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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_Novel/306_노벨평화상

[1980 노벨평화상] 아돌포 페레즈 에스키벨 : '더러운 전쟁'에 맞선 예술가이자 인권의 건축가

by 어셈블러 2025. 1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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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10월, 전 세계의 시선은 탱고와 축구의 나라 아르헨티나로 쏠렸습니다. 하지만 그 시선은 1978년 월드컵 우승의 환호가 아닌, 감옥의 차가운 쇠창살과 고문실의 비명을 향해 있었습니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호르헤 비델라(Jorge Videla)가 이끄는 군사 정권의 철권통치 아래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밤마다 사람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어머니들은 텅 빈 광장에서 아이들의 사진을 들고 울부짖었습니다.

이 공포의 시대, 노벨 위원회는 감옥에서 막 풀려난 한 예술가를 평화상 수상자로 지목했습니다. 유명한 정치인도, 대단한 혁명가도 아니었습니다. 평범하게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조각상을 만들던 건축가, 아돌포 페레즈 에스키벨 (Adolfo Pérez Esquivel)이었습니다.

군사 정권은 그를 "체제 전복 세력"이라 불렀지만, 노벨 위원회는 그를 "어둠 속의 등불" 이라고 불렀습니다.

오늘은 가장 아름다운 것을 만드는 손으로 가장 추악한 폭력에 맞서 싸운, 아르헨티나의 양심 아돌포 페레즈 에스키벨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 예술가, 침묵을 조각하다

 

1931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난 에스키벨은 본래 촉망받는 조각가이자 건축가였습니다. 그는 라플라타 국립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학생들에게 예술을 가르쳤습니다. 그의 삶은 작업실과 강의실을 오가는 평온한 일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시대가 그를 작업실에 머물게 두지 않았습니다.

✝️ 비폭력의 길로 들어서다

1960년대 후반부터 라틴 아메리카 전역에는 군사 쿠데타와 독재의 광풍이 몰아쳤습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에스키벨은 '해방 신학' 과 간디의 '비폭력 저항' 사상에 깊이 매료되었습니다.

그는 1974년, '평화와 정의를 위한 봉사' (SERPAJ, Servicio Paz y Justicia)라는 단체의 라틴 아메리카 총조정관을 맡았습니다. 그는 붓을 내려놓고 빈민가로 들어갔습니다. 가난한 농민들의 땅을 지켜주고, 억울하게 잡혀간 노동자들을 변호하는 것이 그의 새로운 '예술 활동'이 되었습니다.

 

🩸 더러운 전쟁 (Dirty War) : 사라진 사람들

 

1976년, 비델라 장군이 쿠데타로 집권하면서 아르헨티나는 지옥으로 변했습니다. 군사 정권은 좌익 게릴라를 소탕한다는 명분 아래, 자신들에게 반대하는 모든 사람을 납치, 고문, 살해했습니다. 이를 역사상 '더러운 전쟁' (Guerra Sucia)이라고 부릅니다.

👻 실종자들 (Los Desaparecidos)

이 시기에 약 3만 명의 시민이 '실종' 되었습니다. 그들은 한밤중에 군용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끌려갔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마취된 채 비행기에 실려 산채로 바다에 던져졌습니다.

에스키벨은 이 끔찍한 인권 유린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목숨을 걸었습니다. 그는 국제연합(UN)과 인권 단체들에 아르헨티나의 참상을 고발하는 보고서를 끊임없이 타전했습니다. 군부에게 그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습니다.

 

⛓️ 14개월의 수감 : 죽음의 문턱에서

 

1977년 4월, 에스키벨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연방경찰청에 여권을 갱신하러 갔다가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습니다. 재판도, 영장도 없었습니다. 그는 그대로 악명 높은 고문실로 끌려갔습니다.

✈️ 죽음의 비행기

그는 훗날 인터뷰에서 당시의 공포를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어느 날 그들이 나를 비행기에 태웠습니다. 나는 직감했습니다. '아, 나도 바다에 던져지겠구나.' 나는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비행기가 이륙하고 바다 쪽으로 향하던 중, 갑자기 무전이 울렸습니다. 조종사는 항로를 바꿨고, 그는 기적적으로 라플라타의 군 교도소에 수감되었습니다. 국제적인 인권 운동가인 그를 살해할 경우 감당해야 할 국제사회의 비난을 군부가 두려워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 벽에 그린 십자가

그는 14개월 동안 좁은 독방에 갇혀 지냈습니다. 빛도 들어오지 않는 곳에서 그는 자신의 피로 벽에 십자가를 그리고 기도했습니다. 육체적인 고문보다 더 힘든 것은 정신적인 고통이었지만, 그는 단식 투쟁으로 맞서며 동료 수감자들을 격려했습니다.

