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삼겹살을 먹어도 배탈이 나지 않는 이유
우리가 기름진 고기를 먹을 때를 상상해 봅시다. 물과 기름은 섞이지 않습니다. 우리 몸속은 대부분 물로 되어 있는데, 기름진 음식이 들어오면 둥둥 떠다니기만 하고 소화가 되지 않아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고기를 먹고도 멀쩡하게 소화하고 에너지를 얻습니다. 그 비결은 바로 간에서 만들어져 쓸개(담낭)에 저장되었다가 나오는 녹황색 액체, '담즙(Bile)' 덕분입니다.
이 씁쓸한 액체는 일종의 천연 세제입니다. 지방 덩어리를 아주 잘게 쪼개서 물과 섞이게 만드는 '유화 작용' 을 하죠.
20세기 초, 화학자들은 이 담즙 속에 들어있는 '담즙산(Bile Acid)' 이라는 물질의 존재는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구조가 너무나 복잡해서 도저히 그림을 그릴 수가 없었습니다.
"탄소와 수소가 잔뜩 뭉쳐 있긴 한데, 도대체 어떤 모양으로 결합해 있길래 이런 기능을 하는 거지?"
오늘 소개할 1927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는 이 끈적하고 복잡한 물질에 무려 20년의 세월을 바친 독일의 화학자입니다.
가장 더럽고 냄새나는 물질에서 생명의 우아한 질서를 찾아내고, 심지어 두꺼비 독과 우리의 소화제가 사촌 지간임을 밝혀낸 하인리히 빌란트(Heinrich Wieland).
그가 밝혀낸 탄소 고리의 비밀은 훗날 '스테로이드(Steroid)' 라는 거대한 생화학 물질의 지도를 완성하는 결정적인 열쇠가 되었습니다.
📜 실험실의 끈기 : 담즙산의 미로를 헤매다
하인리히 빌란트는 1877년 독일 포르츠하임에서 태어났습니다. 화학자 집안에서 자란 그는 뮌헨 대학에서 유기화학을 연구했습니다.
1912년, 그는 당시 화학계의 난제였던 '담즙산' 연구에 뛰어들었습니다. 소의 쓸개에서 나온 이 물질은 다루기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습니다. 결정을 만들기도 어렵고, 분해하면 수만 가지 조각으로 부서지기 일쑤였습니다.
빌란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담즙산의 주성분인 '콜산(Cholic acid)' 을 산화시키고, 환원시키고, 쪼개고, 붙이는 과정을 수천 번 반복했습니다.
그는 마치 고고학자가 깨진 도자기 조각을 맞추듯, 탄소 원자 하나하나의 위치를 추적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거대한 탄소 고리 4개가 서로 맞물려 있는 독특한 구조를 찾아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사슬이 아니다. 4개의 링(Ring)이 결합한 거대한 골격이다!"
비록 그가 처음에 제안한 구조식은 나중에 약간 수정되었지만(1928년 윈다우스와 함께 수정), 그가 밝혀낸 '담즙산의 기본 골격' 은 현대 유기화학의 금자탑이 되었습니다. 이 골격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스테로이드 골격' 이라고 부르는 구조입니다.
🧐 콜레스테롤과의 연결 고리
빌란트의 연구가 위대한 이유는 담즙산 하나로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연구를 당시 또 다른 미스터리 물질이었던 '콜레스테롤(Cholesterol)' 과 연결했습니다.
"담즙산의 구조를 보니, 콜레스테롤과 너무나 비슷하다. 혹시 우리 몸이 콜레스테롤을 원료로 해서 담즙산을 만드는 게 아닐까?"
그의 직관은 정확했습니다. 빌란트 덕분에 과학자들은 [ 콜레스테롤 → 담즙산 → 지방 소화 ] 로 이어지는 인체의 대사 경로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화학식을 푼 것이 아니라, 우리 몸이 지방을 어떻게 처리하고 사용하는지에 대한 생리학적 해답을 제시한 것이었습니다.
🐸 두꺼비 독의 비밀 : 독과 약은 한 끗 차이
빌란트의 호기심은 엉뚱한 곳으로 튀기도 했습니다. 그는 유럽산 두꺼비의 피부에서 나오는 독인 '부포톡신(Bufotoxin)' 을 연구했습니다.
