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87년 클리블랜드, 미국.
지하실에서 두 남자가 거대한 돌 위에 아슬아슬하게 올려진 장치를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그 돌은 수은 욕조 위에 떠 있었습니다. 진동을 없애기 위해서였습니다.
앨버트 마이컬슨과 에드워드 몰리. 그들이 찾으려 했던 것은 에테르였습니다. 당시 물리학자들 대부분이 믿었던 물질 — 우주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어, 빛이 그 속을 타고 파동처럼 전파된다는 가상의 매질.
마이컬슨의 정밀한 간섭계가 지구가 에테르 속을 달리는 속도를 측정할 것이었습니다. 지구의 공전 방향으로 나아가는 빛과 수직 방향으로 나아가는 빛의 속도 차이를 감지하는 것. 그 차이가 있으면 에테르가 존재한다는 증거였습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습니다.
아무런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에테르가 없다는 의미였습니다. 물리학의 근본 전제 하나가 무너진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실패가, 18년 뒤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을 낳았습니다.
📜 파트 1. 빛의 매질 — 에테르란 무엇인가
소리는 공기를 통해 전파됩니다. 물결파는 물을 통해 전파됩니다. 어떤 파동이든 전파될 매질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빛은? 빛은 진공에서도 전파됩니다. 태양빛이 우주 공간을 가로질러 지구에 닿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 빛이 파동이라면 — 맥스웰이 1865년 수학적으로 증명했듯이 — 그것이 전파되는 매질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에테르였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고, 무게도 없고, 어떤 물질과도 상호작용하지 않지만, 우주 공간 전체를 채우고 있는 투명한 매질.
19세기 물리학자들은 에테르의 존재를 거의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직접 증명할 방법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에테르가 우주 공간에 고정되어 있고 지구가 그 속을 달린다면, 지구의 운동 방향에 따라 빛의 속도가 달라져야 합니다. 지구가 달리는 방향으로 측정한 빛의 속도는, 지구의 공전 속도만큼 더 빠르거나 느려야 합니다.
이것을 측정하면 에테르의 존재를 간접적으로 증명할 수 있었습니다.
에테르라는 개념은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천상계를 이루는 다섯 번째 원소로 에테르를 상정했습니다. 흙, 물, 불, 공기 — 이 네 가지 원소가 지상계를 이루는 데 반해, 별과 행성들이 움직이는 천상계는 완전하고 변하지 않는 에테르로 가득 차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근대 과학이 성립된 뒤에도 에테르의 개념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데카르트는 우주 공간이 에테르로 채워져 있어 천체들이 에테르의 소용돌이 속에서 운동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뉴턴은 에테르의 존재에 회의적이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부정하지도 않았습니다.
맥스웰이 1865년 전자기파 이론을 완성했을 때, 에테르의 필요성은 더욱 강해지는 듯했습니다. 빛이 전자기파라면, 그 파동이 무엇을 진동시키는 것인가? 파동이란 매질의 진동이니까. 그래서 에테르는 단순한 철학적 사변이 아니라, 맥스웰의 위대한 이론을 지탱하는 물리적 실체로 요청되었습니다.
19세기 말, 에테르를 측정하려는 시도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실험도 에테르의 효과를 감지하지 못했습니다. 마이컬슨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 파트 2. 마이컬슨이라는 사람 — 정밀함의 화신
앨버트 에이브러햄 마이컬슨은 1852년 프로이센 스트렐노에서 태어났습니다. 지금의 폴란드 영토입니다. 유대계 독일인 가정이었던 그의 가족은 그가 두 살 때 미국으로 이민했습니다.
캘리포니아에서 자란 마이컬슨은 미국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해군 장교로 복무했습니다. 해군 생활 중 그는 빛의 속도를 측정하는 실험에 매료되었습니다. 자신의 상관들을 설득해 예산을 얻어내고, 1878년 회전 거울을 이용한 빛의 속도 측정 실험을 수행했습니다. 이것이 그의 첫 번째 중요한 과학적 업적이었습니다.
