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6년 12월, 스톡홀름.
테오도르 스베드베리가 노벨화학상을 받던 그날, 그가 개발한 도구는 이미 생화학의 역사를 바꾸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초원심분리기 — 그 이름만으로는 그것이 무슨 혁명을 일으켰는지 쉽게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기계가 가능하게 한 것을 생각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단백질의 분자량을 최초로 정확하게 측정했습니다. 단백질이 단일한 분자 크기를 가진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그리고 세포를 구성하는 거대 분자들의 세계를 처음으로 정밀하게 탐구할 수 있게 했습니다.
초원심분리기는 현대 생화학, 분자생물학, 그리고 제약 산업의 필수 도구입니다. 인슐린을 정제하고, 바이러스를 분리하고, DNA를 분획하는 일 모두에 그 원리가 사용됩니다.
스웨덴의 웁살라 대학교에서 조용히, 집요하게 정밀 도구를 만들어가던 한 화학자의 이야기 — 그것이 어떻게 생명 과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는지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 수상 이유 — 분산 시스템 연구
"for his work on disperse systems"
분산 시스템 연구 — 노벨위원회의 수상 이유는 간결했지만, 그 안에는 초원심분리기 개발과 콜로이드 화학의 체계화라는 두 가지 업적이 담겨 있었습니다.
분산 시스템이란 한 물질(분산질)이 다른 물질(분산매) 속에 분산된 계를 말합니다. 콜로이드가 대표적인 분산 시스템입니다. 전년도(1925년) 수상자 지그몬디도 콜로이드 연구로 상을 받았으니, 두 해 연속으로 콜로이드 관련 화학자가 노벨화학상을 받은 셈입니다. 1920년대가 콜로이드 화학의 황금기였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스베드베리의 독특한 공헌은 초원심분리기라는 강력한 도구를 개발하여, 분산 시스템 — 특히 단백질 같은 거대 분자가 분산된 용액 — 을 정량적으로 분석할 수 있게 한 것이었습니다.
📜 발보의 소년 — 스베드베리의 생애
테오도르 스베드베리는 1884년 8월 30일, 스웨덴 외레브로 주의 발보 근처 플레르란 농장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헤르만 스베드베리는 철강 회사의 공장장이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자연 현상에 호기심이 많았던 테오도르는 특히 생물학과 화학에 흥미를 보였습니다.
1904년 웁살라 대학교 화학과에 입학하여 뛰어난 성적을 보였고, 1907년 화학 분야의 조교 자리를 얻었습니다. 1912년에는 웁살라 대학교 물리화학 교수로 임명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생의 대부분을 웁살라에서 보내며, 이 대학교를 콜로이드 화학과 생화학 연구의 세계적 중심지로 키워냈습니다.
브라운 운동 연구에서 출발
스베드베리의 초기 연구는 콜로이드 입자의 브라운 운동이었습니다.
1905년 아인슈타인이 브라운 운동의 수학적 이론을 발표했고, 1908년 장 페랭이 실험으로 이를 검증하여 원자의 실재를 증명했습니다. 스베드베리도 이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콜로이드 입자의 확산과 침강을 연구했습니다.
이 연구 과정에서 스베드베리는 콜로이드 입자의 크기와 질량을 정확하게 측정하는 방법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습니다. 브라운 운동 이론으로부터 입자의 확산 계수와 크기를 연결하는 수식이 있었지만, 실제 측정에는 많은 불확실성이 있었습니다.
더 직접적이고 정확한 방법이 필요했습니다. 그것이 초원심분리기 아이디어의 출발점이었습니다.
⚡ 초원심분리기의 개발 — 중력을 넘어서
일반 원심분리기는 원심력으로 입자를 분리합니다. 하지만 콜로이드 입자나 단백질처럼 매우 작은 입자들은 일반 원심력으로는 분리되지 않습니다. 이들을 분리하려면 훨씬 더 강한 원심력이 필요했습니다.
수십만 배의 중력
스베드베리는 중력의 수십만 배에 달하는 원심력을 발생시킬 수 있는 장치를 개발하기로 했습니다.
이것은 엄청난 공학적 도전이었습니다. 초고속으로 회전하는 물체에는 극도로 큰 원심력이 가해집니다. 이 힘을 견디면서도 정밀하게 작동하는 회전자(rotor)를 설계하는 것, 진공 속에서 작동시켜 공기 저항과 마찰열을 최소화하는 것, 그리고 회전 중에도 광학적으로 시료를 관찰할 수 있도록 하는 것 — 이 모두가 해결해야 할 기술적 문제들이었습니다.
스베드베리는 1920년대 초반부터 이 장치 개발에 착수하여, 수 년간의 시행착오 끝에 1924년 최초의 실용적인 초원심분리기를 완성했습니다.
슈베드베리 단위
스베드베리는 분자의 침강 속도를 나타내는 침강 계수 라는 개념을 도입했습니다. 침강 계수의 단위는 그의 이름을 따 스베드베리 단위 (Svedberg unit, S)라고 불리며, 1 S = 10⁻¹³초입니다.
예를 들어, 리보솜 소단위체는 30S와 50S(원핵생물), 또는 40S와 60S(진핵생물)로 표시됩니다. 이 S 값이 바로 스베드베리가 도입한 침강 계수의 단위입니다. 오늘날 세포생물학 교과서에 그의 이름이 불멸하는 이유입니다.
헤모글로빈의 분자량 측정
초원심분리기로 가장 먼저 이룬 획기적 업적은 헤모글로빈의 분자량 측정이었습니다.
