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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_Novel/305_노벨화학상

[2002 노벨화학상] 존 펜, 다나카 고이치, 쿠르트 뷔트리히 : 단백질을 날게 하고, 물속에서 들여다보다

by 어셈블러 2025. 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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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끼리의 몸무게를 저울 없이 잴 수 있을까?

 

2000년대 초반, 인간 게놈 프로젝트가 완성되면서 우리는 생명의 설계도(DNA)를 손에 넣었습니다. 하지만 설계도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실제로 우리 몸에서 일하는 일꾼, 즉 '단백질(Protein)' 의 정체를 알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단백질 연구에는 두 가지 치명적인 난관이 있었습니다.

  1. "너무 무겁고 약하다": 단백질은 분자량이 수만, 수십만에 달하는 거인입니다. 기존의 저울(질량 분석기)에 올리려면 기체로 만들어야 하는데, 열을 가하면 단백질은 타버리거나 깨져버렸습니다. 마치 코끼리 몸무게를 재려고 들어 올리다가 코끼리가 다치는 격이었죠.
  2. "물 밖에서는 모양이 변한다": 단백질의 모양을 보려면 결정(Crystal)으로 만들어 엑스선을 찍어야 했습니다(1962년 노벨상). 하지만 우리 몸속 단백질은 물속에서 헤엄치고 있습니다. 억지로 얼리거나 굳히면 원래의 생생한 모습을 잃어버립니다.

"단백질을 깨뜨리지 않고 사뿐히 들어 올릴 수는 없을까?" "살아있는 것처럼 물속에 있는 단백질의 얼굴을 볼 수는 없을까?"

오늘 소개할 2002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들은 이 불가능한 미션을 해결한 세 명의 마법사입니다.

전기를 이용해 단백질을 구름처럼 띄운 미국의 원로 과학자 존 펜(John B. Fenn). 실수로 섞은 용액 덕분에 레이저로 단백질을 날려 보낸 일본의 평범한 회사원 다나카 고이치(Koichi Tanaka). 그리고 복잡한 신호 속에서 단백질의 3차원 지도를 그려낸 스위스의 쿠르트 뷔트리히(Kurt Wüthrich).

생물학의 난제를 화학과 물리학으로 해결하여, 신약 개발과 암 조기 진단의 길을 열어젖힌 그들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 존 펜 : 코끼리에 날개를 달다 (ESI)

 

먼저 '무게 재기' 의 문제를 해결한 사람은 예일 대학의 존 펜 교수였습니다. 질량 분석기는 물질을 이온(전기를 띤 상태)으로 만들어서 전기장 안에서 날려 보내야 합니다. 가벼우면 멀리 가고, 무거우면 덜 가는 원리죠. 하지만 단백질은 너무 커서 날지 못했습니다.

1988년, 70세가 넘은 노교수 존 펜은 기막힌 방법을 고안합니다.

"단백질을 물에 녹인 뒤, 아주 높은 전압을 걸어주면서 미세한 구멍으로 뿜어내자!"

이것은 마치 분무기로 물을 뿌리는 것과 비슷합니다.

  1. 단백질 용액이 고전압을 받아 '대전된 미세한 물방울' 로 뿜어져 나옵니다.
  2. 날아가는 동안 물(용매)은 증발해 사라집니다.
  3. 결국 전기를 띤 '단백질 알맹이' 만 남아서 둥실 떠다니게 됩니다.

이 기술을 '전기 분무 이온화(Electrospray Ionization, ESI)' 라고 합니다. 이 방법은 너무나 부드러워서(Soft), 거대한 단백질이 깨지지 않고 온전하게 이온이 되어 날아올랐습니다. 덕분에 과학자들은 아주 정밀하게 단백질의 무게를 잴 수 있게 되었습니다.

 

🧐 다나카 고이치 : "실수"가 만든 레이저 발사대 (MALDI)

 

비슷한 시기, 일본의 정밀기기 회사 '시마즈 제작소'의 젊은 주임 다나카 고이치는 다른 방식으로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레이저를 쏴서 단백질을 튀어 오르게 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레이저가 너무 강하면 단백질이 타버렸습니다. "완충제(Matrix)를 섞어서 충격을 흡수해야 해." 어느 날, 그는 실험 중에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코발트 분말' 에 섞어야 할 용매(아세톤)가 없어서, 실수로 '글리세린' 을 섞어버린 것입니다.

"아차, 망했다! 버려야지... 아니, 아까우니까 그냥 한번 레이저나 쏘아볼까?"

그는 망친 혼합물에 단백질을 섞고 레이저를 쐈습니다. 그러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단백질이 타지 않고, 코발트가 열을 흡수하고 글리세린이 완충 작용을 하여 단백질을 '통통' 튀어 오르게 만든 것입니다!

"날았다! 단백질이 깨지지 않고 날아올랐다!"

