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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0_New Novel/311_[NEW] 노벨물리학상

[1916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없음 : 세계가 불타는 동안, 노벨상은 침묵했다 — 제1차 세계대전과 과학의 멈춤

by 어셈블러 2026. 4.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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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12월 10일.

스톡홀름의 노벨상 시상식장은 조용했습니다.

이날 노벨 물리학상 시상은 없었습니다. 노벨위원회는 그해 물리학상 수상자를 선정하지 않았습니다. 상금은 해당 분야 기금으로 이월되었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였습니다.

유럽이 불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914년 7월에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은 1916년 최악의 국면에 접어들었습니다. 솜 강 전투에서 하루 만에 약 6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베르됭 전투는 10개월 동안 계속되어 양측 합쳐 70만 명 가까운 희생자를 냈습니다. 유럽 대륙의 젊은이들이 참호 속에서 죽어갔습니다.

물리학 연구는 멈추었습니다. 아니, 멈춘 것이 아니라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과학자들은 연구실 대신 군사 기술 개발에 동원되었습니다. 독가스 개발, 잠수함 탐지, 통신 암호, 항공기 설계 — 과학이 전쟁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 파트 1. 전쟁이 과학을 삼키다

 

1914년 8월 4일 독일이 벨기에를 침공하고 영국이 선전포고를 하면서 유럽 전역이 전쟁에 휩쓸렸습니다.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동맹국과 영국, 프랑스, 러시아 협상국이 맞붙었습니다. 그것은 그때까지 인류가 경험한 것과는 차원이 다른 전쟁이었습니다. 기관총, 독가스, 탱크, 항공기 — 산업혁명이 만들어낸 기술이 전쟁의 살상력을 전례 없이 끌어올렸습니다.

유럽의 주요 대학과 연구소는 사실상 전시 체제로 전환되었습니다.

독일에서는 약 90명의 저명한 과학자와 지식인이 93인 선언에 서명했습니다. 독일의 군사 행동을 지지하는 성명서였습니다. 그 명단에는 물리학자, 화학자, 의학자, 철학자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과학자들이 나라와 나라 사이에서 적으로 나뉘었습니다. 전전까지 서로 논문을 읽고 학회를 오가며 협력하던 독일과 영국의 물리학자들이 이제 전쟁의 반대편에 서게 된 것입니다.

과학 저널의 국제 교류도 단절되었습니다. 독일의 논문이 영국에 전달되지 않았고, 영국의 논문이 독일에 닿지 않았습니다. 지식의 국경이 생겼습니다.

 

독가스와 하버

 

독일의 화학자 프리츠 하버는 공기 중의 질소를 고정해 암모니아를 합성하는 방법을 개발해 농업 혁명을 일으킨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가스 사용을 주도했습니다.

1915년 4월 22일, 플랑드르 이프르 근교에서 독일군은 처음으로 대규모 염소 가스 공격을 시도했습니다. 하버가 직접 지휘했습니다. 이것이 화학무기의 전장 첫 번째 대규모 사용이었습니다.

하버의 아내 클라라 임머바르는 남편의 독가스 개발에 격렬히 반대했습니다. 그녀도 화학자였습니다. 하버가 이프르 전투를 지휘하고 돌아온 날 밤, 그녀는 남편의 군용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과학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대한 침묵의 항의였습니다.

하버는 1918년 노벨 화학상을 받았습니다. 암모니아 합성법으로. 그의 수상은 독가스 개발 때문에 국제적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전쟁의 기술 — 참호의 물리학

 

제1차 세계대전은 기술 전쟁이었습니다. 그 전쟁에서 물리학자들이 활용된 분야를 살펴보면, 과학이 전쟁에 얼마나 깊이 관여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음향 측거. 적의 포병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포탄이 발사될 때 나는 소리를 이용하는 기술이 개발되었습니다. 이 기술은 음파의 물리학에 기반합니다. 로런스 브래그가 전선에서 이 기술 개발에 기여했습니다.

