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5년 아인슈타인이 논문을 발표했을 때, 원자는 아직 논쟁의 대상이었습니다.
원자가 실제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물질을 기술하는 수학적 도구에 불과한가? 에른스트 마흐를 비롯한 실증주의 철학자들은 원자를 관측할 수 없으니 실재가 아닐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원자를 가정하면 화학 반응을 편리하게 설명할 수 있지만, 그것이 원자가 실재한다는 증거는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원자론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 중 한 명이었던 루트비히 볼츠만은 이 논쟁에 지쳐 1906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는 원자가 실재한다는 것을 확신했지만, 당시 물리학계에서 이것이 인정받지 못하는 데 깊은 좌절을 느꼈다고 전해집니다.
아인슈타인의 1905년 논문은 꽃가루나 먼지 입자처럼 아주 작은 입자들이 액체 속에서 무작위로 움직이는 브라운 운동을 수학적으로 설명했습니다. 이 운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액체 분자들이 불규칙하게 충돌하기 때문에 생긴다는 것이었습니다.
프랑스 물리학자 장 페랭은 이 이론을 실험으로 검증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성공했습니다.
페랭의 실험은 원자의 실재를 의심하던 마지막 회의론자들도 설득했습니다. 볼츠만은 그것을 보기 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마흐는 페랭의 결과 앞에서 원자의 실재를 인정했습니다. 평생의 신념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았겠지만, 실험 앞에서 마흐도 고개를 숙였습니다.
📜 파트 1. 브라운 운동이란 무엇인가
1827년, 스코틀랜드 식물학자 로버트 브라운은 현미경으로 물에 띄운 꽃가루를 관찰하다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꽃가루 입자들이 멈추지 않고 계속 불규칙하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꽃가루가 살아 있어서라고 생각했습니다. 꽃가루 안에 생명 에너지가 있어 움직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죽은 식물의 꽃가루를 사용했습니다. 같은 움직임이 계속되었습니다. 무기물 입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무엇이 이 입자들을 움직이게 하는가? 브라운은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19세기 내내 이 브라운 운동의 원인은 설명되지 않았습니다. 다양한 가설이 제시되었습니다. 열에 의한 대류, 빛의 압력, 전기력 — 하지만 어느 것도 실험 데이터와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1905년 아인슈타인이 그 원인을 수학적으로 설명했습니다. 분자들이 끊임없이 불규칙하게 움직이면서 작은 입자에 충돌하기 때문이라는 것. 그리고 그 운동의 통계적 성질 —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입자가 얼마나 멀리 확산되는지 — 을 수학 공식으로 표현했습니다.
같은 시기에 마리안 스몰루초프스키도 독립적으로 비슷한 이론을 발표했습니다. 두 접근법은 수학적으로 거의 동일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공식의 핵심은 입자의 평균 이동 거리 제곱이 시간에 비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비례 상수 안에 아보가드로 수 — 1몰에 들어있는 분자의 수 — 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브라운 운동의 확산 거리를 측정하면 아보가드로 수를 계산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핵심이었습니다. 만약 분자가 실재한다면, 분자의 수를 세는 것이 가능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수가 다른 방법으로 측정한 값과 일치한다면, 분자는 실재하는 것입니다.
📜 파트 2. 페랭의 실험 — 원자를 세다
장 밥티스트 페랭은 1870년 프랑스 릴에서 태어났습니다. 파리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음극선이 전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보이는 실험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습니다. 1910년부터 파리 소르본 대학교 물리화학 교수를 역임했습니다.
페랭은 아인슈타인의 1905년 논문을 읽고 즉각 실험으로 검증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균일한 크기의 입자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에서 입자의 크기와 질량을 정확히 알아야 아보가드로 수를 계산할 수 있었습니다. 자연에서 발견되는 입자들은 크기가 불균일해서 측정이 어려웠습니다.
페랭은 수지를 이용해 미크론 크기의 균일한 구형 입자를 만드는 방법을 개발했습니다. 수지를 적절히 처리하면 거의 완전한 구형의 균일한 입자들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 입자들을 물에 분산시키고 현미경으로 관찰했습니다.
첫 번째 방법 — 침강 평형
페랭의 첫 번째 실험 방법은 침강 평형을 이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중력에 의해 입자들은 가라앉으려 합니다. 하지만 분자들의 열운동이 입자들을 위로 퍼뜨립니다. 이 두 효과가 균형을 이루면 높이에 따라 입자의 농도가 지수함수로 감소합니다.
