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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_Novel/301_노벨물리학

[1921 노벨물리학상]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 우주를 다시 쓴 남자가, 정작 '빛 알갱이' 하나로 노벨상을 받은 사연

by 어셈블러 2026. 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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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노벨 물리학상.

 

이 상의 주인공을 말하면 아마 지구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일 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과학자. 혀를 내밀고 있는 그 사진의 주인공.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보겠습니다.

 

"아인슈타인은 무엇 으로 노벨상을 받았을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 있게 대답합니다. "당연히 상대성이론이지!" E=mc². 시간이 느려지고, 공간이 휘어지고, 블랙홀이 존재한다는 것을 예언한 그 위대한 이론 말입니다.

 

하지만 정답은, 아닙니다.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이론으로 노벨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가 노벨상을 받은 진짜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론 물리학에 대한 공헌, 특히 광전효과 법칙의 발견을 인정하여"

 

우주의 법칙을 다시 쓴 남자가, 정작 '빛이 알갱이다'라는 한 문장으로 상을 받은 것입니다. 그것도 수상까지 16년이나 걸렸고, 시상식에는 참석조차 하지 않았으며, 상금은 전액 전 부인에게 넘어갔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20세기 최고의 천재를 둘러싼, 과학과 정치와 인간 드라마가 뒤엉킨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 파트 1. 특허국의 말단 직원, 물리학의 신이 되다

 

 

모든 이야기는 1905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스위스 베른. 연방 특허국의 3급 심사관으로 일하는 스물여섯 살의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1879년 3월 14일 독일 울름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수학과 물리학에 비범한 재능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권위적인 독일 교육 시스템과는 맞지 않았고, 결국 스위스 취리히 공과대학으로 진학했습니다.

 

졸업 후에는 교수 자리를 구하지 못했습니다. 교수들의 추천서를 받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수업에 잘 출석하지 않았고, 교수의 권위에 도전하는 태도가 눈밖에 났던 것입니다. 결국 친구의 아버지 도움으로 베른 연방 특허국에 취직했고, 발명품 특허 신청서를 검토하는 것이 그의 하루 일과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평범해 보이는 공무원이 퇴근 후 서재에서 쓴 논문 네 편이, 인류가 우주를 이해하는 방식을 영원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기적의 해, 4편의 폭탄

 

물리학자들은 1905년을 기적의 해 라고 부릅니다. Annus Mirabilis. 아인슈타인이 이 해에 발표한 네 편의 논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광전효과 — 빛은 파동이 아니라 에너지 알갱이인 광양자다.

2. 브라운 운동 — 꽃가루가 물 위에서 불규칙하게 떨리는 이유는 원자가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3. 특수 상대성이론 — 시간과 공간은 절대적이지 않다. 빛의 속도만이 절대적이다.

4. 질량-에너지 등가 — E=mc². 아주 작은 질량도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품고 있다.

 

뉴턴 이후 약 200년 만에 물리학의 지도를 통째로 다시 그린 혁명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학계의 반응은 의외로 미지근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대학 교수도 아닌 특허국 직원이었으니까요. 그의 논문은 너무나 파격적이어서, 이해하는 사람 자체가 거의 없었습니다.

 

특히 상대성이론은 "시간이 느려진다", "공간이 휘어진다"는 주장을 담고 있었는데, 이는 당시 상식으로는 미치광이의 헛소리에 가까웠습니다. 뉴턴이 세워놓은 절대적 시간, 절대적 공간의 개념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었으니까요.

 

그런데 바로 이 네 편의 논문 중 훗날 노벨상의 근거가 된 것은, 가장 '소박해' 보이는 첫 번째 논문, 광전효과 였습니다.

 

 


 

⚡️ 파트 2. 빛은 알갱이다 — 200년 된 상식을 뒤집다

 

 

광전효과가 무엇인지 이해하려면, 먼저 당시 물리학계의 '상식'을 알아야 합니다.

 

 

빛은 파동이다? — 200년간의 정설

 

17세기, 아이작 뉴턴은 빛을 입자 라고 주장했습니다. 빛은 아주 작은 알갱이들의 흐름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19세기에 토머스 영의 이중 슬릿 실험이 빛의 간섭 현상 을 완벽하게 증명하면서, "빛은 파동이다"라는 결론이 물리학계의 절대 정설이 되었습니다.

