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화학자는 더 이상 폭발을 일으키지 않는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화학자의 이미지는 하얀 가운을 입고, 색색의 용액이 든 비커를 흔들며, 가끔은 '펑!' 하고 폭발을 일으키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21세기의 화학 실험실 풍경은 많이 다릅니다. 실험대 위에는 비커 대신 고성능 컴퓨터가 놓여 있고, 화학자는 마우스를 클릭하며 모니터 속의 분자들을 조립하고 반응시킵니다.
"이 약물이 바이러스를 죽일 수 있을까?" 과거에는 이걸 알아내기 위해 수만 번의 합성과 동물 실험을 해야 했지만, 이제는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미리 결과를 예측합니다.
오늘 소개할 2013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들은 화학을 현실 세계에서 사이버 세계로 옮겨 놓은 세 명의 선구자입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이론가 마틴 카플러스(Martin Karplus). 남아공 출신의 계산 생물학자 마이클 레빗(Michael Levitt). 이스라엘 출신의 화학자 아리 워셜(Arieh Warshel).
이들은 서로 어울릴 수 없을 것 같았던 물리학의 두 거대한 기둥, '고전 역학' 과 '양자 역학' 을 하나의 프로그램 안에서 화해시키고 결합하여, 거대하고 복잡한 생명 분자의 비밀을 풀어냈습니다.
📜 뉴턴과 슈뢰딩거의 딜레마
1970년대 초반까지, 컴퓨터로 분자를 계산하는 화학자들에게는 양자택일의 딜레마가 있었습니다.
- 뉴턴의 고전 물리학 (공과 스프링):
- 원자를 공으로, 결합을 스프링으로 생각합니다.
- 장점: 계산이 쉽고 빨라서 단백질 같은 거대 분자도 다룰 수 있습니다.
- 단점: 전자의 움직임을 무시하기 때문에, 화학 반응(결합이 끊어지고 생기는 것)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죽어있는 구조만 볼 수 있죠.
- 슈뢰딩거의 양자 물리학 (전자 구름):
- 전자의 파동 함수를 계산합니다.
- 장점: 화학 반응을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습니다.
- 단점: 계산량이 너무 많아서, 작은 분자 하나만 계산해도 컴퓨터가 뻗어버립니다. 효소나 단백질은 엄두도 못 냅니다.
"거대 분자(단백질)가 화학 반응(효소 작용)을 하는 걸 보고 싶어. 그런데 고전 역학은 반응을 못 보고, 양자 역학은 너무 느려. 어떡하지?"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세 명의 천재가 머리를 맞댔습니다.
🧐 두 세계의 악수 : "중요한 곳만 집중하라"
하버드 대학의 마틴 카플러스 연구실에 아리 워셜이 합류하면서 혁신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은 기막힌 타협안을 내놓았습니다.
"전체를 다 양자 역학으로 풀지 말자. 반응이 일어나는 '핵심 부위'만 양자 역학으로 계산하고, 나머지는 그냥 '고전 역학'으로 대충 처리하면 되잖아?"
이것은 마치 영화 촬영과 비슷합니다. 주인공의 표정은 초고화질(양자 역학) 로 찍고, 배경에 있는 엑스트라 군중은 저화질(고전 역학) 로 흐릿하게 처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용량은 줄이면서도 중요한 장면은 생생하게 담을 수 있습니다.
- 레티날 (주인공): 눈의 망막에서 빛을 감지하는 작은 분자. 이 부분은 전자가 튀어 오르므로 '양자 역학' 으로 계산합니다.
- 옵신 (배경): 레티날을 감싸고 있는 거대한 단백질 껍질. 이 부분은 반응하지 않고 구조만 유지하므로 '고전 역학' 으로 계산합니다.
1972년, 카플러스와 워셜은 이 하이브리드 모델을 이용해 레티날의 시각 반응을 컴퓨터로 완벽하게 재현해 냈습니다. 두 세계의 벽이 무너진 순간이었습니다.
⚡️ 보편적 프로그램의 완성 : 효소와 물
이후 마이클 레빗과 아리 워셜은 이스라엘의 와이즈만 연구소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그들은 이 방법을 더 발전시켜 '효소 반응' 에 적용했습니다.
효소는 거대한 단백질(고전 역학) 속에 작은 활성 부위(양자 역학)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주변은 수많은 물 분자(용매) 가 둘러싸고 있습니다.
레빗과 워셜은 물 분자들까지 계산에 포함시켰습니다. 물론, 멀리 있는 물 분자들은 그냥 덩어리로 취급하는 요령을 피웠죠.
이들이 완성한 '다중 스케일 모델(Multiscale Modeling)' 덕분에, 우리는 이제 효소가 어떻게 기질을 자르는지, 약물이 어떻게 바이러스에 결합하는지를 실험하지 않고도 모니터 위에서 동영상처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컴퓨터는 화학자의 또 다른 실험 도구가 되었다."
🏆 노벨상 : 사이버 화학의 승리
2013년, 스웨덴 왕립과학원은 마틴 카플러스, 마이클 레빗, 아리 워셜에게 노벨 화학상을 수여합니다. 수상 이유는 "복잡한 화학 시스템을 위한 다중 스케일 모델의 개발" 이었습니다.
이들의 업적은 오늘날 모든 화학, 생물학 연구의 필수품이 되었습니다.
- 신약 개발: 코로나19 치료제나 백신을 개발할 때, 스파이크 단백질 구조를 시뮬레이션하여 가장 잘 붙는 후보 물질을 찾아냅니다.
- 인공 효소: 플라스틱을 분해하는 효소나, 태양광을 전기로 바꾸는 인공 광합성 분자를 설계합니다.
- 기초 연구: 단백질이 어떻게 접히는지, 이온이 어떻게 이동하는지 눈에 보이지 않는 과정을 시각화합니다.
📚 TMI : 세계를 떠도는 과학자들
1. 국적이 3개인 사람들
세 수상자는 모두 세계를 떠돌며 연구한 '코즈모폴리턴' 입니다.
- 카플러스: 오스트리아 태생, 유대인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
- 레빗: 남아공 태생, 영국과 미국, 이스라엘 국적 보유.
- 워셜: 이스라엘 태생, 미국에서 활동. 과학에는 국경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2. 키부츠의 인연
레빗과 워셜은 20대 때 이스라엘의 집단 농장인 '키부츠' 에서 함께 지내며 연구했습니다. 당시 그들은 변변한 컴퓨터도 없이 펀치 카드(종이에 구멍을 뚫어 데이터를 입력하는 방식)를 들고 이웃 도시의 컴퓨터를 빌려 쓰며 밤을 새웠다고 합니다.
3. 카플러스의 사진
마틴 카플러스는 세계적인 요리사이자 유명한 사진작가이기도 합니다. 그는 젊은 시절 라이카 카메라를 들고 전 세계를 여행하며 사진을 찍었고, 전문 전시회를 열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의 예술적 감각이 복잡한 분자 세계를 시각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 맺음말 : 현실을 모방하는 가상 세계
2013년 노벨상 수상자들은 우리에게 "현실을 완벽하게 모방하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 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이 만든 프로그램 속에서 원자들은 뉴턴의 법칙에 따라 춤추고, 전자는 슈뢰딩거의 파동을 타고 이동합니다.
이제 화학자들은 위험한 시약을 만지기 전에, 먼저 컴퓨터를 켭니다. 모니터 속에서 펼쳐지는 가상 실험실. 그곳에서 탄생한 수많은 신약과 신소재들이 오늘날 우리의 삶을 안전하고 풍요롭게 만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