이것이 바로 '연성 레이저 탈착(Soft Laser Desorption)' 기술의 시초입니다. (학계에서는 이를 발전시켜 MALDI라고 부릅니다.) 다나카의 이 발견 덕분에 우리는 혈액 한 방울 속에 있는 암 표지자 단백질을 순식간에 검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 쿠르트 뷔트리히 : 물속의 단백질을 그리다 (NMR)

 

무게는 쟀는데, '모양' 은 어떻게 볼까요? 1991년 노벨상 수상자인 리하르트 에른스트가 발전시킨 'NMR(핵자기공명)' 은 작은 분자를 보는 데는 최고였지만, 단백질처럼 거대한 녀석들은 신호가 엉켜서 해독 불가였습니다.

스위스 연방 공대(ETH)의 쿠르트 뷔트리히는 이 엉킨 실타래를 푸는 수학적 기법을 개발했습니다.

그는 단백질을 굳혀서(결정) 엑스선을 찍는 대신, 물에 녹인 상태 그대로 NMR 장치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수만 개의 신호 점들 사이의 거리를 측정하여, '누가 누구 옆에 있는지' 를 하나하나 연결했습니다.

[ 뷔트리히의 마법 ] "1번 수소와 50번 수소가 가깝네? 그럼 단백질이 여기서 접혔구나." "10번과 20번은 멀구나. 그럼 여긴 펴져 있네."

그는 이 거리 정보들을 컴퓨터로 계산하여, 수용액 속에서 꼬물거리는 단백질의 '3차원 입체 구조' 를 완벽하게 재현해 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살아있는 세포 환경과 가장 비슷한 상태에서 단백질이 어떻게 생겼는지, 약물이 어떻게 결합하는지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 노벨상 : 샐러리맨의 신화

 

2002년, 스웨덴 왕립과학원은 이 세 사람에게 노벨 화학상을 수여합니다.

  • 존 펜 & 다나카 고이치: 질량 분석법(ESI, MALDI) 개발로 단백질의 무게를 정밀 측정한 공로. (1/2)
  • 쿠르트 뷔트리히: NMR을 이용해 용액 속 단백질의 3차원 구조를 규명한 공로. (1/2)

특히 다나카 고이치의 수상은 전 세계, 특히 일본을 발칵 뒤집어 놓았습니다. 그는 박사 학위도 없는 학사 출신이었고, 대학교수도 아닌 평범한 회사원이었기 때문입니다.

노벨상 위원회에서 전화가 왔을 때 그는 "동료들이 장난치는 줄 알았다"고 했고, 방송국에서는 그가 누군지 몰라 "다나카 교수를 찾습니다"라고 자막을 내보내는 해프닝도 있었습니다.

그는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우연한 실수(글리세린 혼합)를 놓치지 않는 끈기로 노벨상이라는 별을 따냈습니다. 그는 "나는 화학 전공자도 아니고(전기공학 전공), 그저 실패를 많이 했을 뿐이다"라며 겸손해했습니다.

 

📚 TMI : 노벨상 그 후

 

1. 다나카의 승진 거부

노벨상 수상 후 시마즈 제작소는 그를 이사급 임원으로 승진시키려 했지만, 다나카는 "나는 현장에서 실험하는 게 좋다"며 거절했습니다. 결국 회사는 그를 위해 '펠로우(Fellow)'라는 직책을 새로 만들어, 그가 평생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2. 존 펜의 특허 소송

존 펜은 예일 대학과 ESI 기술 특허를 두고 소송을 벌였습니다. 그는 대학이 자신의 발명 가치를 무시했다고 주장했고, 결국 승소하여 수백만 달러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학교와의 관계는 껄끄러워졌습니다.

3. 뷔트리히의 스포츠 사랑

뷔트리히는 만능 스포츠맨입니다. 젊은 시절에는 스키 강사 자격증까지 있었고, 축구 선수로도 뛰었다고 합니다. 그는 "스포츠에서 배운 집중력이 복잡한 NMR 신호를 해석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 맺음말 : 게놈을 넘어 단백질체(Proteome)로

 

2002년 노벨상 수상자들은 생명과학의 흐름을 'DNA(게놈)' 에서 '단백질(프로테옴)' 으로 옮겨놓았습니다.

설계도(DNA)가 아무리 중요해도, 실제로 건물을 짓고 움직이는 것은 일꾼(단백질)입니다. 존 펜과 다나카 고이치가 단백질의 신원을 확인해 주었고(무게), 쿠르트 뷔트리히가 단백질의 생김새를 그려주었습니다(구조).

이들이 만든 도구 덕분에 우리는 이제 암을 조기에 진단하고, 치매의 원인 물질을 찾으며, 바이러스의 모양에 딱 맞는 백신을 설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실수가 만든 기적,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집념이 만든 현대 의학의 쾌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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