 

간섭 현상이란, 두 개의 파동이 만나면 서로 합쳐지거나 상쇄되는 것을 말합니다. 호수에 돌멩이 두 개를 동시에 던지면, 물결파가 만나는 곳에서 파도가 더 커지거나 사라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빛도 정확히 이런 패턴을 보여주었고, 이는 빛이 파동임을 의심할 여지 없이 증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의 전자기학은 이 파동설에 화룡점정을 찍었습니다. 맥스웰은 빛이 전기장과 자기장이 서로를 만들어내며 공간을 전파하는 전자기파 라는 것을 수학적으로 증명했습니다. 20세기 초까지 "빛 = 파동"은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진리로 군림하고 있었습니다.

 

 

설명할 수 없는 기현상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금속 표면에 빛을 쪼이면 전자가 튀어나오는 현상, 즉 광전효과 에서 기존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한 사실이 발견된 것입니다. 이전 포스트의 주인공이었던 필립 레나르트가 정밀하게 실험으로 확인한 이 현상의 특이점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 빛을 아무리 밝게 비춰도, 튀어나오는 전자의 에너지 는 변하지 않았다. 대신 전자의 개수 만 늘어났다.

• 전자의 에너지를 키우려면 빛의 색깔, 즉 진동수를 바꿔야 했다. 붉은 빛 대신 자외선처럼 진동수가 높은 빛을 쏘면, 전자가 더 세게 튕겨 나갔다.

• 특정 색깔 이하의 빛은 아무리 밝게 쏘아도 전자가 단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이것을 '한계 진동수'라고 한다.

 

파동 이론으로는 이것을 도저히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파동은 에너지가 넓게 퍼져서 전달됩니다. 마치 바다의 파도처럼, 큰 파도가 때리면 당연히 더 세게 밀어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아무리 거대한 파도라도 '색깔'이 틀리면 꿈쩍도 않고, 아주 작은 파도라도 '색깔'만 맞으면 강하게 미는 것이었습니다. 물리학자들은 당혹스러워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대답 — 빛은 알갱이다

 

아인슈타인의 해석은 간결하면서도 혁명적이었습니다.

 

"빛은 연속적인 파동이 아니라, 에너지 덩어리로 이루어져 있다. 이 알갱이 하나하나를 광양자라고 부르자."

 

각 광양자의 에너지는 빛의 진동수에 비례합니다. E = hν. 여기서 h는 막스 플랑크가 도입한 플랑크 상수이고, ν는 빛의 진동수입니다. 진동수가 높은 자외선 광양자는 에너지가 크고, 진동수가 낮은 붉은 빛 광양자는 에너지가 작습니다.

 

전자를 쫓아내려면 최소한의 에너지 문턱 을 넘어야 합니다. 그 문턱보다 에너지가 작은 광양자는 아무리 수백만 개를 쏟아부어도 전자를 뽑아낼 수 없습니다.

 

비유하자면, 무거운 바위를 들어올리는 상황을 떠올려 보십시오. 5살짜리 아이 100명이 함께 달려들어도 바위는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역도 선수 1명이면 거뜬히 들어 올립니다. 빛의 밝기, 즉 광양자의 수가 아니라, 빛의 진동수, 즉 광양자 하나의 에너지가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인슈타인의 광전효과 법칙 이며, 빛이 입자성을 가진다는 것을 최초로 이론적으로 제안한 혁명적 발견이었습니다. 훗날 이 '광양자'는 광자 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됩니다.

 

 


 

🧐 파트 3. 12년간 거부당한 '빛의 알갱이'

 

 

하지만 당시 물리학계의 반응은 냉담을 넘어 적대적이었습니다.

 

심지어 아인슈타인을 가장 높이 평가하고 아끼던 막스 플랑크조차 이 이론에는 반대했습니다. 플랑크는 자신이 '에너지가 불연속적이다', 즉 양자화된다는 개념을 도입하긴 했지만, 그것은 원자가 에너지를 방출하고 흡수하는 방식 에만 해당하는 것이지, 빛 자체 가 알갱이라는 뜻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대단한 천재이지만, 광양자 가설만큼은 과녁을 크게 벗어났다."