무선통신. 전쟁 중 부대 간 통신을 위해 무선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했습니다. 하인리히 헤르츠가 발견한 전자기파 현상이 실전 통신에 응용되었습니다. 마르코니가 1909년 노벨상을 받은 무선통신 기술이 전쟁의 핵심 도구가 되었습니다.

잠수함 탐지. 독일 U보트가 연합국 선박에 큰 피해를 주면서, 음파를 이용한 잠수함 탐지 기술, 즉 소나의 개발이 시급해졌습니다. 윌리엄 브래그가 이 분야에 참여했습니다.

야간 조명과 광학. 전쟁 중 광학 기기 — 조준경, 잠망경, 측거기 — 의 수요가 폭발했습니다. 독일은 세계 최고의 광학 기술을 가지고 있었고, 이것이 전쟁 초기에 독일에 군사적 이점을 주었습니다.


 

📜 파트 2. 1916년 물리학 — 전쟁 속에서 진행된 연구

 

노벨상이 수여되지 않았다고 해서 1916년에 물리학적 진보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습니다. 전쟁이 한창이던 그 해, 조용한 장소에서 물리학사의 중요한 사건들이 일어났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 완성

 

1916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일반상대성이론을 완성했습니다.

1905년의 특수상대성이론이 등속 운동을 다루었다면, 일반상대성이론은 중력과 가속 운동까지 포괄하는 훨씬 광대한 이론이었습니다. 중력은 질량이 시공간을 휘게 만드는 것이라는, 뉴턴 이래 200년 만에 중력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이해였습니다.

아인슈타인은 베를린에서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전쟁 중이었지만, 그는 전쟁 관련 업무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평화주의자였고, 93인 선언에 서명하는 것도 거부했습니다.

일반상대성이론을 완성하기까지의 10년은 아인슈타인에게 극도로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그는 올바른 수학적 틀을 찾는 데 여러 차례 실수를 했습니다. 리만 기하학이라는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중력을 기술하는 도구임을 인식하고 이것을 완전히 익히는 데 수년이 걸렸습니다. 1915년 11월에서 1916년 3월 사이에 최종적인 방정식을 완성했습니다.

1916년 3월, 그는 일반상대성이론의 최종 논문을 프로이센 과학원에 제출했습니다. 이 논문은 물리학사에서 가장 위대한 업적 중 하나로 꼽힙니다.

일반상대성이론이 예측하는 것들은 당시로서는 검증이 거의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중력에 의한 빛의 굴절. 중력이 강한 곳에서 시간이 느리게 간다는 중력 시간 지연. 중력파의 존재.

일반상대성이론은 1919년 일식 때 태양 주변에서 별빛이 굴절되는 것이 관측되면서 실험적으로 검증되었고, 아인슈타인은 세계적 스타가 되었습니다.

중력파는 2016년 LIGO 검출기가 처음으로 직접 검출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이 일반상대성이론을 완성한 지 정확히 100년 후였습니다.

 

아인슈타인과 전쟁의 아이러니

 

1916년 아인슈타인이 일반상대성이론을 완성하고 있던 베를린은 전시 수도였습니다. 독일 제국의 군사 기계가 유럽을 전쟁으로 몰아가고 있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그 전쟁에 반대했습니다. 그는 국제주의자였고 평화주의자였습니다. 독일의 전쟁 행위를 지지하는 성명에 서명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대신 반전 선언에 서명했습니다. 이것은 당시 독일에서 매우 위험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연구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전쟁의 한가운데서, 국가가 무너지고 사람들이 죽어가는 그 시간에, 그는 우주의 본질에 대한 방정식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어쩌면 가장 인간적인 저항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파괴가 가득한 시대에 새로운 지식을 창조하는 것.

 

보어의 원자 모델과 그 발전

 

1913년 닐스 보어가 수소 원자 모델을 발표한 이후, 물리학자들은 이 모델을 다른 원소들에 적용하려 시도하고 있었습니다.