그는 물리학을 배우기 위해 유럽으로 건너가 헬름홀츠, 키르히호프 등 당대 최고의 물리학자들 밑에서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미국으로 돌아와 케이스 응용과학학교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지금의 케이스 웨스턴 리저브 대학교입니다.
마이컬슨의 특기는 한마디로 측정의 정밀함이었습니다. 그는 어떤 물리량이든 더 정밀하게 측정하는 방법을 고안하는 것에서 일종의 심미적 쾌감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기술적 완벽주의가 아니라, 자연에 대한 깊은 경외심에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마이컬슨이 남긴 말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과학의 가장 중요한 문제들은 결국 측정의 문제로 귀결된다."
그에게 측정은 단순한 수단이 아니었습니다. 측정 자체가 목적이자 예술이었습니다.
간섭계의 발명
마이컬슨이 에테르 탐색 실험을 위해 고안한 장치가 마이컬슨 간섭계입니다.
원리는 이렇습니다. 광원에서 나온 빛을 반반씩 두 방향으로 갈라놓습니다. 두 빛은 각각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다가 거울에 반사되어 돌아옵니다. 돌아온 두 빛이 다시 만나면 간섭 무늬가 생깁니다.
두 경로의 빛이 이동한 시간이 조금이라도 다르면, 간섭 무늬의 형태가 달라집니다. 극히 미세한 시간 차이도 간섭 무늬의 변화로 감지할 수 있습니다.
마이컬슨은 이 장치 전체를 수은 위에 떠 있는 돌판 위에 올려두었습니다. 전동기로 돌판을 360도 회전시키면서, 어느 방향에서 빛의 속도 차이가 감지되는지 확인하는 것이 실험의 핵심이었습니다.
간섭계를 만드는 것 자체도 대단한 도전이었습니다. 빛의 파장은 수백 나노미터, 즉 밀리미터의 수천 분의 일 수준입니다. 그보다 훨씬 작은 경로 차이도 간섭 무늬로 나타납니다. 거울의 평탄도, 빛의 경로의 안정성, 주변 진동 — 이 모든 것이 조금만 흔들려도 측정이 불가능해집니다.
마이컬슨은 장치 전체를 돌 위에 올리고, 그 돌을 수은 위에 띄워 진동을 차단했습니다. 실험실 지하의 가장 안정된 위치를 골랐습니다. 마차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면 측정을 멈췄습니다.
그 수준의 집착이 그를 실험물리학 역사상 가장 정밀한 측정자로 만들었습니다.
📜 파트 3. 위대한 실패 — 마이컬슨-몰리 실험
1887년 7월, 마이컬슨과 몰리는 5일에 걸쳐 실험을 수행했습니다.
에테르가 존재한다면, 지구의 공전 속도인 초속 30킬로미터에 해당하는 빛의 속도 차이가 간섭 무늬의 변화로 나타나야 했습니다. 마이컬슨의 간섭계는 그것의 40분의 1밖에 안 되는 변화도 감지할 수 있을 만큼 정밀했습니다.
결과는 어떠했을까요?
간섭 무늬는 어떤 방향에서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장치를 어느 방향으로 돌려도, 낮이든 밤이든, 계절이 바뀌어도 —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마이컬슨은 처음에는 자신의 실험에 오류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실험을 반복해도, 장치를 개선해도, 결과는 항상 같았습니다.
에테르의 효과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세 가지 중 하나를 의미했습니다. 첫째, 에테르가 없다. 둘째, 에테르가 있지만 지구가 에테르를 끌고 다닌다. 셋째, 다른 무언가가 있다.
물리학자들은 수년간 이 결과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워했습니다. 피츠제럴드와 로렌츠는 운동하는 물체가 수축한다는 가설을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최종적인 해답을 내놓은 것은 아인슈타인이었습니다.
실험의 결과를 직면하기
마이컬슨이 이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이해하려면, 당시 과학계의 분위기를 알아야 합니다. 에테르는 단순히 하나의 가설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맥스웰의 전자기 이론이 서 있는 기반이었고, 수십 년간 물리학이 쌓아온 세계관의 일부였습니다. 그 에테르가 없다고? 단순히 믿기 어려운 결과였습니다.