 

이 말은 단순한 비유가 아닙니다. 1913년, 플랑크를 포함한 독일 과학계의 거물 네 명이 아인슈타인을 프로이센 과학 아카데미 회원으로 추천하는 공식 추천서를 작성했습니다. 그 문서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가 추측에서 때때로 과녁을 벗어난다는 점을 — 예를 들어 광양자 가설에서처럼 — 너무 심하게 탓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정말로 새로운 아이디어를 도입하려면, 가장 정확한 자연과학 분야에서도 위험을 감수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읽어보면 칭찬 같지만, 사실상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이 사람 천재인데, 광양자 이론은 좀 삼천포로 빠진 거니까 너그럽게 봐주세요." 아인슈타인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들조차 "광양자 가설은 좀 과했다"고 완곡하게 깎아내린 것입니다.

 

 

밀리컨의 역설 — 틀렸다는 걸 증명하려다 맞다는 걸 증명하다

 

그러나 과학의 세계에서는 데이터가 왕입니다.

 

1915년, 미국의 물리학자 로버트 밀리컨 이 아인슈타인의 광전효과 공식을 실험적으로 완벽하게 검증해 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밀리컨 자신은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틀렸다 는 것을 증명하려고 무려 10년간 실험한 것이었습니다.

 

밀리컨은 다양한 금속에 다양한 파장의 빛을 쏘고, 튀어나오는 전자의 에너지를 정밀하게 측정했습니다. 만약 아인슈타인이 틀렸다면, 실험 데이터가 그의 공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하지만 그의 데이터는 배신을 택했습니다. 실험 결과는 아인슈타인의 공식 E = hν - φ 와 소름 돋을 정도로 정확하게 일치했기 때문입니다.

 

밀리컨은 스스로 이렇게 인정해야 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비합리적이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지만, 그의 공식이 실험 결과를 완벽하게 설명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과학의 아름다움이 바로 이것입니다. 아무리 싫어도, 아무리 인정하기 어려워도, 실험 데이터 앞에서는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것.

 

이 실험 검증 덕분에 광전효과는 '미친 가설'에서 '확고한 물리 법칙'으로 격상되었고, 10년 뒤 아인슈타인에게 노벨상의 문이 열리게 됩니다. 그리고 밀리컨 자신도 1923년 이 실험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상대방을 무너뜨리려다 본인도 함께 올라간, 과학사에서 보기 드문 윈-윈 사례였습니다.

 

 


 

🌍 파트 4. 노벨상을 받지 못한 16년의 고난

 

 

아인슈타인은 1910년부터 거의 매년 노벨 물리학상 후보로 추천되었습니다.

 

그런데 해가 바뀌고 또 바뀌어도 상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1910년, 1912년, 1913년, 1916년, 1917년, 1918년, 1919년, 1920년, 1921년. 무려 열 차례 가까이 추천을 받았지만, 매번 탈락했습니다. 그사이 물리학계에서는 누가 봐도 '아인슈타인이 받아야 하는데...'라는 공기가 점점 짙어지고 있었습니다.

 

1915년에는 일반 상대성이론 을 발표했습니다. 중력은 '힘'이 아니라 '시공간의 휘어짐'이라는, 인류의 우주관을 근본적으로 뒤바꾼 이론이었습니다.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이 설명하지 못하던 수성의 근일점 이동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했습니다.

 

1919년, 영국의 천문학자 아서 에딩턴 이 서아프리카에서 개기일식을 관측하여, 태양의 중력이 별빛을 휘게 한다는 일반 상대성이론의 예측을 확인했습니다. 이 소식은 전 세계 신문 1면을 장식했고, 아인슈타인은 하룻밤 사이에 전 세계적인 슈퍼스타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노벨 위원회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왜 상대성이론은 노벨상을 받지 못했나?

 

이유는 크게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 너무 혁명적이었습니다. 당시 노벨 위원회의 심사위원들 상당수가 상대성이론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수학적으로 너무 어렵고 추상적이었으며, 일상적 경험과 너무 동떨어져 있었습니다. 노벨 위원회는 여러 차례 외부 전문가에게 상대성이론의 평가를 의뢰했는데, 돌아온 보고서의 결론은 "아직 확실하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혹시라도 나중에 이론이 틀렸다고 밝혀질 경우, 노벨상의 권위가 실추될 것을 두려워한 것입니다.

 

둘째, 실험적 검증이 불충분하다는 논란이 있었습니다. 에딩턴의 관측 데이터가 충분히 정밀한가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는 과학자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개기일식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당시 망원경과 사진 기술의 한계 속에서 별빛의 미세한 굴절을 측정하는 것은 오차 범위가 컸습니다. "구름이 걷힌 사이로 겨우 찍은 사진 몇 장으로 뉴턴을 뒤집는다고?"라는 비판이었습니다.