사람들은 "왜 하필 징그러운 두꺼비 독을 연구하냐"고 물었지만, 빌란트는 이 독의 화학 구조를 분석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놀랍게도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두꺼비 독의 구조가, 사람의 소화를 돕는 '담즙산' 과 거의 똑같았던 것입니다! 심지어 심장병 치료제로 쓰이는 '디지털리스(Digitalis, 식물 추출물)' 와도 형제처럼 닮아 있었습니다.
"자연은 놀라울 정도로 경제적이다. 똑같은 '스테로이드 골격'을 가지고, 곁가지 몇 개만 바꾸어서 하나는 소화제로, 하나는 심장약으로, 하나는 맹독으로 사용하고 있다."
빌란트의 이 발견은 '구조가 기능을 결정한다' 는 화학의 대원칙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되었습니다.
🏆 노벨상 : 나치 치하의 양심
1927년, 스웨덴 왕립과학원은 하인리히 빌란트에게 노벨 화학상을 수여합니다. 수상 이유는 "담즙산과 그 연관 물질들의 구조를 규명한 공로" 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위대함은 노벨상 메달보다, 그가 나치 독일의 암흑기 동안 보여준 '인간적인 품격' 에서 더욱 빛납니다.
1930년대, 히틀러가 집권하면서 독일의 대학들은 유대인 교수와 학생들을 쫓아내고 나치에 충성하도록 강요받았습니다. 많은 과학자가 나치에 동조하거나 침묵했습니다.
하지만 뮌헨 대학의 교수였던 빌란트는 달랐습니다. 그는 자신의 연구실에 유대인 제자들, 특히 백장미단(반나치 저항 운동)과 관련된 학생들을 숨겨주고 보호했습니다. 그는 이들을 '빌란트의 아이들' 이라 부르며, 게슈타포의 눈을 피해 학위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심지어 그는 나치식 경례(하일 히틀러)를 거부하고, 강의 시간에 대놓고 나치의 인종 차별 정책을 비판하는 용기를 보여주었습니다. 노벨상 수상자라는 그의 명성이 방패막이가 되어주었기에 망정이지, 자칫하면 수용소로 끌려갈 수도 있는 위험한 행동이었습니다.
📚 TMI : 가족이 모두 화학자
1. 화학자 가문
빌란트의 집안은 뼈대 굵은 화학자 가문입니다. 그의 아버지도 화학자였고, 그의 아들도 화학자가 되었습니다. 심지어 그의 사위는 1964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은 페오도르 리넨입니다. (장인어른은 담즙산 구조를 밝히고, 사위는 콜레스테롤 합성 과정을 밝혔으니, 온 가족이 지방 대사를 정복한 셈입니다.)
2. 실수와 수정
빌란트가 처음에 발표한 담즙산 구조식에는 약간의 오류가 있었습니다. 1928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인 아돌프 윈다우스와 함께 연구하면서 이 오류를 바로잡았는데, 빌란트는 자신의 실수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즉시 인정하고 수정했습니다. 과학에서 중요한 것은 무오류가 아니라, 진실을 향해 수정해 나가는 태도임을 보여주었습니다.
3. 나비 연구가
그는 평생 나비와 곤충의 색소도 연구했습니다. 배추흰나비의 날개 색소인 '프테린(Pterin)' 의 구조를 밝힌 것도 바로 빌란트입니다. 그는 자연계의 모든 화학 물질에 호기심을 가진 탐구자였습니다.
🌏 맺음말 : 복잡함 속에 숨겨진 단순함
하인리히 빌란트는 세상에서 가장 복잡해 보이는 물질 속에서 가장 단순하고 아름다운 골격을 찾아냈습니다.
그가 찾아낸 '스테로이드 골격' 은 우리 몸의 성호르몬, 스트레스 호르몬, 세포막, 그리고 소화제까지 모든 곳에 쓰이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광기의 시대에도 과학자의 양심을 잃지 않고 제자들을 지켜냈습니다. 복잡한 화학 구조를 풀어낸 명석한 두뇌와, 엄혹한 현실 속에서도 인간애를 잃지 않았던 따뜻한 심장. 하인리히 빌란트는 과학자가 갖춰야 할 지성과 인격을 모두 갖춘 거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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