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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_Novel/305_노벨화학상

[1986 노벨화학상] 더들리 허슈박, 리위안저, 존 폴라니 : 화학 반응의 춤사위를 보다, '반응 동역학'의 탄생

by 어셈블러 2025. 1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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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자들은 어떻게 만나서 사랑에 빠질까?

 

화학 반응식은 보통 이렇게 씁니다. A + B → C

이 식은 '시작(A, B)'과 '끝(C)'만 보여줍니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그 '중간 과정' 이 미치도록 궁금했습니다.

"A분자와 B분자가 만날 때, 정면충돌할까 아니면 스치듯 만날까?" "부딪히는 순간 에너지는 어떻게 변할까? 춤을 추듯 회전할까, 아니면 진동할까?"

분자들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반응은 1조 분의 1초 만에 끝나버리니 알 방법이 없었습니다. 화학자들에게 반응 과정은 캄캄한 '블랙박스' 였습니다.

오늘 소개할 1986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들은 이 블랙박스를 열어젖힌 사람들입니다.

진공 속에서 분자들을 대포처럼 쏘아 충돌시킨 미국의 더들리 허슈박(Dudley R. Herschbach) 과 대만 출신의 리위안저(Yuan T. Lee). 그리고 반응 직후 분자가 내뿜는 미세한 빛을 포착해 에너지를 분석한 캐나다의 존 폴라니(John C. Polanyi).

정적인 화학(Chemistry)을 움직이는 '동역학(Dynamics)' 으로 바꾼 그들의 역동적인 연구 현장으로 초대합니다.

 

📜 허슈박 & 리위안저 : 분자 대포를 쏘다, '교차 분자 빔'

 

이야기는 1960년대 하버드 대학에서 시작됩니다. 더들리 허슈박은 기체 상태의 분자 반응을 연구하고 싶었지만, 공기 중에는 다른 기체들이 너무 많아 방해가 되었습니다.

그는 아주 단순하고도 무식한 방법을 고안합니다. "공기가 없는 진공 상태를 만들고, 거기에 분자들을 총알처럼 쏘아서 서로 부딪히게 하자!"

이것이 바로 '교차 분자 빔(Crossed Molecular Beams)' 기술입니다.

[ 실험 원리 ]

  1. 완벽한 진공 챔버를 만든다.
  2. 왼쪽에서 A 분자 빔을 쏜다.
  3. 오른쪽에서 B 분자 빔을 쏜다.
  4. 가운데서 '꽝!' 하고 충돌한다.
  5. 충돌 후 튀어나가는 생성물(C)의 방향, 속도, 회전을 정밀하게 측정한다.

하지만 초기 장비는 너무 투박해서 알칼리 금속처럼 반응하기 쉬운 것들만 실험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 구세주가 등장합니다. 바로 손재주가 기가 막혔던 제자 리위안저였습니다.

리위안저는 기계를 뜯어고쳐 '슈퍼 기계(Supermachine)' 를 만들었습니다. 이 기계는 어떤 종류의 분자라도 빔으로 쏘아 보낼 수 있었고, 충돌 후 흩어지는 파편들을 각도별로 정밀하게 잡아냈습니다.

"보라! 분자들은 아무렇게나 부딪히는 게 아니다. 어떤 놈은 정면충돌 후 뒤로 튀어 나가고(반발), 어떤 놈은 서로 껴안고 빙글빙글 돌다가 헤어진다(복합체 형성)."

두 사람은 보이지 않는 분자들의 충돌 장면을 마치 당구 경기를 중계하듯이 상세하게 그려냈습니다.

 

🧐 존 폴라니 : 분자가 부르는 노래, '적외선 발광'

 

허슈박과 리위안저가 충돌의 '방향' 을 봤다면, 캐나다 토론토 대학의 존 폴라니는 충돌 후의 '에너지' 를 들여다봤습니다.

화학 반응이 일어나 새로운 분자가 탄생하는 순간, 그 분자는 에너지가 넘쳐서 흥분한 상태입니다. 갓 태어난 아기가 울음을 터뜨리듯, 갓 태어난 분자는 에너지를 빛(적외선)으로 내뿜으며 안정을 찾습니다.

