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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_Novel/305_노벨화학상

[2000 노벨화학상] 앨런 히거, 앨런 맥디아미드, 시라카와 히데키 : 전기가 통하는 플라스틱, '전도성 고분자'의 우연한 발견

by 어셈블러 2025. 1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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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라스틱 전선이 가능할까?" 상식을 뒤집다

 

우리가 전선을 만질 때 감전되지 않는 이유는 구리선(금속)을 '플라스틱' 이나 고무가 감싸고 있기 때문입니다. 초등학생도 아는 상식입니다. "금속은 전기가 통하고(도체), 플라스틱은 전기가 안 통한다(부도체)."

이것은 20세기 중반까지 과학계의 절대적인 진리였습니다. 플라스틱(고분자)은 전자를 꽉 붙잡고 있어서 전기가 흐를 수 없는 구조였으니까요.

그런데 1970년대, 이 절대 진리가 한순간의 '어처구니없는 실수' 로 인해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실수로 촉매를 1,000배나 더 넣어버린 실패한 실험에서, 은색으로 반짝이는 이상한 플라스틱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오늘 소개할 2000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들은 이 우연한 실수를 놓치지 않고 파고들어, 금속처럼 전기가 흐르는 플라스틱인 '전도성 고분자(Conductive Polymer)' 를 탄생시킨 세 명의 과학자입니다.

실수를 기회로 만든 일본의 시라카와 히데키(Hideki Shirakawa). 그를 미국으로 초청해 연구를 주도한 화학자 앨런 맥디아미드(Alan G. MacDiarmid). 그리고 전기가 통하는 물리학적 원리를 규명한 물리학자 앨런 히거(Alan J. Heeger).

접을 수 있는 스마트폰 화면(OLED)부터 투명 태양전지까지, 현대 전자 산업의 지도를 바꾼 '실패의 미학' 속으로 들어가 봅니다.

 

📜 1000배의 실수 : 은색 플라스틱의 탄생

 

이야기는 1970년대 초, 일본 도쿄공업대학의 시라카와 히데키 교수의 실험실에서 시작됩니다. 그는 '폴리아세틸렌(Polyacetylene)' 이라는 평범한 검은색 가루 형태의 플라스틱을 합성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한 한국인 유학생(혹은 방문 연구원)이 실험을 돕다가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촉매의 양을 '밀리몰(mmol)' 단위로 넣어야 하는데, '몰(mol)' 단위로 잘못 보고 무려 1,000배나 더 많이 넣어버린 것입니다.

보통이라면 실험을 망쳤으니 버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반응 용기 안에 기이한 물체가 생겨나 있었습니다. 검은 가루 대신, 알루미늄 호일처럼 은색으로 반짝이는 얇은 막(필름) 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시라카와 교수는 깜짝 놀랐습니다.

"플라스틱인데 금속처럼 광택이 난다? 그렇다면 혹시 성질도 금속과 비슷하지 않을까?"

그는 이 '은색 폴리아세틸렌'을 버리지 않고 연구했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전기는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금속처럼 보이기만 할 뿐이었죠.

 

🧐 커피 타임의 만남 : "우리 한번 합쳐봅시다"

 

1976년, 시라카와는 도쿄에서 열린 학회에서 미국의 화학자 앨런 맥디아미드를 만났습니다. 커피를 마시며 잡담을 하던 중, 시라카와는 자신이 만든 '은색 플라스틱'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맥디아미드는 귀가 번쩍 뜨였습니다. 그는 당시 금속 성질을 가진 비금속 물질에 관심이 많았거든요. "그거 정말 흥미롭군요. 당장 우리 연구실로 와서 같이 연구합시다!"

시라카와는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UPenn)으로 건너갔습니다. 그곳에는 맥디아미드와 단짝인 물리학자 앨런 히거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시라카와: 은색 플라스틱을 만드는 기술 보유.
  • 맥디아미드: 화학적 변형(도핑) 전문가.
  • 히거: 전기적 특성을 측정하는 물리학자.

이 완벽한 삼각편대는 플라스틱에 전기를 흐르게 하기 위한 작전을 짰습니다.

 

⚡️ 도핑(Doping) : 전자의 고속도로를 뚫다

 

그들의 전략은 반도체 기술에서 빌려온 '도핑(Doping)' 이었습니다. 순수한 물질에 불순물을 살짝 섞어서 전기가 흐르게 하는 방법입니다.

1977년, 그들은 은색 폴리아세틸렌 필름에 '요오드(Iodine, I₂)' 증기를 쐬어주었습니다. 요오드는 전자를 뺏어가는 성질이 강한 물질입니다.

그러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폴리아세틸렌의 전기 전도도가 갑자기 10억 배나 치솟았습니다!