1916년 아르놀트 조머펠트는 보어 모델에 타원 궤도를 추가해 확장하고, 스펙트럼선의 미세 구조를 설명했습니다. 이것이 나중에 전자의 상대론적 효과와 양자수를 이해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조머펠트의 확장된 보어 모델은 가시광선 스펙트럼뿐 아니라 X선 스펙트럼의 미세 구조까지 설명했습니다. 이것은 바클라가 발견한 특성 X선과도 연결되는 연구였습니다.

전쟁 중이었지만 독일에서 이론물리학의 발전은 계속되었습니다. 조머펠트의 뮌헨 연구그룹은 이 시기에도 활발하게 활동했습니다. 나중에 양자역학의 탄생에 기여하는 많은 물리학자들이 이 그룹을 거쳤습니다.


 

📜 파트 3. 전선의 물리학자들 — 참호 속에 사라진 과학자들

 

1916년, 수많은 물리학자들이 전선에 있었습니다.

 

헨리 모즐리 — 27세에 스러진 천재

 

영국의 헨리 모즐리. 이 젊은 물리학자는 원소의 원자번호와 X선 스펙트럼 사이의 관계를 발견해 주기율표를 혁신했습니다.

모즐리의 발견은 1913년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는 각 원소에 X선을 쏘아 발생하는 특성 X선의 파장을 측정했습니다. 그 결과 특성 X선의 진동수가 원소의 원자번호와 체계적인 관계를 가진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것이 모즐리의 법칙입니다.

이 발견은 주기율표에서 원소의 순서가 원자량이 아니라 원자번호 — 핵 속의 양성자 수 — 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이것은 주기율표의 물리적 기초를 확립한 발견이었습니다. 또한 당시 알려진 원소들 사이에 빈 자리 — 아직 발견되지 않은 원소들 — 가 몇 개 있는지 정확히 예측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그가 노벨상을 받을 것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러더퍼드를 비롯한 당대 물리학자들은 모즐리가 가장 중요한 차세대 물리학자 중 하나라고 평가했습니다.

하지만 모즐리는 자원입대를 했습니다. 그 선택은 번복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발견이 실용적으로 응용되기 전에 1915년 갈리폴리에서 전사했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 겨우 27세였습니다. 러더퍼드는 훗날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즐리의 죽음이 단 한 명의 일반 군인의 죽음과 같은 취급을 받았다는 것은 비극입니다. 그는 10년 더 살았다면 인류의 역사를 바꿀 발견들을 했을 것입니다."

 

 

영국은 모즐리의 죽음 이후 노벨상급 잠재력을 가진 과학자들이 전쟁에 동원되는 것을 막으려는 정책을 마련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너무 늦었습니다.

 

칼 슈바르츠실트 — 참호에서 블랙홀을 계산하다

 

독일의 칼 슈바르츠실트. 천문학자이자 물리학자인 그는 1916년 러시아 전선에서 복무하던 중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 방정식의 첫 번째 정확한 풀이를 계산했습니다.

슈바르츠실트는 이 풀이를 담은 편지를 아인슈타인에게 보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이 편지를 받고 크게 놀랐습니다. 전선에서 복무 중인 군인이, 그것도 불과 몇 달 전에 발표된 자신의 이론 방정식을 완벽하게 푼 것이었습니다.

슈바르츠실트가 계산한 이 풀이는 슈바르츠실트 반지름을 포함합니다. 이것은 어떤 질량이 특정 반지름 이하로 압축되면 빛조차 탈출할 수 없는 영역 — 즉 블랙홀 — 이 된다는 것을 수학적으로 보여줍니다.

슈바르츠실트 반지름은 Rs = 2GM/c² 입니다. 여기서 G는 중력 상수, M은 질량, c는 빛의 속도입니다. 태양의 경우 이 반지름은 약 3km입니다. 즉, 태양 전체를 반지름 3km 이하로 압축하면 블랙홀이 됩니다.