폴라니는 이 아주 미세한 '적외선(Infrared Chemiluminescence)' 을 분석했습니다.

"이 빛을 분석하면, 분자가 얼마나 빠르게 진동하고(Vibration) 있는지, 얼마나 빠르게 회전하고(Rotation)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그의 연구 덕분에 우리는 화학 반응 에너지가 열로만 변하는 게 아니라, 분자의 춤(진동과 회전)으로 어떻게 분배되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 원리는 훗날 강력한 '화학 레이저' 를 개발하는 기초가 되었습니다.

 

⚡️ 화학 반응의 시나리오를 쓰다

 

이 세 사람의 연구가 합쳐지자, 화학자들은 비로소 화학 반응의 전체 시나리오를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 예시 : 수소(H)와 염소(Cl2)의 반응 ]

  1. 수소 원자가 염소 분자에 다가갑니다. (접근)
  2. 특정 각도로 부딪혀야만 반응이 일어납니다. (충돌)
  3. 잠시동안 '전이 상태(Transition State)' 라는 불안정한 덩어리가 됩니다. (결합)
  4. 새로운 염화수소(HCl) 분자가 만들어지며 격렬하게 진동하고 회전합니다. (탄생)
  5. 적외선을 내뿜으며 에너지를 식히고 안정을 찾습니다. (안정화)

이전까지는 "섞으니까 되더라"였던 것이, 이제는 "이런 각도로 부딪혀서 이렇게 춤을 추며 변하더라"라는 '동영상' 으로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현대 화학의 핵심 분야인 '반응 동역학(Reaction Dynamics)' 입니다.

 

🏆 노벨상 : 대만 최초의 노벨상

 

1986년, 스웨덴 왕립과학원은 더들리 허슈박, 리위안저, 존 폴라니에게 노벨 화학상을 수여합니다. 수상 이유는 "화학 반응의 동역학적 과정에 관한 연구 공로" 였습니다.

특히 리위안저의 수상은 아시아 과학계에 큰 경사였습니다. 그는 대만인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로서, 미국에서 연구했지만 국적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나중에 대만으로 돌아가 중앙연구원 원장을 맡으며 대만 과학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습니다.

 

📚 TMI : 다재다능한 천재들

 

1. 허슈박의 미식축구 사랑

더들리 허슈박은 고등학생 때까지 미식축구 선수였습니다. 대학에서도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지만, "공부는 평생 할 수 있지만 운동은 젊을 때만 할 수 있다"는 코치의 말에 반발심(?)이 생겨 학문의 길을 택했다고 합니다. 그는 "분자들의 충돌은 미식축구 선수들의 태클과 비슷하다"고 농담하곤 했습니다.

2. 폴라니 가문의 영광

존 폴라니는 헝가리 출신의 유대인으로, 아버지가 그 유명한 물리화학자이자 철학자인 마이클 폴라니입니다. 아버지 마이클 폴라니도 '전이 상태 이론'으로 노벨상에 근접했던 거장이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못다 이룬 꿈을 이룬 셈입니다.

3. 리위안저의 리더십

리위안저는 1994년 대만으로 영구 귀국하여 교육 개혁과 과학 진흥을 이끌었습니다. 그는 단순히 연구만 잘하는 게 아니라 행정과 리더십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 맺음말 : 멈춰 있는 것은 없다

 

1986년 노벨상 수상자들은 우리에게 "세상에 정지된 것은 없다" 는 진리를 보여주었습니다.

화학식은 종이 위에 가만히 멈춰 있지만, 실제 분자들의 세계는 초속 수백 미터로 날아다니고, 충돌하고, 뱅글뱅글 도는 역동적인 에너지의 장입니다.

그들이 만든 '교차 분자 빔'과 '적외선 탐지기' 덕분에, 우리는 이제 오존층이 파괴되는 반응부터 엔진 속의 연소 과정까지, 눈에 보이지 않는 찰나의 드라마를 이해하고 제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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