"전기가 통한다! 그것도 구리 전선만큼이나 잘 통한다!"

원리는 이렇습니다.

  1. 폴리아세틸렌은 탄소들이 단일결합-이중결합-단일결합 순서로 번갈아 나타나는 구조(공액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곳은 전자가 다닐 수 있는 '고속도로'입니다.
  2. 하지만 평소에는 차(전자)들이 꽉 막혀서 움직이지 못합니다.
  3. 여기에 요오드(불순물)를 넣으면, 요오드가 전자를 뺏어가면서 도로 중간중간에 '구멍(Hole)' 을 뚫어줍니다.
  4. 이 구멍을 통해 전자들이 쏜살같이 이동하며 전류가 흐르게 됩니다.

이 발견은 "플라스틱 = 부도체" 라는 100년 묵은 고정관념을 완전히 깨부수었습니다. 금속 없이도 전기를 통하게 할 수 있는 '합성 금속(Synthetic Metal)' 이 탄생한 것입니다.

 

✍️ 휘어지는 세상 : OLED와 태양전지

 

이들의 발견은 전자 산업의 패러다임을 바꿨습니다. 금속 전선은 무겁고 딱딱해서 구부리기 힘들지만, 플라스틱 전선은 가볍고 유연하며 값싸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기술은 오늘날 우리 주변 어디에나 있습니다.

  1. OLED 디스플레이: 스마트폰이나 TV 화면을 접거나 돌돌 말 수 있는 것은, 빛을 내는 소자가 딱딱한 유리가 아니라 유연한 '전도성 고분자' 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2. 투명 전극: 터치스크린이나 태양전지 표면에 바르는 투명하고 전기가 통하는 막도 이 기술의 후손입니다.
  3. 정전기 방지: 사진 필름이나 전자 부품 포장재에 전도성 플라스틱을 코팅해 정전기를 막습니다.

 

🏆 노벨상 : 화학과 물리학의 융합

 

2000년, 스웨덴 왕립과학원은 앨런 히거, 앨런 맥디아미드, 시라카와 히데키에게 노벨 화학상을 수여합니다. 수상 이유는 "전도성 고분자의 발견과 개발" 이었습니다.

이들의 수상은 학문 간 경계가 무너지고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화학자가 물질을 만들고(시라카와, 맥디아미드), 물리학자가 원리를 밝히는(히거) 완벽한 융합 연구의 승리였습니다.

시라카와 교수는 수상 소감에서 "실수는 실패가 아니라, 새로운 발견의 시작일 수 있다"며 젊은 과학자들을 격려했습니다.

 

📚 TMI : 실수와 언어의 장벽?

 

1. 1,000배 실수의 진실

시라카와의 실험실에서 촉매 농도 실수가 일어난 원인에 대해 재미있는 설이 있습니다. 일본인 조교가 외국인 연구원의 말을 잘못 알아들었다는 것입니다. "밀리몰(mmol)" 이라고 말했는데, "몰(mol)" 로 알아들었다는 것이죠. 'm'자 하나를 못 들은 덕분에 노벨상이 탄생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입니다. (물론 단순 실수였다는 게 정설입니다.)

2. 맥디아미드의 뉴질랜드 사랑

앨런 맥디아미드는 뉴질랜드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어릴 때 신문 배달과 우유 배달을 하며 학비를 벌었습니다. 그는 헌 옷과 헌 구두를 신고 다닐 정도로 검소했지만, 연구에 대한 열정만큼은 누구보다 뜨거웠습니다. 그는 노벨상 메달을 고국인 뉴질랜드 대학에 기증했습니다.

3. 노벨상 이후의 삶

시라카와 히데키는 노벨상 이후 대중 강연을 다니며 "자연을 관찰하는 힘"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어릴 때 곤충 채집과 라디오 조립을 좋아했던 것이 과학자가 된 계기였다고 말합니다.

 

🌏 맺음말 :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가 아니다, 발견의 어머니다

 

2000년 노벨상 수상자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우연을 놓치지 않는 눈" 의 중요성을 알려줍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실험이 실패하면 "망했다"며 쓰레기통에 버립니다. 하지만 시라카와는 그 실패작(은색 필름)을 신기하게 여겨 보관했고, 맥디아미드는 그 이야기를 그냥 흘려듣지 않았습니다.

'전기가 통하는 플라스틱' 이라는 모순적인 물질은, 그렇게 실수와 호기심, 그리고 열린 마음이 만나는 지점에서 태어났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접는 스마트폰을 펼칠 때, 혹은 가볍고 선명한 디스플레이를 볼 때, 50년 전 도쿄의 실험실에서 촉매를 쏟아붓고 당황했을 한 연구원의 실수를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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