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300_Novel/305_노벨화학상

[1985 노벨화학상] 허버트 하웁트만 & 제롬 칼 : 수학으로 분자의 지도를 그리다, '직접 결정법'의 발명

by 어셈블러 2025. 12. 8.
728x90
반응형

 

 

 

📐 "화학 문제를 수학으로 풀 수 있을까?"

 

20세기 중반, 화학자들에게 가장 강력한 도구는 'X선 결정학' 이었습니다. 1962년 왓슨과 크릭이 DNA 구조를 밝힌 것도, 1964년 호지킨이 비타민 B12를 본 것도 다 이 기술 덕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엑스선 결정학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위상 문제(Phase Problem)' 였습니다.

엑스선이 결정에 부딪혀 튀어나올 때, 필름에는 점의 '밝기(세기)' 만 찍힙니다. 하지만 원래의 분자 모양을 복원하려면 밝기뿐만 아니라 파동의 '위상(Phase, 타이밍)' 정보를 알아야 하는데, 이 정보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립니다.

마치 오케스트라 녹음 파일에서 소리의 크기는 들리는데, 각 악기가 언제 시작했는지 박자 정보를 잃어버린 것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분자 안에 무거운 금속(수은, 금)을 억지로 끼워 넣어 기준점을 잡는 등 엄청난 고생을 해야만 했습니다.

"금속을 넣을 수 없는 작은 분자들은 어떡하지? 그냥 포기해야 하나?"

이때, 실험실의 비커가 아닌 책상의 종이와 펜을 들고 이 난제에 도전한 두 명의 이단아가 등장합니다.

수학자 출신의 허버트 하웁트만(Herbert A. Hauptman). 물리화학자 제롬 칼(Jerome Karle).

이들은 "잃어버린 위상 정보는 사라진 게 아니다. 통계 속에 숨어 있다" 라고 주장하며, 순수 수학(확률론)을 이용해 분자의 구조를 계산해 내는 '직접 결정법(Direct Methods)' 을 발명했습니다.

화학자들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무시했던 그들의 수식이, 어떻게 오늘날 신약 개발의 필수 코스가 되었는지 그 극적인 반전의 드라마를 소개합니다.

 

📜 운명적인 만남 : 뉴욕의 시티 칼리지

 

허버트 하웁트만과 제롬 칼은 1937년 뉴욕 시티 칼리지(CCNY)의 동기생으로 처음 만났습니다. 하웁트만은 수학에 미쳐 있었고, 칼은 화학과 물리학을 좋아했습니다. 두 사람은 졸업 후 각자 다른 길을 갔다가, 1947년 워싱턴의 해군 연구소(NRL)에서 다시 뭉쳤습니다.

당시 제롬 칼은 엑스선 데이터를 보며 고민에 빠져 있었습니다. "점들의 밝기(강도)만 가지고, 잃어버린 위상을 찾을 수는 없을까?"

그는 수학 천재인 옛 친구 하웁트만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이봐, 이 수많은 점들 사이에 어떤 수학적 관계가 있지 않을까?"

두 사람은 매일 밤 머리를 맞대고 수천 개의 방정식을 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무기는 삼각함수와 확률 통계였습니다.

 

🧐 위상 문제의 해결 : "확률이 답이다"

 

그들이 발견한 원리는 놀라웠습니다. 엑스선 회절 패턴에 찍힌 수천 개의 점들은 서로 무관한 게 아니었습니다. 점들의 밝기 사이에는 '확률적인 관계' 가 존재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세 점의 밝기가 매우 밝다면, 그 점들의 위상을 더했을 때 0에 가까울 확률이 높다는 식의 통계적 규칙(삼중항 관계)을 찾아낸 것입니다.

"우리는 잃어버린 정보를 찾기 위해 굳이 금속을 박아 넣을 필요가 없다. 점들의 밝기 데이터만 있으면, 확률 계산을 통해 원래의 위상 값을 '직접(Directly)' 찾아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직접 결정법(Direct Methods)' 입니다. 복잡한 실험 조작 없이, 오직 수학 방정식만으로 분자의 3차원 지도를 그려내는 마법 같은 방법이었습니다.

 

⚡️ 15년의 무시, 그리고 컴퓨터의 등장

 

1953년, 그들은 <결정학의 해법>이라는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학계의 반응은 싸늘하다 못해 적대적이었습니다.

전통적인 결정학자들은 수학 공식으로 가득 찬 그들의 논문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건 화학이 아니라 수학 장난이야!" "우리가 수십 년간 밤새워 결정이랑 씨름하는 걸 모독하는군."

그들의 논문은 15년 넘게 무시당했고, 아무도 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1960년대 후반, 상황이 급변했습니다. 바로 '고성능 컴퓨터' 가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손으로 풀기엔 너무 복잡했던 그들의 방정식을 컴퓨터에 넣자, 컴퓨터는 순식간에 복잡한 호르몬, 항생제, 비타민의 구조를 3D로 척척 그려내기 시작했습니다.

어제까지 3년 걸리던 구조 분석이, 단 3일 만에 끝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제야 화학자들은 깨달았습니다. 하웁트만과 칼이 옳았다는 것을요.

 

🏆 노벨상 : 화학을 바꾼 수학자들

 

1985년, 스웨덴 왕립과학원은 허버트 하웁트만과 제롬 칼에게 노벨 화학상을 수여합니다. 수상 이유는 "결정 구조를 결정하기 위한 직접적인 방법의 개발" 이었습니다.

이들의 수상은 '수학이 화학의 가장 강력한 도구' 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한 사건이었습니다.

오늘날 제약 회사에서 신약을 개발할 때, 컴퓨터 화면에 약물 분자를 띄워놓고 이리저리 돌려보며 설계하는 모든 과정이 바로 이들이 만든 '직접 결정법' 프로그램 덕분에 가능한 일입니다.

 

📚 TMI : 친구이자 라이벌

 

1. 수학자가 받은 화학상

허버트 하웁트만은 평생 자신이 화학자가 아니라 수학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노벨 화학상을 받은 최초의 수학자 중 한 명입니다. 그는 "수학적 아름다움이 자연의 진리와 연결될 때 가장 큰 기쁨을 느낀다"고 말했습니다.

2. 제롬 칼의 다양한 관심사

제롬 칼은 피아노 연주가 수준급이었고, 그림과 문학에도 조예가 깊었습니다. 그는 과학뿐만 아니라 인문학적 소양도 풍부한 르네상스형 인간이었습니다.

3. 해군 연구소의 영광

두 사람이 일했던 미국 해군 연구소(NRL)는 이들의 업적을 기려 연구소 내에 흉상을 세웠습니다. 군사 연구소에서 기초 과학의 위대한 발견이 나왔다는 것은, 기초 연구 지원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입니다.

 

🌏 맺음말 : 보이지 않는 질서를 찾아서

 

하웁트만과 칼은 실험실에서 시약을 섞는 대신, 수식이라는 안경을 쓰고 자연을 바라보았습니다.

혼란스럽게 흩뿌려진 엑스선 점들 속에서 통계적 질서를 찾아낸 그들의 통찰력은, 우리에게 "문제의 해답은 때로는 전혀 다른 분야(수학)에 숨어 있을 수 있다" 는 교훈을 줍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수만 가지 신약과 신소재의 설계도는, 40년 전 두 친구가 종이 위에서 풀어낸 방정식 위에서 그려지고 있습니다.

728x90
반응형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