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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0_New Novel/316_[NEW] 노벨평화상

[1947 노벨평화상] 미국 친우 봉사 위원회 & 친우 봉사 평의회 : 적에게도 밥을 먹인 사람들, 침묵으로 외친 평화

by 어셈블러 2026. 5.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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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초, 독일 루르 지방.

전쟁에서 진 독일은 배상금을 갚지 못했고, 프랑스와 벨기에는 그 대가로 독일의 산업 심장부인 루르 지방을 점령했습니다. 경제는 마비되었고 인플레이션이 폭발했습니다. 아이들은 굶주렸습니다.

그때 퀘이커 교도들이 왔습니다.

미국과 영국에서 온 이 낯선 사람들은 방금 전 적국이었던 독일의 아이들에게 아무 조건 없이 밥을 먹였습니다. 전쟁에서 이긴 나라 사람들이 전쟁에서 진 나라의 아이들을 먹이는 것이었습니다.

독일 현지인들은 처음에 의심스러워했습니다. 왜 저 사람들이 우리 아이들에게 밥을 주는 걸까?

퀘이커 봉사자들은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밥을 주었습니다.

매일, 꾸준히.

나중에 독일 어머니들은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당신들은 우리 적이었는데 왜 이렇게 해주나요?"

퀘이커 봉사자들이 대답했습니다. "우리에게 적은 없습니다. 오직 굶주린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1947년 노벨 평화상을 받은 두 단체 — 미국 친우 봉사 위원회(AFSC)와 친우 봉사 평의회(FSC, 영국) — 의 정신이었습니다.


 

🌍 파트 1. 두 번의 세계대전, 그리고 망가진 세상

 

1947년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2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유럽은 그야말로 폐허였습니다. 수천만 명이 죽었습니다. 도시들은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농경지는 황폐해졌고, 공장은 폭격으로 무너졌습니다. 수백만 명이 집을 잃고 난민이 되어 떠돌았습니다.

더 무서운 것은 마음의 폐허였습니다.

6년 동안 이어진 전쟁은 국가 간의 불신과 증오를 극한까지 끌어올렸습니다. 전쟁에서 싸운 나라들은 서로를 다시 볼 수 없는 원수로 여겼습니다. 특히 유럽에서 나치 독일이 저지른 만행은 독일과 독일인에 대한 뿌리 깊은 분노와 혐오를 남겼습니다.

새로운 긴장도 생겨났습니다. 미국과 소련은 전쟁 중에는 같은 편이었지만, 전쟁이 끝나자마자 이념 대결로 돌아섰습니다. 냉전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인도의 독립 운동이 절정에 달하고 있었습니다. 마하트마 간디는 비폭력 불복종 운동을 이끌며 영국 식민 지배에 맞서고 있었습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전역에서 탈식민지화의 바람이 불었습니다.

이 복잡하고 분열된 세계 속에서, 퀘이커 교도들은 조용히 그들의 일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 파트 2. 침묵하는 사람들 — 퀘이커의 역사와 정신

 

퀘이커 교도들을 이해하려면 먼저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아야 합니다.

퀘이커(Quaker)는 17세기 영국에서 조지 폭스가 시작한 기독교 운동의 구성원들입니다. 공식 명칭은 '종교 친우회(Religious Society of Friends)'입니다.

그들의 신앙 방식은 매우 독특합니다. 성직자가 없습니다. 교리 암송도 없습니다. 예배는 침묵으로 이루어집니다. 그 침묵 속에서 각자가 '내면의 빛(Inner Light)'을 통해 신과 직접 소통한다고 믿습니다.

이 신앙에서 매우 독특한 사회적 태도가 나왔습니다.

모든 인간 안에 신의 빛이 있다면, 그 누구도 다른 사람보다 더 가치 있을 수 없습니다. 적이라도, 다른 종교인이라도, 다른 인종이라도. 이 믿음이 퀘이커 교도들을 역사상 가장 일관된 평화주의자들로 만들었습니다.

퀘이커 교도들은 수백 년 동안 전쟁에 참여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양심적 병역 거부는 퀘이커 신앙의 핵심이었습니다. 그 대신 그들은 다른 방식으로 봉사했습니다. 부상자를 돌보고, 난민을 구호하고, 재건을 돕는 방식으로.