 

셋째, 정치적 반대가 있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반독일 감정과 유럽에 만연하던 반유대주의는 유대계 독일 과학자인 아인슈타인에게 불리하게 작용했습니다. 앞서 이 시리즈에서 살펴보았던 필립 레나르트 를 비롯한 '독일 물리학' 진영은 상대성이론을 "유대인의 사기극"이라며 공개적으로 공격했습니다. 레나르트와 요하네스 슈타르크 같은 노벨상 수상자들까지 이 운동에 가담했기에, 그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1921년, 노벨 위원회는 물리학상 수상자를 선정하지 못한 채로 한 해를 넘겼습니다. 수상자 해당 없음. 아인슈타인을 줄 수도 없고, 아인슈타인을 건너뛸 수도 없는 진퇴양난이었습니다.

 

 


 

🏆 파트 5. 타협의 산물 — "상대성이론은 빼고"

 

 

1922년, 스웨덴의 이론 물리학자 카를 빌헬름 오센 이 노벨 위원회에 묘안을 제안했습니다.

 

"상대성이론 때문에 논란이 되는 거라면, 광전효과에 대한 공로로 상을 주면 되지 않겠습니까? 밀리컨의 실험으로 완벽하게 검증되었으니, 아무도 반박할 수 없을 겁니다."

 

이것은 사실상 정치적 타협 이었습니다. 상대성이론이라는 '뜨거운 감자'를 피해, 이미 실험적으로 확고하게 검증된 광전효과를 수상 이유로 내세우는 전략이었습니다.

 

노벨 위원회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보류되었던 1921년의 노벨 물리학상을 아인슈타인에게 수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수상 통보문에는 소름 끼치는 단서가 하나 붙어 있었습니다.

 

"귀하의 상대성이론과 중력 이론에 장차 부여될 가치를 고려하지 않고, 이론 물리학에 대한 공헌, 특히 광전효과 법칙의 발견을 인정하여..."

 

"상대성이론은 고려하지 않고." 이 한 문장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적 업적 중 하나를 공식적으로 무시하겠다 는 선언이었습니다. 우주의 시공간을 해석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나중에 보자"라며 미뤄버린, 과학사에서 극히 드문 사례로 남게 되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놀랍게도, 그는 별로 개의치 않았던 것 같습니다. 상대성이론의 가치는 이미 온 세계가 인정하고 있었고, 노벨 위원회의 판단이 그것을 바꿀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았으니까요.

 

게다가, 그에게는 노벨상보다 더 중요한 약속 이 있었습니다.

 

 


 

💔 파트 6. 노벨상 상금은 어디로 갔을까?

 

 

아인슈타인이 노벨상 수상 소식을 들은 곳은 스톡홀름이 아니었습니다.

 

1922년 가을, 그는 두 번째 아내 엘자와 함께 일본 강연 여행을 떠나는 배 위에 있었습니다. 6주간의 뱃길이었습니다. 상하이에 정박했을 때, 스웨덴으로부터 전보 한 통을 받았습니다.

 

"1921년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그는 12월 10일 스톡홀름에서 열린 시상식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일본에서의 강연 일정을 포기하지 않은 것입니다. 일부 역사가들은 당시 유럽에 만연하던 반유대주의의 위협도 불참의 이유 중 하나였다고 봅니다. 실제로 1922년 6월, 독일 외무장관 발터 라테나우가 반유대주의 극우파에 의해 암살당했고, 유대인 공인들에 대한 위협이 고조되던 시기였습니다.

 

그렇다면 노벨상 상금은 어디로 갔을까요?

 

 

이혼 조건으로 걸린 노벨상

 

1921년 노벨 물리학상 상금은 약 121,572 스웨덴 크로나 였습니다. 당시로서는 엄청난 거금이었죠.

 

이 돈은 아인슈타인의 주머니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상금 전액 은 그의 전 부인 밀레바 마리치 에게 갔습니다.

 

1919년, 아인슈타인은 밀레바와 이혼하면서 파격적인 약속을 했습니다.

 

"내가 노벨상을 받게 되면, 상금 전액을 당신에게 주겠소."

