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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_Novel/305_노벨화학상

[2001 노벨화학상] 윌리엄 놀즈, 노요리 료지, 배리 샤플리스 : 거울 나라의 분자를 정복하다, '비대칭 합성'의 혁명

by 어셈블러 2025. 1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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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탈리도마이드의 비극과 '왼손잡이 분자'

 

1950년대 후반, 유럽에서는 입덧 진정제인 '탈리도마이드' 를 복용한 임산부들이 팔다리가 짧거나 없는 기형아를 출산하는 끔찍한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원인은 바로 '카이랄성(Chirality)' 때문이었습니다. 탄소 화합물은 왼손과 오른손처럼, 구성 성분은 똑같지만 거울에 비친 듯 반대 모양을 가진 두 가지 형태(거울상 이성질체)가 존재합니다.

탈리도마이드의 경우,

  • 오른손 분자(R형): 입덧을 진정시키는 약효가 있습니다.
  • 왼손 분자(S형): 태아의 혈관 생성을 막아 기형을 유발하는 치명적인 독입니다.

문제는 당시의 화학 기술로는 약을 합성할 때 이 둘이 50:50으로 섞여 나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는 점입니다. 이를 '라세미 혼합물' 이라고 합니다.

"독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약만 만들 수는 없을까?" "효소처럼 한쪽 거울상만 골라서 합성하는 '인공 촉매' 를 만들 수는 없을까?"

오늘 소개할 2001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들은 이 불가능해 보이던 미션을 성공시켜, 현대 제약 산업의 안전핀을 마련한 세 명의 연금술사입니다.

파킨슨병 치료제 L-도파의 합성을 성공시킨 미국의 윌리엄 놀즈(William S. Knowles). 그 기술을 발전시켜 대량 생산의 길을 연 일본의 노요리 료지(Ryoji Noyori). 그리고 산화 반응을 통해 심장약과 항생제의 원료를 만들어낸 미국의 K. 배리 샤플리스(K. Barry Sharpless).

이들이 개발한 '비대칭 합성(Asymmetric Synthesis)' 기술 덕분에, 인류는 부작용 없는 안전한 약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 윌리엄 놀즈 : 파킨슨병 환자를 위한 집념

 

이야기의 시작은 1960년대, 미국의 몬산토(Monsanto) 연구소입니다. 연구원이었던 윌리엄 놀즈는 뇌 속 도파민 부족으로 생기는 파킨슨병 치료제인 'L-도파(L-DOPA)' 를 합성하려 했습니다.

L-도파 역시 거울상 이성질체가 있는데, 오직 'L-형' 만 약효가 있고 D-형은 부작용을 일으켰습니다. 놀즈는 생각했습니다. "수소를 첨가하는 반응(수소화 반응)을 할 때, 촉매 자체가 한쪽 방향으로만 비틀려 있다면(카이랄 촉매), 생성물도 한쪽 모양만 나오지 않을까?"

그는 1968년, 로듐(Rh)이라는 금속에 비대칭 리간드를 붙인 특수 촉매를 개발했습니다. 이 촉매를 사용하자 기적처럼 L-형 분자가 95% 이상 만들어졌습니다.

"이것은 효소 없이 인간의 손으로 '선택적인 합성'을 해낸 최초의 사건이다."

그의 발견 덕분에 L-도파의 공업적 대량 생산이 가능해졌고, 수많은 파킨슨병 환자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 노요리 료지 : 더 완벽하고, 더 강력하게

 

놀즈가 문을 열었다면, 일본 나고야 대학의 노요리 료지는 그 문을 활짝 젖혔습니다.

1980년, 노요리는 놀즈의 촉매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범용적인 촉매인 'BINAP(바이나프)-루테늄 복합체' 를 개발했습니다.

놀즈의 촉매는 특정한 조건에서만 작동했지만, 노요리의 촉매는 훨씬 다양한 물질에 적용할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효율이 엄청났습니다. 촉매 분자 하나가 수십만, 수백만 개의 반응물을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이 기술은 곧바로 산업 현장에 적용되어, 소염진통제(나프록센)나 항생제 같은 의약품뿐만 아니라, 멘톨 같은 향료를 만드는 데에도 쓰이게 되었습니다. 노요리 덕분에 '비대칭 합성'은 실험실의 신기한 마술이 아니라, 거대 화학 공장의 표준 공정이 되었습니다.