마이컬슨은 자신의 실험이 의미하는 바를 완전히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실험을 계속 반복하며 더 정밀하게 만들었지만, 그 결과가 에테르의 비존재를 증명한다고 선뜻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자신의 실험에서 오류를 찾으려 했습니다.
이것은 과학적 겸손함이기도 했고, 일생을 바친 에테르 탐색을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인간적인 집착이기도 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해석
1905년, 아인슈타인은 특수상대성이론을 발표했습니다. 핵심 전제는 두 가지였습니다. 물리 법칙은 모든 관성 좌표계에서 같다. 그리고 빛의 속도는 항상 일정하다 — 관측자의 운동 상태와 무관하게.
두 번째 전제가 마이컬슨-몰리 실험의 결과를 자연스럽게 설명합니다. 빛의 속도가 항상 같다면, 어느 방향에서 측정해도 속도 차이가 없어야 합니다. 그리고 에테르 같은 매질을 가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마이컬슨이 에테르를 찾으려다 실패한 그 결과가, 아인슈타인이 에테르라는 개념 자체를 폐기하는 토대가 되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아인슈타인이 이 특수상대성이론 논문을 쓸 당시, 마이컬슨-몰리 실험의 결과를 얼마나 의식했는지를 두고 역사가들의 의견이 엇갈린다는 점입니다. 아인슈타인 자신은 나중에 이 실험을 직접 알고 있었다고도, 또 몰랐다고도 암시하는 말을 여러 번 했습니다. 진실이 무엇이든, 마이컬슨의 결과가 당시 물리학 세계에 퍼져 있던 거대한 의문이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아인슈타인은 그 의문 속에서 자랐습니다.
📜 파트 4. 첫 번째 미국인 노벨상 수상자
1907년 노벨 물리학상은 앨버트 마이컬슨에게 수여되었습니다. 수상 이유는 광학 정밀 기기와 그 기기로 수행한 분광학 및 도량형 연구였습니다.
마이컬슨은 이로써 과학 분야 노벨상을 받은 최초의 미국인이 되었습니다. 1901년 노벨상이 시작된 지 불과 6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흥미롭게도 마이컬슨은 살아있는 동안 에테르 실험의 의미를 완전히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실험이 상대성이론의 직접적 증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어떤 형태로든 에테르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끝내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그의 실험을 시작하게 만든 동기였기 때문에, 그 실험이 반대 결론을 가리킨다는 것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노벨위원회가 마이컬슨에게 상을 줄 때, 에테르 실험이 아닌 광학 정밀 기기 전반의 업적을 내세운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노벨위원회 역시 그 실험의 의미를 어떻게 규정해야 할지 완전히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도량형의 혁명 — 빛으로 미터를 재다
마이컬슨의 또 다른 중요한 업적은 도량형 분야에 있습니다.
1889년, 마이컬슨은 빛의 파장을 이용해 길이를 측정하는 방법을 제안했습니다. 1미터라는 단위는 당시 파리에 보관된 백금-이리듐 합금 막대의 길이로 정의되어 있었습니다. 물리적 물체가 기준이니 온도, 습도, 세월에 따라 미세하게 변할 수 있었습니다.
마이컬슨은 자신의 간섭계를 이용해 카드뮴 적색 스펙트럼선의 파장 수로 1미터를 정의하는 방법을 제안했습니다. 빛의 파장은 어디서 측정해도 같습니다. 그 파장의 수를 세면 길이를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 아이디어는 나중에 현대 미터 정의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1미터는 빛이 진공에서 특정 시간 동안 이동하는 거리로 정의됩니다. 마이컬슨이 1889년에 제안한 아이디어의 직접적인 후손입니다.
빛의 속도 측정의 완성
마이컬슨은 이후에도 빛의 속도를 더 정밀하게 측정하는 작업에 몰두했습니다. 1927년, 그는 캘리포니아 산 안토니오와 산 그레고리오 봉우리 사이의 35킬로미터 거리에서 회전 거울을 이용한 빛의 속도 측정 실험을 수행했습니다. 이 결과는 당시까지 측정된 빛의 속도 중 가장 정밀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1931년, 광섬유 관을 이용한 더욱 정밀한 빛의 속도 측정 실험을 진행하던 중 세상을 떠났습니다. 78세였습니다. 죽는 날까지 빛의 속도를 재고 있었던 것입니다.