이 감소 방식은 대기압이 높이에 따라 감소하는 것과 수학적으로 같습니다. 대기 중 기체 분자들도 중력에 의해 가라앉으려 하고 열운동으로 퍼지려 합니다.
페랭은 현미경으로 다른 높이에서 입자의 수를 세었습니다. 높이에 따른 농도 변화율을 측정했습니다. 그 변화율에서 아보가드로 수를 계산할 수 있었습니다.
이 측정은 매우 정밀한 작업이었습니다. 미크론 크기의 입자 하나하나를 현미경으로 세면서, 각 높이에서 수천 개의 입자를 세는 과정을 반복했습니다. 페랭은 이 지루하고 정밀한 작업을 꾸준히 수행했습니다.
두 번째 방법 — 브라운 운동 추적
두 번째 방법은 브라운 운동 자체를 직접 추적하는 것이었습니다.
개별 입자의 위치를 30초 간격으로 기록했습니다. 시간에 따라 위치가 어떻게 바뀌는지를 측정해 확산 계수를 구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공식으로 이 확산 계수에서 아보가드로 수를 계산했습니다.
이 측정도 지루하고 힘든 작업이었습니다. 현미경을 들여다보며 입자의 위치를 계속 기록하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자동 추적 장치가 없었으므로 눈과 손으로 해야 했습니다.
두 방법 모두 동일한 아보가드로 수를 주었습니다. 6.022 × 10²³ 근방의 값이었습니다. 그것도 다른 방법들 — 방사성 붕괴, X선 회절 등 — 로 측정한 값과 일치했습니다.
아보가드로 수의 의미
아보가드로 수가 완전히 다른 방법들로 측정했을 때 모두 같은 값이 나온다는 것 — 이것이 원자 가설이 단순한 편의적 가정이 아니라 자연의 실제 구조를 반영한다는 강력한 증거였습니다.
만약 원자가 없다면, 서로 전혀 다른 방법들이 같은 숫자를 줄 이유가 없습니다. 이 놀라운 일치는 원자가 실재한다는 것을 강하게 시사합니다. 물리학자들이 말하는 "증거의 수렴"입니다.
페랭은 자신의 측정 결과를 다른 방법들의 결과와 비교하는 표를 작성했습니다. 기체의 점성에서 구한 값, 방사성 붕괴율에서 구한 값, X선 회절에서 구한 값 — 모두 거의 같은 아보가드로 수를 주었습니다. 이 표가 원자 실재의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되었습니다.
📜 파트 3. 원자가 있다는 증거
페랭의 실험이 왜 중요한가?
그것은 물질의 불연속적 구조 — 즉 원자와 분자의 실재 — 를 직접적이고 독립적인 방법으로 증명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화학 반응에서 원자를 가정하면 편리하다는 것이 아니라, 물리적 측정에서 원자의 효과를 직접 관측한 것입니다.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꽃가루의 움직임. 그 움직임이 분자의 충돌 때문이라면, 분자의 크기와 수를 측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페랭은 그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분자의 크기와 수를 실제로 측정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분자가 실재한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입니다.
마흐의 전향
에른스트 마흐는 20세기 초 과학철학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하나였습니다. 그는 실증주의자로서, 직접 관측할 수 없는 것은 과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원자는 직접 볼 수 없으므로 실재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었습니다.
볼츠만과 마흐의 논쟁은 수십 년간 계속되었습니다. 볼츠만은 원자가 실재한다는 것을 믿었고, 통계역학을 발전시켜 원자의 운동으로 열역학 현상을 설명했습니다. 마흐는 이것이 원자가 실재한다는 증거가 아니라고 반박했습니다.
볼츠만은 1906년 세상을 떠났고, 페랭의 실험 결과를 보지 못했습니다.
마흐는 1916년까지 살았습니다. 페랭의 1908~1909년 실험 결과가 발표된 후, 마흐는 자신의 입장을 바꾸었습니다. 직접 관측이 아니라 우회적이지만 정밀한 측정을 통해 원자의 효과를 정량적으로 확인한 페랭의 실험 앞에서, 마흐도 원자의 실재를 부정할 수 없었습니다.
평생의 철학적 입장을 바꾼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마흐가 그것을 했습니다.
📜 파트 4. 페랭이라는 사람
장 밥티스트 페랭은 과학자이면서 동시에 뛰어난 과학 행정가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프랑스 과학 정책에도 깊이 관여했습니다. 당시 프랑스의 과학 연구 환경이 독일에 비해 뒤처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독일에는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처럼 대규모 국가 연구 기관이 있었지만, 프랑스에는 그에 상응하는 기관이 없었습니다.