당시 아인슈타인도, 슈바르츠실트도 이것이 현실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흥미로운 수학적 풀이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실재했습니다.

슈바르츠실트는 이 계산 결과를 담은 편지를 참호에서 아인슈타인에게 보냈고, 불과 몇 달 뒤인 1916년 5월 전선에서 피부 자가면역질환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43세였습니다.

참호에서 블랙홀 공식을 계산하다 전선에서 죽은 물리학자. 슈바르츠실트의 이야기는 전쟁이 과학에 가한 폭력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입니다.

 

카를 폰 오시엣츠키와 과학자의 침묵

 

전쟁 중 많은 지식인들이 조국의 군사 행동을 지지하는 성명에 서명했습니다. 그 중에는 나중에 자신의 결정을 깊이 후회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에른스트 마흐, 빌헬름 오스트발트, 빌헬름 뢴트겐 등 저명한 과학자들이 93인 선언에 서명했습니다. 이 선언은 독일의 전쟁 행위가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성명이었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진행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서명한 것을 후회했습니다. 전쟁이 그들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끔찍했기 때문입니다.


 

📜 파트 4. 노벨위원회의 선택 — 침묵의 의미

 

노벨위원회가 1916년을 포함한 일부 전쟁 기간 동안 시상을 하지 않은 것은,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 정신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노벨의 유언은 국적이나 정치적 입장에 관계없이 인류에 가장 크게 공헌한 사람에게 상을 주라는 것이었습니다. 독일 과학자와 영국 과학자가 동시에 수상 후보가 될 수 있는 상황에서, 전쟁이 그 선택을 정치적으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노벨위원회는 침묵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그 침묵은 무력함의 표시이기도 했습니다. 전쟁을 막을 수 없었던 과학계의, 지식인 사회의 무력함.

 

이월된 상금의 운명

 

전쟁 기간 동안 수여되지 않은 상금은 해당 분야의 특별 기금으로 이월되었습니다. 이 돈은 나중에 연구 장학금이나 특별 시상 등에 사용되었습니다.

노벨 물리학상이 수여되지 않은 해는 여럿입니다. 1916년 외에도 1931년, 1934년, 1940년, 1941년, 1942년이 시상 없음이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의 영향이었습니다.

전쟁이 물리학상의 역사에도 이렇게 흔적을 남겼습니다.

 

중립국 스웨덴의 역할

 

스웨덴은 두 차례 세계대전에서 공식적으로 중립을 유지했습니다. 이것이 스웨덴이 노벨상을 계속 관리하고 운영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전쟁 중에도 노벨위원회는 스웨덴의 중립성을 바탕으로 수상자 선정 과정을 유지했습니다. 비록 1916년처럼 시상 자체를 하지 않기로 결정한 경우도 있었지만, 위원회의 기능 자체는 유지되었습니다.

이것은 중립국이 국제 문화와 지식의 교류를 유지하는 데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 파트 5. 마무리 — 멈춘 상, 멈추지 않는 전쟁

 

1916년 노벨 물리학상은 수여되지 않았습니다. 상금은 이월되었습니다.

하지만 그해 전장에서는 수백만 명이 죽었습니다. 솜 강, 베르됭, 브루실로프 공세 — 역사상 가장 처참한 전투들이 그 해에 벌어졌습니다.

솜 강 전투. 1916년 7월 1일 하루에만 영국군 5만 7,470명이 사상했습니다. 단 하루, 단 한 나라의 사상자가 그 수였습니다. 전투는 11월까지 계속되었고 양측 합산 사상자는 100만 명이 넘었습니다.

베르됭 전투. 독일과 프랑스가 1916년 2월부터 12월까지 10개월 동안 맞붙었습니다. 양측 합산 사상자 약 70만 명. 그 소도시 주변의 땅은 포탄 구덩이와 독가스로 완전히 황폐화되었습니다. 지금도 그 지역 일부는 '붉은 지대'로 분류되어 사람이 살 수 없습니다.

