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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0_New Novel/311_[NEW] 노벨물리학상

[1901 노벨물리학상] 빌헬름 콘라트 뢴트겐 : 몸속을 꿰뚫어보는 신비한 빛을 발견하다 ✨

by 어셈블러 2026. 4.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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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11월 8일 금요일 저녁.

독일 뷔르츠부르크 대학교 물리학 연구소의 낡은 실험실에 불이 꺼져 있었습니다.

그 어둠 속에서 홀로 실험에 몰두하던 한 남자가 갑자기 멈췄습니다. 눈앞에 믿을 수 없는 것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가스 방전관 근처에 무심코 놓아둔 형광 스크린이 이유도 없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방전관은 두꺼운 검정 종이로 완전히 감싸여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남자는 떨리는 손으로 실험을 반복했습니다. 빛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날 밤 실험실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후 7주 동안 그는 밥도 제대로 먹지 않고, 집에도 거의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아내에게는 "지금 내가 발견한 것을 사람들이 믿어주지 않을까봐 두렵다"고 털어놓았습니다.

그의 이름은 빌헬름 콘라트 뢴트겐. 그가 발견한 것은 훗날 의학과 과학의 역사를 완전히 바꾸어 놓을 X선이었습니다. 그리고 6년 후인 1901년, 뢴트겐은 역사상 최초로 수여된 노벨 물리학상을 받게 됩니다.

이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본 남자, 그리고 그 발견이 인류에게 가져다 준 엄청난 선물의 이야기입니다.


 

📜 파트 1. 어둠 속의 인류 — X선 이전의 세상

 

뢴트겐의 발견이 왜 그토록 충격적이었는지 이해하려면, 먼저 그 발견이 이루어지기 전 세상이 어떤 곳이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19세기 말, 의사들은 그야말로 맹인이나 다름없었습니다.

환자가 팔을 들고 "여기가 너무 아파요"라고 하면, 의사는 살갗 위를 손으로 누르고 두드려 보고, 귀를 갖다 대어 듣고, 눈으로 색깔을 보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뼈가 부러졌는지, 폐에 물이 찼는지, 심장 크기가 커졌는지 — 이 모든 것을 절개하지 않고 확인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뼈 골절 진단을 위해 환자를 수술대에 올리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몸 안에 박힌 총알이나 이물질을 찾으려면 살을 열어야만 했고, 그 과정에서 감염으로 사망하는 환자가 수도 없었습니다. 19세기 병원은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거의 도살장에 가까웠습니다.

외과 수술의 성공률은 처참했습니다. 마취제인 에테르와 클로로포름이 1840~50년대에야 사용되기 시작했고, 리스터가 석탄산 소독 기술을 도입한 것도 겨우 1867년이었습니다. 손을 씻지 않고 수술하는 의사가 대부분이던 시대에, 몸속을 열어본다는 것은 그 자체로 엄청난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었습니다.

진단의 불확실성은 환자에게도, 의사에게도 고통이었습니다. 아이가 계단에서 떨어져 팔이 부어올랐을 때, 그것이 골절인지 타박상인지 알 길이 없었습니다. 폐결핵과 폐렴을 어떻게 구별할까요? 심장이 커졌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의사들은 경험과 촉감, 그리고 운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바로 이 시대에, 뷔르츠부르크의 한 실험실에서 불가능해 보였던 일이 일어났습니다.

살갗을 뚫고 뼈를 보여주는 빛이 발견된 것입니다.


 

⚡️ 파트 2. 음극선 연구의 시대 — 발견 직전의 과학 세계

 

뢴트겐의 발견은 완전히 우연이었을까요?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그의 발견은 19세기 후반 유럽 물리학계를 달구던 뜨거운 연구 흐름 위에 서 있었습니다.

1800년대 중반부터 물리학자들은 진공관 실험에 열중하고 있었습니다. 유리관 내부의 공기를 최대한 빼내고 양쪽에 전극을 붙인 뒤 고전압을 걸어주면, 음극에서 무언가가 방출되어 형광을 일으킨다는 것이 알려졌습니다. 이것을 음극선이라 불렀습니다.

음극선의 정체를 두고 유럽 과학계는 두 진영으로 나뉘었습니다.

독일 과학자들은 음극선이 전자기파의 일종, 즉 일종의 빛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영국 과학자들은 음극선이 전하를 띤 입자의 흐름이라고 보았습니다. 이 논쟁은 수십 년간 지속되었고, 결국 1897년 영국의 J.J. 톰슨이 음극선이 전자의 흐름임을 실험으로 증명하면서 결론이 났습니다.