페랭은 프랑스에도 체계적인 국가 과학 연구 기관이 필요하다고 주장했고, 그것을 위해 정치인들을 설득하고 제도를 만드는 데 직접 나섰습니다.
그 결과물이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센터의 전신이 된 기관들이었습니다. 페랭의 노력 없이는 오늘날의 CNRS가 없었을 것이라는 평가가 있습니다.
또한 그는 팔레 드 라 데쿠베르트 — 파리 과학 발견 궁전 — 의 창설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것은 일반 대중이 과학을 직접 접하고 체험할 수 있는 과학 박물관이었습니다. 과학의 대중화가 중요하다는 페랭의 신념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나치와 망명
1940년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자 페랭은 미국으로 망명했습니다. 70세의 나이였습니다.
미국에서 그는 과학 연구를 계속하려 했지만, 건강이 좋지 않았습니다. 1942년 뉴욕에서 71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프랑스 해방 후 1948년, 그의 유해는 프랑스로 돌아와 파리의 판테온에 안장되었습니다. 판테온은 프랑스가 영웅들을 모시는 장소입니다. 물리학자로서는 드문 영예였습니다.
📜 파트 5. 1926년 노벨상
1926년 노벨 물리학상은 장 페랭에게 수여되었습니다.
"물질의 불연속적 구조에 관한 연구, 특히 침강 평형 발견에 대하여"
수상 당시 56세였습니다.
노벨위원회가 수상 이유로 "물질의 불연속적 구조"를 명시한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단순히 새로운 실험 방법을 발명했다는 것이 아니라, 물질이 원자와 분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실험으로 확립한 공로를 인정한 것입니다.
이것은 20세기 초반 물리학에서 가장 근본적인 질문 중 하나였습니다. 물질의 본질이 무엇인가. 페랭의 실험이 그 질문에 답을 주었습니다.
브라운 운동 연구의 현대적 의미
브라운 운동은 오늘날 훨씬 더 넓은 맥락에서 연구됩니다.
나노 기술에서 나노 입자들의 움직임을 이해하는 데 브라운 운동 이론이 필수입니다. 생물학에서 세포 내부의 단백질, RNA, 소기관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이해하는 데도 같은 이론이 사용됩니다. 세포 내부는 크기 면에서 페랭이 연구한 입자들의 세계와 비슷합니다.
금융 수학에서도 브라운 운동 이론이 사용됩니다. 주가의 무작위 변동을 모델링하는 데 아인슈타인의 확산 방정식이 응용됩니다. 블랙-숄즈 옵션 가격 공식의 기반이 됩니다.
1827년 현미경 속 꽃가루의 움직임이 오늘날 금융 시장의 수학에까지 이어진다는 것. 과학의 연결이 얼마나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펼쳐지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 파트 6. 마무리 —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방법
원자는 너무 작아 직접 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존재를 증명할 수 있을까요?
페랭은 우회적인 방법을 택했습니다. 원자가 있다면 이런 현상이 일어나야 한다. 그 현상을 정밀하게 측정해서 예측값과 비교한다. 예측이 맞다면 원자는 실재한다.
현미경 속 꽃가루의 흔들림. 수지 공들의 침강 패턴. 이것들이 원자의 지문이었습니다.
페랭은 그 지문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회의론자들을 설득했습니다. 원자는 있습니다.
오늘날 주사 터널링 현미경은 원자를 직접 보고 원자 하나하나를 움직이는 것도 가능합니다. 원자의 실재를 직접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 기술이 나오기 80년 전, 페랭은 현미경 속 꽃가루와 수지 공들로 원자가 있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방법은 간접적인 논리와 정밀한 측정입니다. 페랭이 그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과학은 직접 보이지 않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 파트 7. 아보가드로 수 — 원자의 수를 세다
페랭의 실험에서 측정된 아보가드로 수는 6.022 × 10²³ 정도였습니다. 현재 알려진 정확한 값은 6.02214076 × 10²³입니다.
이 숫자가 얼마나 큰지 느끼기 어렵습니다. 6 × 10²³ 은 6 뒤에 0이 23개 붙는 수입니다. 지구 위의 모든 해변의 모래알 수보다도 훨씬 많습니다.
그런데 물 1g에 들어있는 수소 원자의 수가 그 정도입니다. 원자가 얼마나 작은지를 보여주는 숫자입니다.
아보가드로 수를 측정한다는 것은 원자 하나의 질량을 알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수소 원자 하나의 질량은 약 1.67 × 10⁻²⁴g입니다.