📜 파트 5. 간섭계가 바꾼 세계 — 마이컬슨 이후의 100년
마이컬슨 간섭계는 그가 만든 당대 최고의 발명품이었지만, 그 진정한 가치는 10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서야 완전히 드러났습니다.
레이저 시대의 간섭계
20세기 중반 레이저가 발명되면서, 마이컬슨 간섭계는 새로운 생명을 얻었습니다. 레이저의 단색성과 가간섭성은 간섭계의 감도를 극적으로 높였습니다. 마이컬슨이 상상도 못 했을 수준의 정밀 측정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레이저 간섭계는 오늘날 반도체 제조 공정에서 수 나노미터 수준의 위치 정밀도를 유지하는 데 쓰입니다. 스마트폰 안의 칩을 만드는 기계가 마이컬슨의 원리 위에서 작동하는 것입니다.
LIGO와 중력파
2015년 인류 최초로 중력파가 직접 검출되었습니다. 그 장치의 이름이 LIGO — 레이저 간섭계 중력파 관측소입니다.
LIGO의 기본 원리는 마이컬슨이 1887년에 고안한 간섭계와 동일합니다. 4킬로미터 길이의 두 팔을 가진 거대한 마이컬슨 간섭계입니다. 두 블랙홀이 충돌할 때 발생한 중력파가 지구에 도달해 4킬로미터 길이의 팔을 양성자 지름의 천분의 일만큼 수축시켰습니다. LIGO는 그것을 감지했습니다.
마이컬슨이 에테르를 검출하려 만든 장치의 후손이, 130년 뒤 우주의 시공간이 출렁이는 소리를 잡아냈습니다.
아이러니는 여기서 한 겹 더 깊어집니다. 마이컬슨의 간섭계는 에테르를 찾으려 했고, 에테르가 없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그 증명이 특수상대성이론을 낳았고, 특수상대성이론과 일반상대성이론이 합쳐져 중력파 이론이 나왔습니다. 그 중력파를 검출한 것이 마이컬슨 간섭계의 후손입니다. 마이컬슨은 에테르를 찾으려다 실패했지만, 그 실패가 중력파를 찾아내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원자시계와 GPS
현대의 GPS 시스템은 원자시계의 극도로 정밀한 시간 측정에 의존합니다. 그 원자시계의 핵심에는 빛과 원자의 상호작용을 이용한 분광학이 있습니다. 마이컬슨이 평생 공들인 분야입니다.
마이컬슨의 분광학 연구는 원자의 에너지 준위를 극도로 정밀하게 측정하는 기술의 기초를 닦았습니다. 오늘날 GPS 위성이 나노초 수준의 시간 정밀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원자시계 기술은, 마이컬슨이 간섭계와 분광계로 개척한 정밀 측정의 전통 위에 서 있습니다.
최초의 미국인 노벨 과학상 수상자
마이컬슨은 1907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습니다. 그는 미국에서 교육받고 미국에서 연구한 최초의 노벨 과학상 수상자입니다. 미국 과학이 세계 무대에 진출한 상징적 사건이었습니다.
미국이 과학 강국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초반부터였습니다. 그 전환점의 한 자리에 마이컬슨이 있었습니다. 이민자의 아들, 해군 장교 출신, 자연의 정밀함에 매료된 한 남자가 미국 과학의 첫 번째 노벨상 수상자가 된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미국이라는 나라 자체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 파트 6. 마이컬슨의 성격과 인간적 면모
과학자로서의 마이컬슨은 완벽주의자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으로서의 마이컬슨은 훨씬 복잡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개인적으로 매우 내성적이고 고집스러운 성격이었다고 전해집니다. 동료들과 의견 충돌도 잦았습니다. 에드워드 몰리와는 에테르 실험 이후 관계가 소원해졌습니다. 몰리는 이후 독립적으로 에테르 실험을 계속 반복했지만, 마이컬슨은 거의 협력하지 않았습니다.