노벨상이 없었던 그 해, 아인슈타인은 일반상대성이론을 완성하고 있었습니다. 슈바르츠실트는 참호 속에서 블랙홀 공식을 계산하다 죽었습니다. 모즐리는 이미 그 전해에 갈리폴리에서 전사했습니다.

과학은 멈추지 않습니다. 전쟁도 과학을 완전히 멈추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그 대가는 너무 컸습니다.

노벨상의 침묵은 과학이 그 해에 무언가 특별히 부족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세상이 그것을 기념할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전선의 참호에서 블랙홀의 수학을 계산한 슈바르츠실트, 주기율표를 혁신하고 전장에서 쓰러진 27세의 모즐리, 전쟁의 한가운데서 우주의 방정식을 완성한 아인슈타인. 1916년의 물리학은 이렇게 생겼습니다.

상은 없었지만, 과학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과학의 이야기들은 노벨상보다 훨씬 더 오래 기억될 것입니다.


 

📜 파트 6. 슈바르츠실트의 계산 — 참호에서 온 편지

 

칼 슈바르츠실트의 이야기를 더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1916년 물리학의 가장 극적인 장면이기 때문입니다.

슈바르츠실트는 1873년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부터 수학과 천문학에 탁월했습니다. 16세에 이미 천문학 논문을 발표했을 정도였습니다. 괴팅겐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1901년에는 포츠담 천문대 소장이 되었습니다.

슈바르츠실트는 이론과 관측을 모두 잘하는 전천후 천문학자였습니다. 별의 대기 구조를 연구하고, 사진 건판을 이용한 정밀 측광법을 개발하고, 복사 평형 이론을 천체물리학에 적용했습니다.

1914년 전쟁이 터지자 슈바르츠실트는 자원입대했습니다. 그는 41세였습니다. 무선통신 부대, 포병대 기상 관측 부대를 거쳐 러시아 전선에 배치되었습니다.

 

참호에서 쓴 세 편의 논문

 

1915년 11월, 아인슈타인이 일반상대성이론의 최종 방정식을 프로이센 과학원에서 발표했습니다. 슈바르츠실트는 러시아 전선에 있었지만, 이 논문의 사본을 어떻게든 입수했습니다.

그는 참호에서 아인슈타인의 방정식을 풀기 시작했습니다. 포탄 소리가 들리는 환경에서.

1916년 1월, 슈바르츠실트는 편지를 아인슈타인에게 보냈습니다. 거기에 일반상대성이론 방정식의 첫 번째 정확한 해석적 풀이가 담겨 있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이 편지를 받고 답장을 보냈습니다.

 

 

"귀하의 해석이 이토록 우아하게 나왔다는 것에 기뻐 마지않습니다. 귀하는 전선에서도 이 문제를 직접 다루었군요."

 

 

같은 달 슈바르츠실트는 두 번째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번에는 별의 내부 — 균일한 밀도의 유체구 — 에 대한 내부 풀이였습니다.

두 풀이 모두 아인슈타인이 프로이센 과학원에 발표했습니다. 전선에 있는 슈바르츠실트를 대신해서.

슈바르츠실트는 1916년 3월에 세 번째 논문을 완성했습니다. 이번에는 양자 조건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 역시 프로이센 과학원에 발표되었습니다.

그리고 1916년 5월, 슈바르츠실트는 43세의 나이로 전선에서 사망했습니다. 피부 자가면역질환인 천포창이 원인이었습니다. 전선의 가혹한 환경이 병을 악화시켰습니다.

 

슈바르츠실트 반지름의 의미

 

슈바르츠실트가 계산한 풀이에서 나온 슈바르츠실트 반지름은 현대 블랙홀 물리학의 핵심 개념입니다.

어떤 질량 M의 물체를 Rs = 2GM/c²의 반지름 이하로 압축하면, 빛조차 그 내부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됩니다. 이 경계를 사건 지평선이라고 합니다.

