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시간은 거꾸로 흐르지 않는다
우리가 뜨거운 커피에 찬 우유를 부으면, 둘은 섞이면서 미지근해집니다. 하지만 미지근한 커피우유가 저절로 다시 뜨거운 커피와 찬 우유로 분리되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비가역 과정(Irreversible Process)' 입니다. 자연계의 모든 현상—열이 흐르고, 전기가 통하고, 물질이 확산되는 것—은 한쪽 방향으로만 일어납니다.
19세기 과학자들은 열역학 1법칙(에너지 보존)과 2법칙(엔트로피 증가)을 통해 "결국에는 평형 상태(멈춘 상태)에 도달한다"는 것은 알았습니다. 하지만 "평형에 도달하기 전, 막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그 도중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에 대해서는 아무도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너무 복잡하고 혼란스러워서 수식으로 정의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소개할 1968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는 이 혼란스러운 흐름 속에서 우주의 숨겨진 대칭성을 찾아낸 천재 중의 천재입니다.
노르웨이 출신의 미국 이론 화학자 라르스 온사게르(Lars Onsager).
그는 '상반 관계식(Reciprocal Relations)' 이라는 간결한 수식을 통해, 움직이는 모든 것들의 법칙을 규명했습니다. 혹자는 그의 발견을 열역학 1, 2, 3법칙에 이은 '열역학 제4법칙' 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강의는 엉망이었지만 연구는 신의 경지였던 괴짜 천재, 온사게르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 1931년의 발견 : 열과 전기는 통한다?
이야기의 시작은 1931년, 온사게르가 28살의 젊은 나이에 발표한 논문에서 비롯됩니다.
당시 과학자들은 서로 다른 물리적 현상들이 얽혀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금속 막대의 양쪽 온도를 다르게 하면(열의 흐름), 전기가 흐르지 않아도 전압 차이(전기의 흐름)가 생깁니다. 이를 '열전 효과(Thermoelectric effect)' 라고 합니다.
"열이 흐르면 전기도 영향을 받고, 물질도 이동한다. 이 복잡한 상호작용을 어떻게 계산하지?"
온사게르는 아주 깊은 통찰력을 발휘합니다. 그는 미시적인 입자들의 운동이 거시적으로는 대칭적인 법칙을 따를 것이라고 가정했습니다.
⚖️ 온사게르의 상반 관계식
그가 발견한 법칙은 놀랍도록 단순하고 아름다웠습니다.
"힘 A가 흐름 B를 만드는 정도는, 힘 B가 흐름 A를 만드는 정도와 똑같다."
- 온도 차이가 전기를 흐르게 하는 계수($L_{12}$)
- 전압 차이가 열을 흐르게 하는 계수($L_{21}$)
온사게르는 수학적으로 $L_{12} = L_{21}$ 임을 증명했습니다. 즉, 자연계에서 서로 다른 에너지가 교환될 때, 그 관계는 일방통행이 아니라 완벽한 '대칭(Symmetry)' 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이 '상반 관계식(Reciprocal Relations)' 덕분에 과학자들은 열, 전기, 물질 확산 등 복잡하게 얽힌 비가역 과정들을 하나의 통일된 방정식으로 풀 수 있게 되었습니다.
🧐 너무 앞서간 천재 : 37년의 기다림
하지만 1931년 온사게르가 이 논문을 발표했을 때, 반응은 "......" 이었습니다. 너무 시대를 앞서갔고, 내용이 너무 수학적이고 난해해서 당시의 화학자들은 이해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그가 이 논문을 박사 학위 논문으로 제출했을 때, 대학 심사위원들이 "이게 무슨 화학이냐, 수학이지"라며 퇴짜를 놓을 정도였습니다. (결국 그는 나중에 예일 대학에서 다른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습니다.)
그의 발견이 재조명된 것은 2차 대전이 끝나고 과학 기술이 고도로 발달하면서부터였습니다. 엔진의 효율을 높이거나, 반도체를 설계하거나, 생체막을 연구할 때 '평형 상태'가 아닌 '흐르는 상태' 의 해석이 필수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제야 먼지 쌓인 1931년의 논문을 꺼내 들고 경악했습니다. "세상에, 이미 30년 전에 온사게르가 다 풀어놨었잖아!"
⚡️ 얼음의 비밀과 2차원 모형
온사게르의 천재성은 열역학에만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물(Water)' 과 '얼음(Ice)' 의 구조에 대해서도 깊이 연구했습니다.
1944년, 그는 통계역학의 난제 중 하나였던 '2차원 이징 모형(Ising Model)' 의 해를 정확하게 풀어냈습니다. 자석이 온도에 따라 자성을 잃거나 얻는 상전이 현상을 수학적으로 완벽하게 계산해 낸 것입니다.
이 업적은 물리학계에서 "기적과 같은 계산"이라고 불리며, 노벨상을 한 번 더 받아도 될 만큼 위대한 성취로 평가받습니다.
또한 그는 얼음 속에서 수소 원자들이 어떻게 움직이며 전기를 통하게 하는지 설명하는 '온사게르의 얼음 규칙' 을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 노벨상 : "화학을 위한 노벨상인가, 노벨상을 위한 화학인가?"
1968년, 스웨덴 왕립과학원은 라르스 온사게르에게 노벨 화학상을 수여합니다. 그가 상반 관계식을 발표한 지 무려 37년 만이었습니다.
수상 이유는 "비가역 과정의 열역학적 기초가 되는 상반 관계식의 발견" 이었습니다.
노벨 위원회는 "그의 발견은 화학뿐만 아니라 물리학, 생물학, 공학 등 모든 분야에서 에너지가 흐르는 방식을 이해하는 기틀이 되었다"고 칭송했습니다.
많은 사람은 이 상이 너무 늦게 주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온사게르는 특유의 무심한 표정으로 상을 받았습니다.
📚 TMI : 강의실의 외계인
1. '슬픈' 온사게르?
온사게르는 예일 대학 교수로 재직했는데, 그의 강의는 학생들에게 악몽이었습니다. 그는 칠판을 향해 돌아선 채 혼자 웅얼거렸고, 기초 화학 시간에 양자역학과 텐서 미적분을 칠판 가득 적어놓곤 했습니다. 학생들은 그의 강의를 'Sad Onsager (슬픈 온사게르)' 라고 불렀습니다. (Said Onsager가 와전된 것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수강생이 다 도망가고 조교 한 명만 남아서 수업을 들은 적도 있다고 합니다.
2. 해고당한 천재
그는 젊은 시절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잠시 강의를 했는데, 강의를 너무 못해서 해고당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해고된 덕분에(?) 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었고, 그때 위대한 발견들을 해냈으니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3. 농부 온사게르
그는 연구실 밖에서는 농사짓는 것을 즐겼습니다. 자신의 농장에서 직접 채소를 기르고, 목공 일을 하며 복잡한 머릿속을 식혔다고 합니다.
🌏 맺음말 : 흐름을 지배하는 법칙
라르스 온사게르는 정지해 있는 사진(평형)이 아니라, 움직이는 동영상(비가역 과정)을 해석하는 법을 알려주었습니다.
생명은 멈춰있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에너지를 먹고, 열을 내고, 물질을 뱉어내는 '흐름' 그 자체입니다. 온사게르가 찾아낸 '상반 관계식' 은 이 복잡한 생명의 흐름 속에 숨어 있는 우주의 대칭성과 질서를 보여주는 지도였습니다.
그의 난해한 수식 덕분에 우리는 오늘날 더 효율적인 엔진을 만들고, 세포막의 신비를 풀며, 우주의 무질서 속에서 질서를 찾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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