마이컬슨은 또한 자신의 실험 결과의 의미를 받아들이는 데 유독 보수적이었습니다. 상대성이론이 세상을 뒤흔들고 난 뒤에도, 그는 에테르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 고집이 어떤 면에서는 그를 실험자로서 위대하게 만들었지만, 이론적 혁명의 의미를 선구적으로 읽어내는 데는 방해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실험이 남긴 유산은 그 어떤 이론적 예언보다 견고했습니다. 실험 데이터는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마이컬슨이 기록한 간섭 무늬의 부재는, 그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물리학의 역사를 돌려놓았습니다.
📜 파트 7. 마무리 — 실패가 역사를 바꾼 이야기
마이컬슨은 에테르를 찾으려 했습니다. 그리고 찾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 실패는 역사상 가장 생산적인 실패 중 하나였습니다. 그 실패 위에서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이 탄생했고, 20세기 물리학이 그 위에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그 간섭계의 원리는 오늘날 중력파를 검출하는 데 쓰이고 있습니다.
마이컬슨은 자신이 찾으려 했던 것을 끝내 찾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찾으려 했던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물리학의 전혀 새로운 장을 열었습니다.
에테르를 찾으러 들어간 실험실에서, 에테르의 부재를 발견하고 나온 것. 그것이 물리학 역사상 가장 극적인 반전입니다.
"내가 가장 후회하는 것은 스펙트럼 측정을 위한 더 좋은 방법을 찾지 못한 것이다."
마이컬슨이 말년에 남긴 말입니다. 그는 에테르 실험에 대해서가 아니라, 측정의 정밀도에 대해 후회했습니다. 끝까지 측정자였습니다.
과학에서 실패는 없다는 것을, 그의 이야기가 보여줍니다. 찾으려 했던 것을 찾지 못하는 것도, 자연이 보내는 메시지입니다. 그 메시지를 읽는 눈이 있는 사람에게는.
마이컬슨이 1887년 수은 욕조 위 돌판에서 돌린 그 간섭계는, 지금 4킬로미터짜리 팔로 자라나 우주가 숨기고 있던 중력파를 잡아냈습니다. 그 장치를 만든 사람은 에테르가 있다고 믿으며 실험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정밀한 손이 만든 것은, 에테르 없이도, 우주를 엿듣는 귀가 되었습니다.
📜 파트 8. 마이컬슨 실험이 물리학사에서 가지는 위치
물리학의 역사에는 수많은 실험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마이컬슨-몰리 실험이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는, 그것이 단순히 무언가를 발견한 실험이 아니라 무언가가 없음을 증명한 실험이라는 점입니다.
과학에서 없음을 증명하는 것은 있음을 증명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있음은 하나의 사례로 증명됩니다. 없음은 모든 가능성을 배제해야 합니다.
마이컬슨의 실험은 에테르가 없다는 것을 직접 증명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지구의 공전 방향에 따른 빛의 속도 차이가 관측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결과를 설명하는 방법 중 가장 단순하고 우아한 것이 에테르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과학 철학에서는 이것을 절약의 원리 — 필요 이상의 가정을 하지 말라는 원칙 — 의 적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에테르를 지키기 위해서는 에테르가 지구와 함께 움직인다거나, 운동하는 물체가 수축한다거나 하는 복잡한 가정들을 추가해야 했습니다. 에테르를 버리고 빛의 속도가 일정하다고 가정하면 — 아인슈타인의 방법 — 이 모든 것이 단숨에 해결되었습니다.
마이컬슨 실험은 이 선택의 기로를 열어준 실험이었습니다.
재현성과 과학의 신뢰성
마이컬슨-몰리 실험은 이후 수십 번 반복되었습니다. 더 정밀한 장치로, 더 다양한 조건에서, 세계 여러 곳에서. 결과는 항상 같았습니다. 에테르의 효과 없음.
이 재현성이 과학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 실험은 잘 보여줍니다. 한 번의 실험이 아무리 훌륭해도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른 장소에서 다른 장치로 같은 결과를 얻을 때 비로소 그 결과는 과학적 사실로 자리 잡습니다.