또한 퀘이커 교도들은 역사상 가장 이른 노예제 폐지 운동가들이었습니다. 18세기부터 노예 제도를 죄악으로 규정하고 그 철폐를 위해 싸웠습니다. 여성 인권, 원주민 권리, 감옥 개혁 — 당대에 급진적이었던 사회 정의 운동의 선봉에 항상 퀘이커 교도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전쟁 포화 속에서 만든 두 단체가 1947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습니다.


 

⚔️ 파트 3. 두 단체의 탄생 — 전쟁이 낳은 인도주의

 

미국 친우 봉사 위원회(AFSC)의 탄생

1917년,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을 선언했습니다.

대부분의 미국 청년들이 징집되어 전쟁터로 나갔습니다. 하지만 퀘이커 청년들은 다른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전쟁 참여를 금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집에 앉아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루퍼스 존스를 비롯한 퀘이커 지도자들은 대안을 만들었습니다. 전쟁터에서 싸우는 대신, 전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돕는 것이었습니다.

1917년 4월, 미국 친우 봉사 위원회(American Friends Service Committee, AFSC)가 필라델피아에서 창설되었습니다.

그들은 즉시 유럽으로 건너갔습니다. 프랑스에서 전쟁 피해자들을 도왔습니다. 피난민을 위한 임시 주거지를 만들었습니다. 부상자들을 치료했습니다. 고아들을 돌봤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독일로 건너갔습니다. 패전국의 아이들을 먹이는 일이었습니다. 승전국과 패전국의 구분 없이, 오직 굶주리고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했습니다.

친우 봉사 평의회(FSC)의 탄생

영국에서는 이미 전쟁 초기부터 퀘이커 교도들이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1920년, 전쟁 후 유럽 재건을 위해 활동하던 영국 퀘이커 교도들이 친우 봉사 평의회(Friends Service Council, FSC)를 창설했습니다.

FSC는 특히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 패전국 지원에 집중했습니다. 칼 헬러 같은 지도자들이 이끈 FSC는 정치적 중립을 철저히 지키며 어느 편도 들지 않았습니다.

두 단체 모두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활동했습니다. 영국에서, 독일에서, 프랑스에서, 난민 캠프에서. 폭격이 쏟아지는 도시에서도 봉사자들은 떠나지 않았습니다.


 

🔬 파트 4. 그들이 한 일 — 국경을 넘은 연대의 실천

 

두 단체의 활동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침묵의 혁명'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전후 독일 아동 급식 프로그램

제1차 세계대전 후 AFSC는 독일에서 100만 명이 넘는 아동에게 급식을 제공했습니다. 하루에도 수십만 건의 식사를 제공하는 물류 작전이었습니다.

그 아이들 중 한 명이 나중에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나는 그 퀘이커 아주머니가 매일 우리에게 수프를 떠주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녀는 미국인이었고 우리는 그녀의 나라와 전쟁을 했던 독일인이었는데, 그녀는 매일 미소와 함께 우리에게 밥을 줬습니다."

이 급식 프로그램은 단순히 배를 채우는 것 이상이었습니다. 전쟁이 만들어낸 증오의 벽에 인간적 온기의 틈을 내는 것이었습니다.

재건 활동

퀘이커 봉사자들은 폭격으로 파괴된 마을을 재건하는 일에도 참여했습니다. 집을 짓고, 학교를 수리하고, 농업 기술을 전수했습니다. 단기 지원이 아니라 자립할 수 있도록 돕는 장기적 접근이었습니다.

국제 이해 교육

두 단체는 물질적 지원을 넘어, 국가 간의 오해와 편견을 해소하기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했습니다. 학생 교환, 문화 교류, 국제 세미나를 통해 서로 다른 나라의 청년들이 직접 만나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습니다.

비폭력 갈등 해결 훈련

퀘이커 교도들은 폭력 없이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을 교육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싸우지 말라는 도덕적 가르침이 아니라, 실제로 갈등 상황에서 사용할 수 있는 구체적인 기술과 방법이었습니다.


 

🎬 파트 5. 간디와의 연결 — 수상 후보의 드라마

 

1947년 노벨 평화상 후보 중에는 마하트마 간디도 있었습니다.

사실 간디는 1947년 이전에도 여러 차례 후보에 올랐습니다. 그의 비폭력 독립 운동은 퀘이커 평화주의와 같은 정신을 공유했습니다. 인도의 독립이 1947년 8월에 이루어진 것도 노벨 위원회의 고려 사항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1948년 1월 30일, 간디는 암살당했습니다.