페랭 이전에도 아보가드로 수를 추정하는 방법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정밀하지 않았고, 서로 다른 방법들이 주는 값들이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페랭의 정밀한 측정이 여러 방법들의 값을 일치시키고, 아보가드로 수를 정확히 알려진 상수로 확립했습니다.
볼츠만의 유산
페랭의 실험으로 가장 크게 혜택을 받은 것은 볼츠만의 유산이었습니다.
루트비히 볼츠만은 원자의 운동으로 열역학 현상을 설명하는 통계역학을 발전시켰습니다. 엔트로피의 미시적 의미, 기체의 압력과 온도의 분자론적 설명 — 이 모든 것이 볼츠만의 업적입니다.
하지만 볼츠만은 원자의 실재를 둘러싼 논쟁에 지쳐 1906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자신이 평생 쌓아온 이론의 기초가 인정받지 못한다는 좌절이 그를 극단으로 몰았다고 전해집니다.
페랭의 1908~1909년 실험이 원자의 실재를 확인했을 때, 볼츠만의 이론도 완전히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볼츠만 상수 k — 온도와 에너지를 연결하는 기본 상수 — 는 아보가드로 수와 기체 상수의 비입니다. 아보가드로 수를 알면 볼츠만 상수를 계산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볼츠만 상수는 SI 단위계에서 켈빈의 정의에 사용됩니다. 볼츠만의 이름이 온도의 단위 정의에 담긴 것입니다.
페랭이 볼츠만의 뒤를 이어, 볼츠만이 보지 못한 증거를 제공했습니다. 그것이 과학의 연속성입니다.
📜 파트 9. 원자 실재의 다른 증거들 — 페랭의 위치
페랭의 실험은 원자 실재를 증명한 유일한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가장 설득력 있는 방법이었습니다.
이유는 독립성에 있었습니다. 페랭은 완전히 다른 두 가지 방법 — 침강 평형과 브라운 운동 직접 추적 — 으로 아보가드로 수를 측정했습니다. 두 값이 일치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다른 방법들 — 방사성 붕괴율, X선 회절, 기체 점성 — 의 값과도 일치했습니다.
이 수렴이 핵심이었습니다. 전혀 다른 방법들이 모두 같은 숫자를 가리킨다면, 그 숫자는 자연의 실제 상수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상수가 아보가드로 수라면, 원자와 분자가 실재하는 것입니다.
원자론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이 모든 독립적인 방법들이 같은 숫자를 줄 이유가 원자가 없다면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답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페랭의 공헌은 단순히 아보가드로 수를 정밀하게 측정한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방법들의 수렴이 원자 가설의 증거가 된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프랑스의 과학 환경과 페랭의 기여
19세기에 프랑스는 과학의 강국이었습니다. 라부아지에, 앙페르, 푸코, 파스퇴르 — 위대한 프랑스 과학자들의 계보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20세기에 들어서면서 프랑스 과학은 독일에 비해 상대적으로 뒤처지기 시작했습니다.
페랭은 이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과학 정책에 깊이 관여했습니다. 프랑스에 체계적인 국가 연구 기관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계속했고, 그것이 결실을 맺어 오늘날 CNRS의 전신이 만들어졌습니다.
페랭이 설립을 주도한 팔레 드 라 데쿠베르트는 1937년에 문을 열었습니다. 과학을 일반 대중에게 직접 보여주는 공간이었습니다. 그는 과학이 상아탑 안에만 머물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과학이 사회 전체의 것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이 신념이 실험실 밖에서의 페랭의 활동을 이끌었습니다. 연구자로서의 업적과 함께 과학 제도를 만든 공로도 그의 유산입니다.
페랭의 1926년 — 노벨상 수상의 맥락
1926년은 물리학에서 특별한 해였습니다. 슈뢰딩거가 파동 방정식을 발표한 해였습니다. 양자역학이 완성되어가던 시기였습니다.
그 혁명적인 해에 페랭이 원자의 실재를 증명한 공로로 노벨상을 받은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원자가 실재한다는 것이 확립된 기반 위에서 원자 내부의 구조와 양자역학이 발전하고 있었습니다.
토대가 없으면 건물을 세울 수 없습니다. 페랭이 원자의 실재라는 토대를 확립했고, 그 위에 20세기 물리학의 거대한 건물이 세워졌습니다.
노벨위원회가 1926년에 페랭을 선택한 것은, 혁명의 시기에 그 혁명의 기초를 다진 사람을 기억하자는 의미이기도 했습니다.
현대 나노 기술과 브라운 운동
21세기의 나노 기술에서 브라운 운동은 핵심 개념으로 다시 등장합니다.
