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효모가 죽어도 술은 익는다, 하지만..."
인류는 아주 오래전부터 포도를 으깨어 두면 와인이 되고, 밀가루 반죽을 놔두면 부풀어 빵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 마법 같은 과정을 '발효(Fermentation)' 라고 합니다.
1897년, 에두아르트 부흐너(1907년 노벨상 수상자)는 살아있는 효모 세포가 없어도, 효모를 갈아 만든 즙(추출액)만으로도 발효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증명했습니다. 그는 효모 안에 있는 '치마아제(Zymase)' 라는 효소가 설탕을 알코올로 바꾼다고 주장했습니다.
"아하, 효소라는 단백질 기계가 있어서 발효가 되는구나!"
과학자들은 이제 발효의 비밀이 다 풀렸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효모 즙으로 발효를 시키면 처음에는 거품이 보글보글 나다가 금방 멈춰버리는 것이었습니다. 효소가 멀쩡히 있는데 왜 반응이 멈출까?
오늘 소개할 1929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들은 이 멈춰버린 발효통 앞에서 끈질기게 질문을 던진 두 명의 화학자입니다.
효모 즙을 반투막 주머니에 넣고 걸러보는 실험으로 효소의 파트너를 찾아낸 영국의 아서 하든(Arthur Harden). 그리고 그 파트너의 정체가 무엇인지 화학적으로 규명해 낸 스웨덴의 귀족 과학자 한스 폰 오일러-켈핀(Hans von Euler-Chelpin).
이들은 "효소는 혼자 일하지 않는다. 반드시 곁에서 도와주는 조수(Helper)가 필요하다" 는 사실을 밝혀내어, 비타민과 미네랄이 왜 우리 몸에 필요한지 설명하는 생화학의 기초를 닦았습니다.
📜 아서 하든 : 주머니 밖으로 빠져나간 영혼
영국의 리스터 예방의학 연구소에서 일하던 아서 하든은 멈춰버린 발효를 다시 시작하게 만드는 방법을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그는 죽어가는 발효통에 '끓인 효모 즙' 을 넣어보았습니다. 끓였으니 효소(단백질)는 다 익어서 파괴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죽은 즙을 넣자 발효가 다시 폭발적으로 일어났습니다.
"효소 말고, 열에 파괴되지 않는 '무언가'가 발효를 돕고 있다!"
하든은 이 미지의 물질을 분리하기 위해 '투석(Dialysis)' 실험을 했습니다. 효모 즙을 아주 미세한 구멍이 뚫린 반투막 주머니에 넣고 물에 담갔습니다.
- 주머니 안쪽: 덩치가 큰 단백질(효소)만 남았습니다. → 발효 능력 상실.
- 주머니 바깥쪽(물): 구멍을 통과한 작은 분자(조효소)들이 빠져나왔습니다. → 혼자서는 발효 못 함.
그런데 주머니 안쪽 내용물과 바깥쪽 물을 다시 섞어주자, 거짓말처럼 발효가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하든은 결론 내렸습니다.
"발효는 거대한 '치마아제(효소)'와 아주 작은 '코치마아제(조효소)'가 합체해야만 일어난다."
그는 또한 이 과정에서 '인산(Phosphate)' 이라는 미네랄이 필수적이라는 사실도 밝혀냈습니다. 인산이 설탕에 붙어야만 분해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 한스 폰 오일러-켈핀 : 조수의 정체를 밝히다, "NAD"
하든이 '조효소(Co-enzyme)'의 존재를 알렸다면, 스웨덴의 한스 폰 오일러-켈핀은 그 조효소가 도대체 어떻게 생긴 놈인지, 화학적 정체를 파고들었습니다.
그는 하든이 발견한 '코치마아제'를 순수하게 정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구조를 분석해 보니, 그것은 뉴클레오타이드라는 물질이 결합한 형태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것을 'NAD(Nicotinamide Adenine Dinucleotide)' 라고 부릅니다. NAD는 우리 몸의 에너지 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 물질입니다.