이 음극선 연구 과정에서 과학자들은 하나의 불편한 사실을 자꾸 발견했습니다.

진공관 근처에 사진 필름을 놓아두면 필름이 감광된다는 것입니다. 이유를 몰랐습니다. 관을 종이로 싸두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많은 과학자들이 이 현상을 목격했지만, 그냥 "진공관 문제"라며 넘어갔습니다.

뢴트겐은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1895년 당시 50세였습니다. 이미 열역학과 결정학 분야에서 훌륭한 업적을 쌓은 중견 물리학자였지만, 세상에 크게 알려진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해 가을, 필리프 레나르트가 만든 개량형 음극선관을 이용한 실험에 착수했습니다.

그리고 그 금요일 저녁, 우연히 빛나는 형광 스크린을 목격했습니다.


 

🧐 파트 3. 뢴트겐은 누구인가 — 조용한 완벽주의자의 초상

 

빌헬름 콘라트 뢴트겐은 1845년 3월 27일, 독일 베르기셰스 란트 지방의 작은 마을 레네프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직물 상인이었고, 어머니는 네덜란드 출신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가족은 네덜란드 아펠도른으로 이사했고, 뢴트겐은 그곳에서 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런데 그의 학창 시절은 그리 순탄치 않았습니다.

어느 날, 학교 동급생이 선생님을 묘사한 우스운 그림을 그렸는데, 그것이 발각되었을 때 뢴트겐이 그린 것으로 의심받았습니다. 뢴트겐은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학교 측은 그를 퇴학시켰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그는 정규 대학 입학 자격을 잃었습니다.

청년 뢴트겐은 우여곡절 끝에 스위스 취리히 공과대학에 입학했습니다. 바로 수십 년 뒤 아인슈타인이 다니게 될 그 학교입니다. 거기서 그는 기계공학을 전공했지만, 물리학에 빠져들었습니다. 지도교수 아우구스트 쿤트의 영향으로 그는 실험물리학자의 길을 걷게 됩니다.

뢴트겐은 평생 과묵하고 고집스러운 완벽주의자였습니다. 그는 논문 발표를 극도로 꺼렸습니다. 스스로 완벽하게 검증했다고 확신하기 전까지는 절대 발표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논문 수는 경쟁자들에 비해 많지 않았지만, 하나하나가 대단히 정밀하고 신뢰할 수 있는 것으로 평가받았습니다.

또한 그는 특허를 경멸했습니다. 과학적 발견은 인류 공동의 재산이어야 한다고 믿었기에, X선 발견 이후에도 특허를 내지 않았습니다. 이 결정으로 그는 나중에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사생활에서 그는 조용한 삶을 즐겼습니다. 알프스 등산을 좋아했고, 아내 안나 베르타와의 사이는 매우 좋았습니다. 자녀는 없었지만, 1881년에 조카딸을 입양해 길렀습니다. 실험실 밖에서 그는 사교를 거의 하지 않았고, 인터뷰 요청을 거의 모두 거절했습니다.

그런 그가, 뜻하지 않게 역사상 가장 유명한 과학자 중 한 명이 되고 말았습니다.


 

💡 파트 4. 보이지 않는 빛 — X선의 탄생

 

1895년 11월 8일 저녁, 뢴트겐은 히토르프-크룩스관이라 불리는 음극선관을 두꺼운 검정 판지로 완전히 덮어씌웠습니다. 빛이 새어나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실험실도 암전 상태였습니다.

전원을 켜자 관 내부에서 음극선이 발생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약 1미터 떨어진 곳에 우연히 놓여 있던 형광 스크린 — 시안화백금바륨을 바른 종이 — 이 초록빛으로 빛나기 시작했습니다.

뢴트겐은 당혹스러웠습니다. 음극선은 불과 수 센티미터밖에 공기 중을 통과하지 못합니다. 1미터 거리에서 형광을 일으킬 수는 없었습니다. 게다가 관은 빛이 새어나오지 않도록 완전히 차폐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스크린을 이쪽저쪽으로 옮겨보았습니다. 방 어디에 놓아도 같은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관과 스크린 사이에 책을 끼워봤습니다. 빛났습니다. 두꺼운 나무판을 넣었습니다. 빛났습니다. 알루미늄 판을 넣었습니다. 빛났습니다.

그러다 그는 아연판을 끼워봤습니다. 그때 자신의 손 그림자가 스크린에 나타났습니다. 그것도 살 사이로 뼈의 윤곽이 훤히 드러나는 그림자로.

뢴트겐은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고 합니다.