1926년, 스베드베리는 초원심분리기로 말의 헤모글로빈을 분석하여 분자량이 약 68,000 달톤(Da)임을 측정했습니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엄청난 정밀도였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헤모글로빈이 단일한 분자량을 갖는다는 사실의 확인이었습니다. 당시 많은 화학자들은 단백질이 일정한 분자 크기를 갖지 않는 콜로이드 집합체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스베드베리의 측정은 단백질이 정해진 크기의 고유한 분자임을 처음으로 정확하게 증명했습니다.
이것은 현대 분자생물학의 핵심 전제 — 단백질이 고유한 구조를 가진 분자라는 것 — 의 실험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 단백질 연구의 개척자
초원심분리기를 완성한 후 스베드베리는 다양한 단백질을 분석했습니다.
알부민, 헤모글로빈, 카탈라아제, 우라아제, 타이로글로불린 — 이 단백질들의 분자량이 하나하나 정확하게 측정되기 시작했습니다.
스베드베리는 흥미로운 패턴을 발견했습니다. 많은 단백질의 분자량이 약 34,000 달톤의 정수배에 가깝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단백질이 더 작은 단위 분자들이 조합되어 이루어진다는 가설을 제안했습니다.
이 직관은 나중에 단백질이 폴리펩타이드 사슬로 이루어지며, 많은 단백질이 여러 소단위(subunit)로 구성된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부분적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바이러스 연구에의 응용
초원심분리기는 바이러스 연구에도 혁명적인 도구가 되었습니다.
1930년대 스베드베리의 연구실에서는 담배 모자이크 바이러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등을 초원심분리기로 분리하고 그 크기를 측정했습니다. 바이러스가 균일한 크기의 입자임을 처음으로 정확하게 확인한 것도 이 연구들이었습니다.
이 연구들은 나중에 웬델 스탠리가 담배 모자이크 바이러스를 결정화하고 그것이 단백질 결정임을 밝혀 1946년 노벨화학상을 받는 데도 기여했습니다.
핵산과 DNA
1930~40년대에 스베드베리의 연구실은 핵산(DNA와 RNA)의 침강 특성도 연구했습니다. 이것은 DNA의 구조가 밝혀지기 전이었지만, DNA의 크기와 물리적 특성에 대한 초기 이해를 제공했습니다.
🌍 웁살라 대학교 — 스웨덴 과학의 보석
스베드베리는 노벨상을 받은 이후에도 웁살라 대학교에서 계속 연구했습니다.
1930년 그는 구스타프 스베드베리 연구소(나중에 그의 이름을 따 명명) 를 설립하여 초원심분리기를 이용한 연구를 체계적으로 확대했습니다. 이 연구소에서 수십 명의 대학원생과 연구원들이 단백질, 바이러스, 핵산의 크기와 물리적 특성을 연구했습니다.
스베드베리는 또한 핵물리학 분야에도 관심을 가지고, 1930년대에는 사이클로트론(원형 입자 가속기) 건설 프로젝트를 이끌었습니다. 이것은 당시 스웨덴에서는 매우 앞선 시도였습니다.
인간 스베드베리
과학 연구 이외에도 스베드베리는 도서를 수집하고, 자연 속에서 하이킹을 즐기며, 철학과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는 평생 웁살라를 떠나지 않고 스웨덴 과학의 발전에 헌신했습니다. 여러 해외 대학에서 교수직 제안을 받았지만 모두 거절했습니다.
1971년 2월 25일, 스베드베리는 스웨덴 외레브로에서 8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노벨상 수상 후 45년을 더 살면서 연구와 교육에 헌신한 삶이었습니다.
💡 초원심분리기가 바꿔놓은 세계
스베드베리의 초원심분리기는 오늘날 생명과학과 의학의 핵심 도구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현대 초원심분리기
오늘날의 초원심분리기는 스베드베리의 원래 장치보다 훨씬 정교합니다. 분당 수십만 회전이 가능하며, 중력의 수백만 배에 달하는 원심력을 발생시킬 수 있습니다.
주요 응용 분야로는 단백질 분리·정제, 세포 소기관 분획, 바이러스 정제, DNA/RNA 분리, 리포솜 제조, 나노입자 분리 등이 있습니다.
분자생물학 혁명에서의 역할
1950~60년대 분자생물학 혁명에서 초원심분리기는 핵심 도구였습니다.
1957년 매슈 메셀슨과 프랭클린 스탈은 초원심분리기를 이용하여 DNA 복제가 반보존적(semi-conservative)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실험적으로 증명했습니다. 이것은 DNA 이중나선 구조(왓슨과 크릭, 1953년 발견) 이후 분자생물학의 가장 중요한 실험 중 하나로 꼽힙니다.
이 실험에서는 무거운 질소(¹⁵N)와 보통 질소(¹⁴N)로 표지된 DNA를 초원심분리기로 분리하여, DNA 복제 방식을 규명했습니다.
의약품 생산
현대 생명공학 의약품(바이오의약품)의 생산 과정에서 초원심분리기는 필수 장비입니다.
재조합 단백질 의약품(인슐린, 에리트로포이에틴, 항체 등)을 세포 배양으로 생산하면 다양한 불순물이 섞입니다. 초원심분리기를 이용하면 원하는 단백질만 정밀하게 분리·정제할 수 있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COVID-19) 예방을 위한 mRNA 백신(화이자, 모더나)의 생산 과정에서도 지질 나노입자(LNP)에 mRNA를 캡슐화한 후 초원심분리기로 정제하는 단계가 포함됩니다.
테오도르 스베드베리가 웁살라의 실험실에서 고속 회전하는 작은 원통을 만들어가던 그 시절, 그는 자신의 장치가 21세기의 팬데믹 대응 백신 생산에까지 사용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초 과학의 혁신은 언제나 그렇게 예상치 못한 곳까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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