살아있는 평화입니다."

 

📚 TMI : 기부와 겸손

 

1. 발치의 기부

에밀리 발치는 평생 독신으로 검소하게 살았습니다. 그녀는 노벨상 상금을 받자마자 한 푼도 남기지 않고 자신이 몸담았던 WILPF에 전액 기부했습니다. 그녀에게 돈은 평화를 위한 도구일 뿐이었습니다.

2. 웰슬리 대학의 후회

발치를 해고했던 웰슬리 대학은 훗날 그녀가 노벨상을 받자 크게 후회하며 그녀를 복직시키려 했습니다. 하지만 발치는 정중히 거절했습니다. 대신 웰슬리 대학은 그녀를 기리는 기념관을 세우고 그녀의 업적을 기리고 있습니다.

3. 모트의 노벨상

존 롤리 모트는 1910년대부터 꾸준히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었습니다. 그는 수상 소감을 묻는 기자에게 "나는 상을 받기 위해 일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 상이 세계 평화 운동에 도움이 된다면 기쁘게 받겠다"고 말했습니다.

 

🌏 맺음말 : 연결하는 자가 평화를 만든다

 

1946년 노벨 평화상은 우리에게 "연결(Connection)" 의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에밀리 그린 발치는 여성들을 연결했고, 존 롤리 모트는 청년들을 연결했습니다. 정치인들이 국경을 닫고 총을 겨눌 때, 그들은 국경을 넘어 사람과 사람을 이었습니다.

그들이 만든 그 끈끈한 유대감이 있었기에, 인류는 두 번의 세계대전이라는 끔찍한 비극을 딛고 다시 일어서서 유엔(UN)이라는 하나의 지붕 아래 모일 수 있었습니다.

전쟁의 폐허 위에서 다시 피어난 평화의 꽃, 그 뿌리에는 두 거장의 땀방울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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