그는 이것이 음극선이 아닌 전혀 다른 종류의 무언가임을 직감했습니다. 이름도, 정체도 모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수학에서 미지수를 뜻하는 기호를 따 이것을 X선 이라고 불렀습니다.

이후 7주가 그의 인생에서 가장 강렬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는 실험실에서 먹고 자다시피 하며 X선의 성질을 체계적으로 조사했습니다.

X선은 직진한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대부분의 물질을 투과한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밀도가 높을수록 투과율이 낮다는 것도 파악했습니다. 렌즈로 굴절시킬 수 없었고, 자기장으로 방향을 바꿀 수도 없었습니다. 이 점에서 음극선과 확연히 달랐습니다.

그는 사진 건판에 X선을 찍을 수 있다는 것도 알아냈습니다. 그리고 1895년 12월 22일, 그는 아내 안나 베르타에게 부탁해 그녀의 왼손을 15분 동안 X선에 노출시켜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것이 역사상 최초의 인체 X선 사진이었습니다.

사진 속에는 뼈의 윤곽이 선명했고, 아내가 끼고 있던 반지도 또렷이 보였습니다.

안나 베르타는 그 사진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 죽음을 본 것 같다."

 

 

뢴트겐은 이 7주간의 연구 결과를 정리해 1895년 12월 28일, 뷔르츠부르크 물리의학학회에 논문을 제출했습니다. 논문 제목은 간결했습니다.

 

 

"새로운 종류의 광선에 대하여"

 

 


 

🌊 파트 5. 세상을 뒤흔든 폭풍 — 발견 이후의 6주

 

1895년 12월 28일 논문이 제출된 지 불과 며칠 후, 뢴트겐은 유럽 각지의 지인들에게 논문 복사본과 함께 아내의 손 X선 사진을 보냈습니다.

세상이 뒤집어졌습니다.

1896년 1월 5일, 비엔나의 신문이 이 발견을 처음 보도했습니다. 다음날, 유럽 전역의 신문이 일제히 이 소식을 1면에 실었습니다. 일주일 사이에 전 세계 주요 신문이 X선 발견 소식을 보도했습니다. 19세기에 한 과학적 발견이 이토록 빠르게 세계적 뉴스가 된 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사람들이 그 X선 사진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살갗 안쪽의 가 보였습니다. 반지가 보였습니다. 사람들은 마치 마법을 본 것처럼 반응했습니다. 어떤 신문은 "유리 눈을 발명한 것보다 더 위대한 발견"이라고 극찬했습니다.

반응은 뜨겁고 다양했습니다.

의사들은 즉각 가능성을 알아보았습니다. 1896년 1월 13일, 영국 버밍엄의 의사 존 홀-에드워즈는 최초로 X선을 의료 목적으로 사용했습니다. 환자 팔에 박힌 바늘을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이 임상 의학에서 방사선 영상이 사용된 첫 사례였습니다.

같은 해 2월, 군인 손목에 박힌 총알을 X선 영상으로 찾아냈다는 뉴스가 나왔습니다. 뼈 골절 진단에 활용됐다는 소식도 이어졌습니다. 석 달 만에 X선은 의료 현장에 혁명을 일으키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부정적인 반응도 있었습니다. 사생활 침해 우려가 제기됐습니다. 영국에서는 "X선 차단 속옷"이 광고로 등장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X선이 불경스럽다며 반발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소동도 X선의 확산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뢴트겐 자신은 이 소동을 썩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인터뷰 요청을 거절했고, 강연 초청도 사양했습니다. 그는 과학자로서 발견의 본질에 집중하고 싶었지, 유명인이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발견 이후 단 몇 개월 만에 유럽과 미국에서 X선 관련 논문이 수백 편 발표됐습니다. 과학계 역사상 그토록 빠르게 후속 연구가 터진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X선 발견 이후 불과 3개월이 지난 1896년 3월, 앙리 베크렐은 X선 연구에서 영감을 얻어 방사능을 발견했습니다. 이것이 마리 퀴리의 연구로 이어졌고, 결국 핵물리학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분야가 탄생했습니다. 하나의 발견이 이토록 많은 것을 낳은 사례는 과학사에서도 드뭅니다.


 

🏆 파트 6. 최초의 노벨 물리학상 — 영광과 아이러니

 

알프레드 노벨은 1896년 사망하면서 자신의 막대한 재산으로 상을 설립하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5년간의 준비 끝에, 1901년 처음으로 노벨상이 수여됩니다.

그 첫 번째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는 뢴트겐이었습니다.