노벨 위원회는 규정상 사망한 사람에게 상을 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1948년 노벨 평화상은 아예 수여되지 않았습니다. 위원회는 "살아있는 적합한 후보가 없다"는 이유를 댔는데, 역사가들은 이것이 간디를 위한 자리를 비워둔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퀘이커 단체들이 상을 받은 1947년은 간디가 살아있던 마지막 해였습니다. 만약 1947년 상이 간디에게 갔다면, 퀘이커 단체들은 더 기다렸을지도 모릅니다.

역사의 아이러니입니다.

퀘이커 교도들은 자신들이 상을 받은 것보다 간디의 죽음을 더 슬퍼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공유하는 비폭력의 철학이 비폭력의 삶을 산 가장 위대한 실천가를 잃었으니까요.


 

📱 파트 6. 오늘날의 퀘이커 — 디지털 시대에도 침묵하며 행동하다

 

AFSC와 FSC의 후신들은 지금도 활동 중입니다.

AFSC는 현재 미국 내 이민자 권리 보호, 군비 감축 운동, 기후 정의 캠페인에 적극적으로 참여합니다.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남수단 등 분쟁 지역에서의 지원 활동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FSC는 현재 퀘이커 유엔 사무소(Quaker United Nations Office)를 통해 유엔의 평화 구축 과정에 직접 참여합니다. 비공식 외교 채널로서 분쟁 당사자들 사이에서 대화를 중재하는 역할도 합니다.

기술의 발전은 퀘이커 정신의 전파 방식도 바꿔놓았습니다.

소셜 미디어를 통한 캠페인, 온라인 모금 플랫폼, 디지털 편지 쓰기 운동 — 과거에는 직접 방문해야 가능했던 연대 활동이 스마트폰 하나로 가능해졌습니다. 전 세계에 흩어진 퀘이커 교도들과 그 정신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온라인에서 연결되어 집단적 행동을 조직합니다.

비폭력 대화(Nonviolent Communication, NVC) 기법은 퀘이커 평화주의 철학에서 영향을 받은 현대적 갈등 해결 방법론입니다. 마셜 로젠버그가 체계화한 이 방법은 오늘날 기업, 학교, 가정, 국제 협상 현장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 파트 7. 침묵 속의 외침 — 퀘이커 정신이 우리에게 묻는 것

 

퀘이커 교도들은 선전하지 않습니다. 큰 목소리로 자신들의 활동을 홍보하지 않습니다. 조용히 와서, 조용히 밥을 주고, 조용히 떠납니다.

하지만 그 침묵이 가장 강력한 외침이 됩니다.

적에게 밥을 주는 행위는 어떤 평화 협정보다도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나는 당신이 내 적이어도 당신의 배고픔을 모른 척할 수 없다." 이것이 국경과 이념을 넘어 인간성의 핵심을 건드립니다.

퀘이커 봉사 활동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 있습니다.

평화는 국가 간의 협약으로 만들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사람들 사이의 직접적인 인간적 연대로 만들어지는 것인가?

두 가지 모두 필요합니다. 하지만 퀘이커 교도들이 보여준 것은, 제도가 아직 없을 때도, 협약이 깨졌을 때도, 전쟁의 총성이 멈추지 않았을 때도 인간적 연대는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적은 없습니다. 오직 굶주린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이 말이 평화의 본질에 가장 가까운 것일지도 모릅니다.

1947년 노벨 위원회는 화려한 외교가나 유명한 정치가가 아니라, 조용히 밥을 주고 집을 짓고 상처를 치료하던 사람들에게 상을 줬습니다.

그것은 평화가 협상 테이블이 아니라 식탁에서 시작된다는 선언이었습니다.


 

✊ 파트 8. 양심적 병역 거부 — 퀘이커 평화주의의 대가

 

퀘이커 교도들의 평화주의는 추상적인 이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매우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대가를 요구합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에서 퀘이커 청년들은 징집을 거부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군대에 가기 싫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종교적 신념이 인간을 죽이는 것을 금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미국에서 양심적 병역 거부는 법적으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거부자들은 군사 법원에 회부되어 투옥되거나, 강제로 군복을 입히고 전선에 보내지기도 했습니다. 일부는 고문을 받았습니다.

퀘이커 지도자들은 이 상황에서 대안을 찾았습니다. 전쟁에 참여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집에 앉아있는 것도 아닌 제3의 길. 전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돕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AFSC의 탄생 배경이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나라에서 양심적 병역 거부는 법적으로 인정받습니다. 특히 유럽 국가들은 대체 복무 제도를 통해 종교적, 도덕적 이유로 군복무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다른 형태의 사회 기여를 할 수 있도록 합니다.