마이컬슨의 실험이 물리학사에 깊이 각인된 것은 그 결과의 재현성 덕분이기도 했습니다. 누구도 다른 결과를 얻지 못했습니다. 에테르는 없었습니다.
현대 정밀 측정의 원류
마이컬슨이 추구했던 정밀 측정의 정신은 오늘날 더욱 극단적인 형태로 살아 있습니다.
LIGO가 감지한 중력파는 양성자 지름의 천 분의 일 수준의 공간 변화를 감지한 것입니다. 이것은 인류가 이루어낸 가장 정밀한 측정 중 하나입니다. 그 정밀 측정의 직접적인 선조가 마이컬슨의 간섭계입니다.
마이컬슨이 추구했던 것 — 자연을 더 정밀하게, 더 정확하게 측정하는 것 — 은 과학의 영원한 과제입니다. 그의 정신은 측정 기술이 발전할수록 더욱 빛납니다.
📜 파트 9. 에테르 논쟁 이후의 물리학 — 새로운 세계가 열리다
마이컬슨-몰리 실험이 에테르의 부재를 시사한 이후, 물리학 공동체는 혼란에 빠졌습니다. 에테르는 맥스웰의 전자기 이론을 지탱하던 기둥이었는데, 그것이 흔들렸으니까요.
물리학자들이 택한 반응은 크게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 실험에 오류가 있다고 가정하고 더 정밀한 반복 실험을 요구하는 것. 둘째, 에테르를 지키기 위한 새로운 가설을 추가하는 것. 셋째, 에테르를 포기하고 새로운 기반을 찾는 것.
피츠제럴드와 로렌츠는 두 번째 길을 택했습니다. 운동하는 물체는 운동 방향으로 수축한다는 가설을 제안했습니다. 이 수축이 정확히 에테르 효과를 감추기 때문에 마이컬슨의 간섭계가 아무것도 감지하지 못한다는 것. 수학적으로는 마이컬슨의 실험 결과를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에테르를 지키기 위해 새로운 신비를 도입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세 번째 길을 택했습니다. 에테르를 포기하고 빛의 속도가 모든 관성계에서 일정하다는 단 하나의 전제에서 출발한 것. 그 결과가 특수상대성이론이었고, 로렌츠의 수축은 그 이론의 자연스러운 결과로 도출되었습니다.
에테르 없이 빛의 파동이 가능한가
에테르가 없다면 빛은 무엇을 통해 전파되는가? 이 질문이 에테르를 포기하기 어렵게 만든 핵심이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답은 이것이었습니다. 빛은 아무것도 통해 전파될 필요가 없다. 전자기장 자체가 전파되는 것이다. 전자기장이 공간의 속성이며, 공간이 있는 곳에 전자기파가 전파될 수 있다.
이 개념을 받아들이려면 공간에 대한 생각 자체를 바꿔야 했습니다. 뉴턴의 절대 공간 — 텅 빈 무대처럼 고정된 공간 — 에서 아인슈타인의 시공간 — 물질과 에너지에 의해 구부러지고 일렁이는 역동적 실체 — 으로.
마이컬슨이 에테르를 찾으러 들어간 실험이 촉발한 질문들이, 결국 공간과 시간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재고로 이어진 것입니다.
빛의 속도 측정의 완성과 현대 단위계
마이컬슨이 평생 몰두했던 빛의 속도 측정은, 1983년 결정적인 방식으로 완성되었습니다.
그해 국제 도량형 총회는 미터를 새롭게 정의했습니다. 1미터는 빛이 진공 속에서 1/299,792,458초 동안 이동하는 거리. 즉, 빛의 속도를 299,792,458 m/s로 고정하고 그로부터 미터를 정의한 것입니다.
이것은 마이컬슨이 1889년 제안했던 아이디어의 완성이었습니다. 물리적 물체 대신 빛의 성질로 길이를 정의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한 기술 — 레이저 간섭계 — 은 마이컬슨 간섭계의 직접적인 후손이었습니다.
마이컬슨이 1878년 처음 빛의 속도를 측정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1983년 그 속도가 미터의 정의가 되기까지 — 105년의 여정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여정의 출발점에 마이컬슨이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