나노 입자는 크기가 1~100nm인 입자입니다. 이 크기에서 열운동의 효과가 매우 강하게 나타납니다. 나노 입자들은 페랭이 연구한 수지 공들처럼 브라운 운동을 합니다.
약물 전달 시스템에서 나노 입자를 이용해 암세포에 약물을 전달하려면, 나노 입자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브라운 운동이 그 이해의 기초입니다.
광학 집게 기술은 레이저 빛으로 나노 입자를 잡고 움직이는 기술입니다. 단백질이나 DNA 분자를 잡아 그 물리적 성질을 측정합니다. 이 기술에서도 브라운 운동의 이해가 필수입니다.
세포 생물학에서 세포 내 단백질, 소기관들의 이동을 연구하는 데 브라운 운동 이론이 사용됩니다. 세포 내부는 크기 면에서 페랭이 연구한 세계와 비슷합니다.
1905년 아인슈타인이 이론을 제시하고, 1908~1909년 페랭이 실험으로 확인한 브라운 운동이 100년 후 나노 기술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과학의 파급은 예상을 훨씬 넘어 퍼져나갑니다.
📜 파트 8. 침강 평형 실험의 정밀함 — 페랭이 한 일의 구체성
페랭의 실험이 어떻게 수행되었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그 정밀함과 인내심에 감탄하게 됩니다.
페랭이 사용한 수지 입자는 감비아 고무라는 수지에서 만들었습니다. 이 수지를 물과 알코올에 넣고 분쇄하면 미크론 크기의 입자들이 만들어집니다. 그런데 이 입자들의 크기가 균일하지 않았습니다.
균일한 크기의 입자를 얻기 위해 페랭은 원심분리를 반복했습니다. 크기가 다른 입자들은 원심분리 속도에 따라 다른 비율로 분리됩니다. 이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하면 점점 더 균일한 크기의 입자들을 얻을 수 있습니다.
최종적으로 얻은 입자들의 크기는 현미경으로 측정해 확인했습니다.
이 입자들을 물에 분산시키고 현미경으로 관찰했습니다. 높이에 따라 입자 수가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세었습니다. 이것은 정말로 지루한 작업이었습니다. 현미경 속 작은 입자들을 하나하나 세면서, 높이를 바꿔가며 수백 번의 측정을 반복했습니다.
이 측정에서 얻은 데이터가 아보가드로 수를 줬습니다.
페랭은 침강 평형 실험 외에도 브라운 운동 직접 추적, 에멀전의 삼투압 측정 등 여러 독립적인 방법으로 아보가드로 수를 측정했습니다. 그 값들이 모두 일치했습니다.
이 일관성이 원자 실재의 증거였습니다.
볼츠만의 자살과 페랭의 실험
볼츠만의 자살은 1906년 9월이었습니다. 페랭이 침강 평형 실험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그 직후였습니다. 볼츠만의 죽음이 페랭에게 영향을 주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원자 실재 논쟁의 결말을 보여줘야 한다는 의식은 있었을 것입니다.
볼츠만이 원자의 실재를 믿고 그것이 인정받지 못한다는 좌절 속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2~3년 후 페랭의 실험이 원자의 실재를 확인했습니다. 역사의 이 아이러니는 과학의 진보가 항상 승자가 그것을 보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볼츠만 상수는 그의 이름을 딴 k로 표시되며, 열역학의 가장 기본적인 상수입니다. 1몰의 기체 상수를 아보가드로 수로 나눈 것입니다. 볼츠만은 원자가 실재한다는 것이 증명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이름은 원자 세계와 거시 세계를 연결하는 상수에 붙어 있습니다. 볼츠만의 유산은 그렇게 살아 있습니다.
페랭의 또 다른 업적 — 음극선 연구
페랭의 박사 논문은 브라운 운동이 아니라 음극선이었습니다.
1895년 그는 음극선이 음전하를 가진 입자들의 흐름이라는 것을 실험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음극선을 패러데이 컵에 모아 전하를 측정하면 항상 음전하가 검출되었습니다.
이것은 J.J. 톰슨의 전자 발견보다 2년 먼저였습니다. 페랭은 음극선이 입자의 흐름이라는 것을 보였지만, 그 입자가 무엇인지 — 전자 — 를 밝힌 것은 톰슨이었습니다.
페랭의 음극선 연구와 브라운 운동 연구는 서로 다른 방향에서 물질의 입자적 구조를 탐구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평생이 원자와 전자라는 물질의 기본 단위를 향해 집중되어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