수상 이유는 간결하고 강력했습니다.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놀라운 광선의 발견이 인류에게 가져다 준 탁월한 공헌을 인정하여"

 

 

뢴트겐은 상금으로 5만 크로나 — 당시 교수 연봉의 약 3년치에 해당하는 금액 — 를 받았습니다. 그는 그 돈을 뷔르츠부르크 대학교에 전액 기부했습니다. 자신은 한 푼도 갖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뢴트겐답습니다.

그는 왕실 초청도 대부분 거절했고, 학회 강연도 꺼렸습니다. 노벨상 수상 이후에도 조용히 연구를 계속했습니다. 뮌헨 대학으로 자리를 옮긴 후에는 더욱 심층적인 X선 연구에 매달렸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커다란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뢴트겐은 X선으로 특허를 내지 않았습니다. 그는 과학적 발견은 인류의 공유재산이어야 한다고 믿었기에, 특허 등록이나 라이선싱을 철저히 거부했습니다. 덕분에 X선 기술은 전 세계에서 자유롭게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곧 그가 X선에서 아무런 경제적 이익을 얻지 못한다는 의미이기도 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은 극심한 인플레이션에 휩쓸렸습니다. 뢴트겐이 뮌헨 대학 교수로 평생 저축한 돈이 사실상 휴지 조각이 되어버렸습니다. 노벨상 상금도 이미 기부하고 없었습니다. 그는 말년에 심각한 경제적 어려움에 처했습니다.

1923년 2월 10일, 뢴트겐은 대장암으로 뮌헨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향년 77세였습니다. 그의 사망 당시 남은 재산은 거의 없었습니다. 인류의 역사를 바꾼 발견을 한 남자가, 그 발견으로 단 한 푼의 이익도 취하지 않고 쓸쓸하게 생을 마감한 것입니다.

과학사는 이 아이러니를 잊지 않습니다.


 

📺 파트 7. TMI — 뢴트겐에 대해 몰랐던 이야기들

 

뢴트겐이 발견을 거의 놓쳤다

 

X선 발견은 뢴트겐이 아닌 다른 사람이 먼저 할 뻔했습니다.

필라델피아의 아서 굿스피드는 1890년, 이미 음극선관 근처에 필름을 놓아두었다가 원인 불명의 감광 현상을 발견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필름에 문제가 있나 보다"라고 생각하고 넘어갔습니다.

뢴트겐 본인도, 같은 현상을 1895년 이전에 이미 목격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단지 그때는 원인을 규명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해 11월 8일 밤, 그는 "이번에는 절대 넘어가지 않겠다"고 결심했고, 그것이 역사를 바꿨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발견은, 현상을 그냥 넘기지 않는 집요한 관찰자에게 주어집니다.


 

뢴트겐의 아내, 최초의 X선 모델

 

역사상 최초의 의학적 X선 사진에 등장한 손의 주인, 안나 베르타 루트비히-뢴트겐.

그녀는 남편의 발견 소식을 듣고 기꺼이 실험 대상이 되어주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손 뼈가 선명하게 드러난 사진을 보고 뢴트겐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이제 당신이 한 일이 나에게는 죽음과 같이 느껴져요."

 

 

뢴트겐은 아내의 반응에 마음 아파했지만, 이 사진은 그대로 논문에 첨부되어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이 사진은 현재도 과학사의 대표 이미지 중 하나로 자주 인용됩니다.


 

원소 111번의 이름

 

2004년, 국제순수및응용화학연합 IUPAC은 원자번호 111번 원소의 공식 이름을 뢴트게늄 Rg 으로 확정했습니다. 발견자인 독일 중이온연구소가 뢴트겐의 이름을 제안했고, 과학계가 이를 받아들인 것입니다.

뢴트겐의 이름은 원소 주기율표에 영원히 새겨졌습니다.


 

단위 R, 렌트겐

 

방사선 노출량을 나타내는 단위인 렌트겐 R 도 그의 이름에서 따왔습니다. 1928년 국제 방사선 학회에서 제정한 이 단위는 현재도 방사선 분야에서 사용됩니다.


 

방사선 피폭을 몰랐던 시대

 

뢴트겐 생전에는 X선 피폭의 위험성이 알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방호 장비 없이 실험하던 수많은 초기 X선 연구자들이 방사선 피폭으로 손가락을 절단하거나, 암에 걸리거나, 사망했습니다. 뢴트겐이 걸린 대장암도 수십 년간의 X선 실험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것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인류의 건강을 지켜준 X선이 그 발견자에게 되돌아온 것이라면 과학사의 슬픈 아이러니입니다.