태양의 슈바르츠실트 반지름은 약 3km입니다. 지구는 약 9mm. 이 크기 이하로 압축되면 블랙홀이 됩니다.

물론 태양이나 지구는 스스로를 그 크기로 압축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충분히 무거운 별이 생애를 마칠 때 중력 붕괴로 이 조건이 충족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블랙홀의 형성 메커니즘입니다.

2019년, 이벤트 호라이즌 망원경은 처녀자리 은하 M87의 중심에 있는 블랙홀을 처음으로 직접 촬영했습니다. 그 블랙홀의 질량은 태양의 약 65억 배. 슈바르츠실트 반지름은 약 200억 km.

슈바르츠실트가 러시아 전선의 참호에서 계산한 그 공식이, 100년 후 인류가 처음으로 블랙홀 사진을 찍는 데 이론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전쟁이 앗아간 것들

 

전쟁은 슈바르츠실트를 빼앗았습니다. 모즐리를 빼앗았습니다. 얼마나 더 많은 과학자들이 전선에서 죽었는지는 기록에도 제대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노벨상을 받을 수도 있었던 사람들, 물리학의 역사를 더 바꾸었을 사람들이 참호 속에서 사라졌습니다.

1916년의 노벨상 침묵은 그 모든 상실 위에 있습니다. 과학의 축제가 열릴 수 없었습니다. 너무 많은 과학자들이 죽어갔기 때문에.

노벨상이 없던 그 해, 이름 없는 수백만 명이 전선에서 죽었습니다. 그 중에는 다음 세기의 물리학을 이끌었을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1916년이 우리에게 남긴 가장 무거운 이야기입니다.


 

📜 파트 7. 전쟁 이후 — 상처받은 물리학의 재건

 

제1차 세계대전이 1918년 11월에 끝났습니다. 유럽은 황폐화되었습니다. 과학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전쟁은 과학자들의 국제 공동체를 파괴했습니다. 전쟁 중 독일과 오스트리아 과학자들은 협상국의 학술 기관에서 배제되었습니다. 국제 학회가 열리지 않았고, 논문 교류가 단절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과학계의 분열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1919년부터 1930년대 초까지, 국제 과학 기구들은 독일과 오스트리아 과학자들을 배제했습니다. 이 배제 정책을 둘러싸고 과학계 내부에서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닐스 보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등 일부 과학자들은 이 배제 정책에 반대했습니다. 과학은 국적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는 원칙에서. 결국 1926년부터 독일 과학자들이 국제 과학 기구에 다시 합류하기 시작했습니다.

 

1916년이 현재에 묻는 것

 

1916년 노벨 물리학상 시상 없음. 이 사실은 단순한 역사적 기록이 아닙니다. 그것은 과학과 세계의 관계에 대한 질문입니다.

과학은 국제적입니다. 진리는 국경을 모릅니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특정 나라에서 태어나고, 특정 나라의 자원으로 연구하고, 특정 나라의 전쟁에 동원됩니다.

전쟁이 과학을 무기로 만들 때, 과학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조국을 위해 무기를 개발해야 하는가, 아니면 과학의 국제적 성격을 지켜야 하는가?

아인슈타인은 후자를 선택했습니다. 하버는 전자를 선택했습니다. 플랑크는 그 사이 어딘가에 있었습니다.

1916년의 침묵은 이 질문에 답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질문을 더욱 날카롭게 만듭니다.

과학이 멈추어야 할 때는 언제인가? 아니, 과학은 결코 멈추어서는 안 되는가? 1916년의 노벨상 침묵과 슈바르츠실트의 참호 계산이 이 질문에 서로 다른 답을 줍니다. 침묵은 전쟁 앞에서 과학도 멈출 수 있다고 말하고, 참호의 계산은 전쟁도 과학자의 정신을 멈출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 두 가지가 모두 1916년의 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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