1978년, 앰네스티를 비롯한 전 세계의 구명 운동 덕분에 그는 석방되었지만, 여전히 가택 연금 상태에서 감시를 받아야 했습니다.

 

🏆 1980년 노벨 평화상 : 독재자의 심장에 비수를 꽂다

 

1980년 10월, 노벨 위원회의 발표는 아르헨티나 군사 정권에게는 그야말로 '핵폭탄' 과 같았습니다.

"아돌포 페레즈 에스키벨은 아르헨티나의 암흑 속에서 비폭력의 원칙을 지키며 인권을 위해 싸웠습니다. 그는 사회 정의 없이는 평화도 없음을 몸소 보여주었습니다."

군부는 당황했습니다. 그들은 "에스키벨은 테러리스트를 옹호하는 범죄자"라며 노벨 위원회를 비난했습니다. 언론 통제를 통해 수상 소식을 축소하려 했지만, 이미 전 세계의 방송이 그의 집 앞으로 몰려들었습니다.

🛡️ 노벨상이라는 방패

노벨 평화상은 그에게 단순한 명예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생명 보험' 이자 강력한 '방패' 였습니다. 이제 전 세계가 주목하는 노벨상 수상자를 군부가 함부로 건드릴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수상 소감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상을 나 개인이 아닌, 라틴 아메리카의 모든 민중과 실종된 형제자매들에게 바칩니다."

 

👵 오월 광장의 어머니들 (Madres de Plaza de Mayo)

 

에스키벨의 수상은 '오월 광장의 어머니들' 에게도 큰 힘이 되었습니다. 하얀 머리수건을 쓰고 대통령궁 앞 광장을 돌며 "내 아이를 돌려달라"고 시위하던 어머니들.

에스키벨은 노벨상 상금으로 그들을 지원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국제 사회에 전달하는 확성기가 되었습니다. 군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들의 행진은 멈추지 않았고, 결국 1983년 군사 독재 정권은 무너졌습니다.

 

🧐 TMI : 에스키벨의 뒷이야기

 

예술가이자 투사였던 그의 흥미로운 면모들입니다.

  • 프란치스코 교황과의 인연: 1970년대 당시 아르헨티나 예수회 관구장이었던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리오 신부(현 프란치스코 교황)와 에스키벨은 미묘한 관계였습니다. 일각에서는 교황이 군부 독재에 침묵했다고 비판했지만, 에스키벨은 2013년 교황 선출 당시 "그는 독재의 공범이 아니었다. 뒤에서 조용히 많은 사람을 구했다" 며 그를 옹호해 논란을 잠재웠습니다.
  • 예술 활동의 지속: 노벨상 수상 이후에도 그는 조각가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라틴 아메리카 난민 기념비'를 세우는 등 예술을 통해 평화와 인권의 메시지를 전하는 작업을 계속했습니다. 그의 작품은 투박하지만 강렬한 생명력을 담고 있다고 평가받습니다.
  • 한국 방문: 그는 한국의 민주화 운동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1990년대 방한하여 김대중 전 대통령과 만남을 가졌으며, 한반도 평화 문제에 대해서도 꾸준히 목소리를 냈습니다.

 

✍️ 마치며 : 기억은 평화의 뿌리

 

아돌포 페레즈 에스키벨은 말합니다.

"기억하지 않는 백성에게 미래는 없다. 과거의 비극을 잊는 순간, 그 비극은 다시 반복된다."

그가 1980년에 쏘아 올린 작은 공은 아르헨티나의 군사 독재를 무너뜨리는 거대한 눈사태가 되었습니다. 그는 총보다 강한 것이 신념이며, 폭력보다 강한 것이 기억임을 증명했습니다.

오늘날 아르헨티나는 과거의 아픔을 딛고 민주주의 국가로 섰습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거리 어딘가에서, 90세가 넘은 노년의 조각가는 여전히 평화를 조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다음 포스트에서는 1981년으로 넘어갑니다. 1951년과 1981년, 무려 두 번이나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유일한 유엔 산하 기구, 유엔난민기구(UNHCR) 의 헌신적인 이야기를 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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