 

X선의 군사적 활용 — 전쟁터에서의 기적

 

X선 발견 이후 불과 1년 만에 전쟁터에서 X선이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1896년,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에서 이탈리아 군의관들이 처음으로 전상 치료에 X선을 사용했습니다. 총알과 파편의 위치를 파악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이후 스페인-미국 전쟁, 제1차 세계대전 등에서 X선은 부상 군인들의 생명을 구하는 핵심 도구가 되었습니다. 마리 퀴리는 제1차 세계대전 중 직접 이동식 X선 차량 — 뢴트겐차 — 을 운전하며 전방에서 부상병들을 치료했습니다.


 

📚 파트 8. 마무리 — 어둠 속에서 빛을 찾아낸 사람

 

1901년 12월 10일, 스톡홀름.

역사상 최초로 노벨상 수상식이 열렸습니다. 물리학상, 화학상, 생리의학상, 문학상, 평화상이 한꺼번에 수여된 그 자리에서, 물리학상을 받기 위해 연단에 선 사람이 빌헬름 콘라트 뢴트겐이었습니다.

그는 수상 소감을 간략하게 말했습니다. 화려한 수사도, 자신의 업적에 대한 자랑도 없었습니다. 그저 과학의 길을 걸어온 한 연구자로서 담담하게 감사를 전했습니다.

시상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뢴트겐 교수님의 발견은, 물리학 역사상 그 어느 발견보다도 빠르고 광범위하게 의학의 실제적 적용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뢴트겐은 그 자리에서도 특유의 과묵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로부터 12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CT 촬영을 받고, 공항 보안 검색대를 통과하고, 치과에서 파노라마 사진을 찍습니다. 전 세계 병원에서 매일 수억 건의 X선 검사가 이루어지고, 수십만 명의 환자가 X선 덕분에 정확한 진단을 받고 치료를 받습니다. 그 모든 것이 1895년 11월 8일 밤, 어둠 속에서 빛나는 형광 스크린을 그냥 지나치지 않은 한 과묵한 물리학자의 집요함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뢴트겐은 X선으로 돈을 벌지 않았습니다. 유명세를 즐기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그냥 알고 싶었을 뿐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 왜 빛나는지. 그리고 그 집요한 궁금증이 인류의 역사를 영원히 바꿔버렸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 그것이 과학의 본질이고, 뢴트겐의 삶이었습니다.

어둠 속에서 빛을 찾아낸 사람. 그 빛이 지금도 병원 복도에서, 공항 검색대에서, 연구소의 장비에서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뢴트겐의 이름을 우리가 잘 모르더라도, 그의 발견은 매일 수억 명의 삶 속에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 파트 9. X선이 바꾼 세상 — 현대 의학으로 이어진 유산

 

뢴트겐의 발견 이후 125년이 지난 지금, X선은 의료 기술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현대 의학에서 X선의 역할은 방사선 사진 한 장에 그치지 않습니다. 컴퓨터 단층 촬영 — CT — 은 X선을 다양한 각도에서 여러 번 촬영하고 컴퓨터로 조합하여 3차원 영상을 만듭니다. 1972년 하운스필드와 코맥이 개발해 둘 다 1979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습니다. 이 기술 없이는 뇌종양 발견도, 폐 결절 조기 발견도, 관상동맥 이상 진단도 불가능합니다.

유방암 조기 진단에서 X선 유방촬영술 — 맘모그래피 — 은 매년 수십만 명의 생명을 구합니다. 0.5센티미터 이하의 미세 석회화까지 포착해 유방암을 조기에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방사선 치료는 X선과 다른 형태의 방사선을 이용해 암세포를 직접 파괴합니다. 뢴트겐의 발견 이후 수십 년 만에 암 치료의 핵심 수단이 된 것입니다.

공항 보안 검색대에서 가방을 스캔하는 것도, 항만에서 컨테이너를 검사하는 것도, 박물관에서 그림 내부의 숨겨진 층을 분석하는 것도 모두 X선입니다. 루브르 박물관은 X선으로 다빈치 그림 아래 숨겨진 밑그림을 발견했습니다.

재료과학에서 X선 회절 — 뢴트겐의 발견 이후 개척된 기술 — 은 결정 구조 분석의 기본 도구입니다. DNA 이중나선 구조도 X선 회절로 발견되었습니다.

한 남자가 어둠 속 실험실에서 형광 스크린이 빛나는 것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뢴트겐이 1895년 11월 8일 밤에 한 것은 단지 실험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인류가 자신의 몸 속을 처음으로 들여다본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선이 끝없이 확장되어, 오늘날 우리는 원자 하나의 구조까지 X선으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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