[ 조효소의 역할 ] 효소(Enzyme)가 요리사라면, 조효소(Coenzyme)는 요리사의 손에 들린 '칼' 이나 '국자' 와 같습니다. NAD는 전자를 싣고 나르는 트럭 역할을 합니다. 설탕이 분해될 때 나오는 전자를 NAD가 받아서 다른 곳으로 옮겨줘야만 발효가 계속 진행될 수 있습니다.
오일러-켈핀은 이 NAD 안에 '니아신(비타민 B3)' 성분이 들어있다는 것도 알아냈습니다. 우리가 비타민을 안 먹으면 왜 기운이 없고 아픈지 그 이유가 밝혀진 것입니다. 비타민이 바로 효소의 도구(조효소) 재료였기 때문입니다.
⚡️ 생명의 화학 공장, 지도를 그리다
두 사람의 발견은 생물학을 '효소학(Enzymology)' 의 단계로 끌어올렸습니다.
이전에는 "설탕이 알코올이 된다"는 결과만 알았지만, 이제는 그 중간 과정에 어떤 효소가 쓰이고, 어떤 조효소(비타민, 미네랄)가 필요한지 디테일한 지도를 그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 인산의 발견: 에너지를 저장하는 ATP의 발견으로 이어짐.
- 조효소의 발견: 비타민의 기능 규명 및 영양학의 발전.
- 발효 과정 규명: 해당 과정(Glycolysis) 등 대사 경로의 이해.
이들의 연구 덕분에 우리는 밥을 먹으면 소화가 되고 에너지가 생기는 복잡한 과정을 화학식으로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 노벨상 : 2대에 걸친 영광
1929년, 스웨덴 왕립과학원은 아서 하든과 한스 폰 오일러-켈핀에게 노벨 화학상을 수여합니다. 수상 이유는 "당류의 발효와 발효 효소에 관한 연구 공로" 였습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한스 폰 오일러-켈핀의 아들인 울프 폰 오일러(Ulf von Euler) 역시 1970년에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는 점입니다. (신경전달물질 노르아드레날린 발견) 아버지와 아들이 모두 노벨상을 받은 위대한 과학자 가문이 탄생한 것입니다.
📚 TMI : 화학자의 취미
1. 하든의 정원
아서 하든은 연구실 밖에서는 열정적인 정원사였습니다. 그는 런던 교외의 집에서 꽃과 나무를 가꾸며 스트레스를 풀었습니다. 그는 꼼꼼한 성격대로 정원도 아주 체계적으로 관리했다고 합니다.
2. 오일러-켈핀의 가문
오일러-켈핀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전설적인 수학자 레온하르트 오일러(Leonhard Euler) 의 먼 후손입니다. 수학적 천재성이 화학으로 발현된 케이스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1차 대전 중에는 독일군 장교로 복무하기도 했지만, 평생을 스웨덴에서 연구하며 보냈습니다.
3. 금주법 시대의 연구?
이들이 발효(술 만드는 과정)를 연구하던 1920년대는 미국에서 '금주법'이 시행되던 시기였습니다. 술을 만드는 원리가 밝혀질수록, 사람들은 더 효율적으로 밀주를 만드는 법을 알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과학의 발전은 때로 의도치 않은 곳에 쓰이기도 합니다.
🌏 맺음말 :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아서 하든과 한스 폰 오일러-켈핀의 발견은 우리에게 '협력' 의 중요성을 생화학적으로 증명해 줍니다.
거대한 효소 단백질도,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조효소(비타민, 미네랄)가 없으면 아무런 기능도 하지 못합니다. 요리사가 칼 없이 요리할 수 없듯이 말입니다.
우리 몸이 건강하게 돌아가는 것은, 거창한 유전자뿐만 아니라 우리가 매일 먹는 음식 속의 작은 비타민과 미네랄들이 효소의 손을 잡아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작은 도우미들의 위대한 힘을 발견한 두 과학자 덕분에, 우리는 생명이라는 복잡한 퍼즐을 맞추는 중요한 조각을 손에 넣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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