 

⚡️ 배리 샤플리스 : 산소를 붙이는 마법사

 

놀즈와 노요리가 '수소(H)' 를 붙이는 반응(수소화)에 집중했다면, 미국의 스크립스 연구소의 배리 샤플리스'산소(O)' 를 붙이는 반응(산화)에 도전했습니다.

특히 탄소 이중 결합 사이에 산소 원자 하나를 끼워 넣어 삼각형 고리를 만드는 '에폭시화 반응(Epoxidation)' 은 신약 개발에 필수적인 단계였습니다. 하지만 역시나 원치 않는 거울상이 섞여 나오는 게 문제였습니다.

1980년, 샤플리스는 티타늄(Ti)과 주석산(Tartrate)을 섞은 아주 간단한 촉매를 이용해, 원하는 방향으로만 산소를 딱 붙이는 '샤플리스 산화 반응' 을 개발했습니다.

"이 반응은 마치 '오른손잡이용 가위'와 같다. 왼손잡이 분자는 건드리지 않고, 오른손잡이 분자만 골라서 수술한다."

이 기술 덕분에 심장 질환 치료제(베타 차단제)와 위궤양 치료제 등 수많은 신약 후보 물질들을 정밀하게 설계하고 합성할 수 있게 되었습니 다.

 

🏆 노벨상 : 거울 나라의 질서를 세우다

 

2001년, 스웨덴 왕립과학원은 이 세 사람에게 노벨 화학상을 수여합니다.

  • 윌리엄 놀즈 & 노요리 료지: 카이랄 촉매를 이용한 수소화 반응 연구. (1/2)
  • 배리 샤플리스: 카이랄 촉매를 이용한 산화 반응 연구. (1/2)

노벨 위원회는 "이들의 연구는 기초 과학이 어떻게 응용되어 인류의 삶을 실질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완벽한 예시"라고 극찬했습니다.

이들의 발견 이전에는 신약을 개발할 때 50%의 찌꺼기(반대쪽 이성질체)를 걸러내느라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었지만, 이제는 처음부터 100% 순수한 약을 만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 TMI : 또 한 번의 노벨상

 

1. 샤플리스의 두 번째 노벨상

배리 샤플리스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2001년 노벨상 수상 이후, 마치 레고 블록을 끼우듯 쉽고 간편하게 분자를 결합하는 '클릭 화학(Click Chemistry)' 이라는 개념을 창시했습니다. 그리고 이 업적으로 2022년 노벨 화학상을 한 번 더 수상하게 됩니다. (프레데릭 생어에 이어 역대 두 번째 화학상 2관왕입니다.)

2. 몬산토의 월급쟁이 연구원

윌리엄 놀즈는 대학 교수가 아니라, 제초제와 종자로 유명한 다국적 기업 몬산토의 평범한 연구원이었습니다. 그는 정년퇴직 후 15년이 지나서야 노벨상을 받았습니다. 그는 "나는 은퇴하고 집에서 정원이나 가꾸고 있었는데, 갑자기 노벨상이라니!"라며 놀라워했습니다.

3. 노요리의 과학 교육

노요리 료지는 노벨상 수상 후 일본 이화학연구소(RIKEN) 이사장을 지내며 일본 과학계의 리더가 되었습니다. 그는 "자원 없는 일본이 살길은 오직 과학 기술뿐"이라며 인재 양성에 힘썼습니다.

 

🌏 맺음말 : 자연을 흉내 낸 인간의 손

 

효소는 수십억 년의 진화를 통해 완벽한 '비대칭 합성' 능력을 갖췄습니다. 효소의 손은 언제나 정확하게 왼쪽과 오른쪽을 구별합니다.

2001년 노벨상 수상자들은 금속과 유기물을 이용해, 이 효소의 '신의 손' 을 인공적으로 모방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들이 만든 촉매 덕분에 우리는 탈리도마이드의 악몽을 잊고, 부작용 걱정 없이 안전하게 약을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거울 나라의 미로 속에서 올바른 길을 찾아낸 그들의 지혜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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