이 제도 확산에 퀘이커 교도들의 오랜 투쟁이 기여했습니다. 그들은 전장에서 싸우는 대신 다른 방식으로 봉사함으로써, 양심적 병역 거부가 단순한 이기주의가 아니라 진정한 평화주의적 헌신임을 증명했습니다.


 

🏙️ 파트 9. 독일 어린이를 먹인 사람들 — 퀘이커 구호의 구체적 역사

 

AFSC의 제1차 세계대전 후 독일 어린이 급식 프로그램은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례입니다.

1919년, 전쟁이 끝났지만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의 가혹한 배상 요구와 경제 봉쇄로 극도의 식량 난에 처했습니다. 특히 어린이들이 극심한 영양 결핍 상태였습니다.

AFSC는 1919년부터 독일 어린이들을 위한 급식 프로그램을 시작했습니다. 최고조에 달했을 때는 하루에 100만 명이 넘는 독일 어린이에게 식사를 제공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상징적인 행위였는지 생각해보십시오. 미국은 방금 전 독일과 전쟁을 했습니다. 미국 군인들이 독일 군인들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 적국의 아이들에게 미국인들이 밥을 먹이고 있었습니다.

이 프로그램의 효과는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독일 사회에서 퀘이커 교도들은 "적이면서도 우리를 도운 사람들"로 기억되었습니다. 이것이 전후 독일에서 미국에 대한 적대감을 일정 부분 완화시켰습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AFSC는 다시 독일로 갔습니다. 패전국 독일의 재건을 도왔습니다. 이것이 마셜 플랜과 함께 독일의 빠른 회복에 기여했습니다.

오늘날 독일과 미국이 유럽 민주주의의 두 축이 된 것은, 전쟁 직후의 인도주의적 지원이 만든 기반 위에서 가능했습니다.


 

🌱 파트 10. 비폭력 대화 — 퀘이커 정신이 심리학과 만날 때

 

퀘이커 평화주의는 단순히 전쟁을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일상적인 갈등 해결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다른 접근을 제안합니다.

20세기 후반, 심리학자들이 퀘이커 평화주의의 실천적 방법들을 체계화했습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마셜 로젠버그가 개발한 비폭력 대화(Nonviolent Communication, NVC)입니다.

NVC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갈등을 일으키는 것은 상대방의 행동 자체가 아니라, 그 행동에 대한 우리의 해석과 판단입니다. 그리고 그 판단 뒤에는 충족되지 않은 욕구가 있습니다.

따라서 갈등을 해결하려면 판단과 비난 대신,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정직하게 표현하고, 상대방의 감정과 욕구에도 공감해야 합니다.

이것은 퀘이커 교도들이 수세기 동안 실천해온 침묵과 경청의 문화에서 비롯된 지혜입니다. 결론을 서두르지 않고, 상대방의 말을 먼저 듣고, 자신의 내면을 살피는 것.

오늘날 NVC는 가정, 학교, 기업, 협상 현장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됩니다. 국제 분쟁 조정에서도 이 방법론이 활용됩니다.

퀘이커 교도들이 17세기에 심은 씨앗이 21세기에 이런 형태로 꽃을 피운 것입니다.


 

🔮 파트 10+. 역사를 잇는 연결 — 과거에서 현재로

 

이 수상이 이루어진 역사적 맥락을 다시 살펴보면, 우리는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유효한 교훈을 발견합니다.

인류는 반복적으로 갈등과 전쟁을 경험해왔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반복적으로 그 갈등에서 평화를 이끌어내려는 노력도 해왔습니다. 노벨 평화상은 그 노력들 중 가장 뛰어난 것들을 기록하고 기리는 제도입니다.

1944년부터 1956년까지의 수상 역사를 보면, 평화를 만드는 방법이 얼마나 다양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전쟁 포로를 돌보는 것, 국제 기구를 설계하는 것, 오랜 세월 평화를 외치는 것, 굶주린 사람을 먹이는 것, 분쟁을 중재하는 것,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것, 생명을 치료하는 것, 경제를 재건하는 것, 난민을 보호하는 것.

이 모든 것이 평화입니다.