 

당시 아인슈타인은 사촌 엘자 아인슈타인과의 재혼을 원했고, 이혼을 위한 조건으로 이 약속을 제시한 것입니다. 아직 노벨상을 받지 못한 상태였지만, 본인이 언젠가 반드시 받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확신은 맞았습니다.

 

3년 후, 약속은 현실이 되었고, 아인슈타인은 약속을 지켰습니다.

 

밀레바는 이 상금으로 취리히에 아파트 세 채를 구입했고, 두 아들 한스 알베르트와 에두아르트를 키우며 여생을 보냈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상금이 이혼 위자료로 쓰인 것입니다.

 

과학의 역사에서 가장 인간적이고, 가장 씁쓸한 에피소드 중 하나가 아닐 수 없습니다.

 

 


 

📺 파트 7. TMI : 세상에서 가장 비싼 팁

 

 

아인슈타인은 일본 여행 중 도쿄의 임페리얼 호텔 에 머물렀습니다.

 

그때 객실로 편지를 배달해 준 일본인 배달부에게 팁을 주려 했으나, 마침 잔돈이 없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호텔 비품 메모지를 꺼내 펜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독일어로 이렇게 적었습니다.

 

"고요하고 검소한 삶은, 끊임없는 불안에 시달리며 성공을 추구하는 것보다 더 많은 행복을 가져다준다."

 

그는 이 메모를 배달부에게 건네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 메모를 잘 간직하시오. 언젠가 팁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 될지도 모르니까."

 

배달부는 그 메모를 소중히 간직했고, 그의 후손에게 전해졌습니다. 95년 후인 2017년, 예루살렘의 위너스 경매에 이 작은 메모지 한 장이 출품되었습니다. 사전 예상 낙찰가는 5,000달러에서 8,000달러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경매가 시작되자 가격은 치솟기 시작했고, 최종 낙찰가는 무려 180만 달러, 약 24억 원에 달했습니다.

 

동전 몇 닢 대신 건넨 메모가 세상에서 가장 비싼 팁이 된 것입니다. 아인슈타인 다운, 유머러스하면서도 예언적인 에피소드가 아닐 수 없습니다.

 

 


 

📚 파트 8. 마무리 : 완벽하지 않았기에 위대했던 사람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우주의 비밀을 풀어낸 천재였지만, 동시에 결점투성이의 인간이었습니다.

 

첫 번째 결혼은 파탄으로 끝났습니다. 아버지로서도 완벽하지 못했습니다. 둘째 아들 에두아르트는 정신질환을 앓게 되었지만, 아인슈타인은 미국으로 건너간 뒤 거의 만나지 못했습니다. 노벨상 시상식에도 참석하지 않았고, 그 상금은 이혼 서류에 적힌 약속을 지키는 데 쓰였습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평생 가장 아끼고 자랑스러워했던 상대성이론 은 끝내 노벨상의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대신 그의 이름 옆에 노벨상이라는 꼬리표를 달아준 것은, 상대적으로 덜 화려해 보이는 광전효과 라는 업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결국 진실의 편입니다.

 

오늘날 상대성이론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적 성취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GPS 위성의 시간 보정, 블랙홀의 관측, 중력파의 검출. 이 모든 현대 과학기술의 근간에 아인슈타인의 방정식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반면 그를 방해했던 정치적 논란과 반유대주의적 공격은 역사의 쓰레기통에 처박힌 지 오래입니다. 상대성이론을 "유대인의 사기극"이라 불렀던 레나르트와 슈타르크는 나치에 협력한 과학자로 역사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리고 "과녁을 벗어났다"는 평가를 들었던 광전효과 논문은, 훗날 양자역학 이라는 20세기 물리학의 또 다른 거대한 기둥을 세우는 초석이 되었습니다. 빛이 입자이자 파동이라는 '파동-입자 이중성'의 문을 연 것이 바로 이 논문이었으니까요. 아인슈타인이 노벨상을 '덜 받은' 것이 아니라, 실은 노벨상 두 개에 해당하는 공헌을 한 것입니다.

 

1921년 노벨 물리학상.

 

가장 위대한 과학자에게, 가장 논쟁적인 방식으로 주어진 이 상은, 결국 과학이 정치를 이기고, 진실이 편견을 넘어서는 데에는 때로 시간 이 걸린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상상력은 지식보다 중요하다. 지식은 한계가 있지만, 상상력은 세상의 모든 것을 끌어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주를 품은 상상력의 소유자. 그가 바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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