어떤 방법이 '진짜' 평화를 만드는가 하는 질문은 잘못된 질문입니다. 평화는 여러 층위에서 동시에 만들어집니다. 제도적 층위, 경제적 층위, 사회적 층위, 개인적 층위 — 모든 층위에서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수상자들의 노력 위에 서 있습니다. 유엔이 있고, WTO가 있고, UNHCR이 있고, ILO가 있습니다. 완벽하지 않지만 있습니다. 그것들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다릅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새로운 과제들이 있습니다. 기후 변화, 핵 확산, 사이버 전쟁, 자율 무기, 인공지능의 무기화, 정보 조작 — 이런 새로운 위협들에 맞서 평화를 지켜나가는 것이 우리 세대의 과제입니다.

그 과제를 수행하기 위한 영감을 과거의 수상자들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포기하지 않는 것. 방법이 달라도 같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 적에게도 인간의 얼굴을 보는 것. 고통받는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는 것.

이것들이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공통된 태도였습니다.

그 태도는 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필요합니다.


 

📖 에필로그. 평화는 현재 진행형

 

역사는 이미 지나간 것들의 기록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역사는 지금 이 순간에도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1944년 전쟁의 한가운데서 국제 적십자 위원회의 봉사자들이 포로수용소를 방문했을 때, 그들은 역사를 만들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냥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랠프 번치가 로도스 섬에서 밤새 협상 문서를 검토할 때, 그는 노벨 평화상을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냥 전쟁을 멈춰야 한다는 일념으로 일했을 것입니다.

알베르트 슈바이처가 랑바레네의 더운 진료실에서 환자를 치료할 때, 그는 세계적 명성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냥 지금 고통받는 사람을 도울 뿐이었습니다.

이들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평화는 저 멀리 있는 거대한 목표가 아닙니다. 평화는 지금 이 순간, 내가 있는 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으로 만들어집니다.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분쟁 지역에서 평화유지군으로 일하든, 지역 사회에서 갈등을 중재하든, 학교에서 다양성을 존중하는 교육을 하든, 온라인에서 혐오 발언에 대응하든 — 모든 것이 평화를 만드는 행위입니다.

1944년부터 1956년까지의 노벨 평화상 수상자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각자의 자리에서 평화를 만들었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자리에서 우리의 방식으로 평화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것이 이 역사가 우리에게 전달하는 최종 메시지입니다.


 

💬 수상자들의 목소리 — 그들이 남긴 말들

 

이 시기의 수상자들이 남긴 발언과 글에서 평화에 대한 깊은 통찰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인류의 고통을 목격한 사람들, 전쟁의 참상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은 사람들,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평화를 위해 일한 사람들의 말은 시대를 초월하여 울립니다.

 

 

"평화는 단순히 전쟁의 부재가 아닙니다. 평화는 인간의 내면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이것은 이 시기 수상자들 중 누가 한 말인지 특정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수상자들의 삶이 이 진리를 증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쟁이 끝난다고 평화가 오는 것이 아닙니다. 굶주림이 해결된다고 갈등이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법률이 만들어진다고 인간성이 회복되는 것도 아닙니다.

평화는 각각의 인간이 상대방의 존엄성을 인정하는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적의 포로에게도 인간다운 대우를 하는 결정에서, 패전국의 어린이에게도 밥을 먹이는 행동에서, 상대방의 말을 먼저 듣는 협상 태도에서.

1944년부터 1956년까지의 수상자들은 이것을 말로만 하지 않고 삶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공통된 유산입니다.


 

🌱 미래를 위한 씨앗 — 다음 세대에게

 

이 역사를 읽는 젊은 세대에게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이것입니다.

평화는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불가능하지도 않습니다.

앙리 뒤낭이 없었다면 국제 적십자 위원회가 없었을 것입니다. 코델 헐이 없었다면 유엔이 지금과 달랐을 것입니다. 에밀리 발치가 없었다면 여성 평화 운동의 역사가 달랐을 것입니다. 알베르트 슈바이처가 없었다면 아프리카 의료 봉사의 개념 자체가 달랐을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결단과 헌신이 역사를 바꿀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기후 변화, 핵 위협, 사이버 전쟁, 인공지능의 무기화 —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위협들에 맞서 새로운 해결책을 찾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그 사람들이 될 수 있는 것은 화려한 재능이나 특별한 배경을 가진 사람만이 아닙니다.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눈을 돌리고, 포기하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묵묵히 해나가는 사람들이면 됩니다.

1944년부터 1956년의 수상자들이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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