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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_Novel/306_노벨평화상

[2020 노벨평화상] 세계식량계획(WFP) : 기아라는 팬데믹, 식량은 가장 강력한 백신이다

by 어셈블러 2025. 1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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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지구촌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코로나19(COVID-19) 바이러스가 국경을 넘고 도시를 봉쇄했습니다. 비행기가 멈추고 공장이 문을 닫았습니다.

선진국 사람들은 마스크와 백신을 걱정했지만, 분쟁 지역과 빈곤국의 사람들은 당장 오늘 저녁 먹을 빵을 걱정해야 했습니다. 봉쇄는 곧 '기아' (Hunger)를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그해 10월, 노벨 위원회는 전염병의 공포 속에서 잊혀져 가던, 그러나 가장 본질적인 인류의 위기를 환기시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수상자는 특정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로고에 옥수수와 쌀 이삭을 그려 넣은 유엔 산하 기구, 세계식량계획 (WFP, World Food Programme)이었습니다.

노벨 위원회는 선정 이유를 이렇게 밝혔습니다.

"WFP는 기아 퇴치를 위해 노력했고, 분쟁 지역의 평화 여건을 개선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특히 기아를 전쟁과 분쟁의 무기로 사용하는 것을 방지 하기 위해 주도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백신이 개발되기도 전이었던 2020년, 노벨 위원회는 전 세계에 이렇게 선언한 셈입니다.

"혼란스러운 이 세상에 평화를 가져올 최고의 백신은 바로 식량이다."

오늘은 밥 굶는 설움을 넘어, 밥이 어떻게 평화의 도구가 되는지를 보여준 WFP의 헌신적인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 밥은 평화다 : 기아와 전쟁의 악순환을 끊다

 

WFP는 1961년 설립된 이래, 전 세계 80여 개국에서 매년 약 1억 명에게 식량을 지원하는 세계 최대의 인도주의 기구입니다.

하지만 2020년의 수상은 단순히 "좋은 일을 많이 했다"는 격려 차원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식량 안보' 가 곧 '국제 안보' 라는 냉철한 현실 인식에서 비롯되었습니다.

 

⚔️ 굶주림이라는 무기

역사적으로 식량은 잔인한 전쟁 무기였습니다. 적을 굶겨 죽이기 위해 식량 보급로를 끊고, 농토를 불태우고, 우물에 독을 타는 행위. 이것은 총칼보다 더 무서운 살상 행위였습니다.

반대로, 굶주림은 전쟁을 부릅니다. 먹을 것이 없으면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총을 들고, 이웃을 약탈하고, 극단주의 테러 단체에 가담하게 됩니다.

WFP는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 가장 위험한 곳으로 들어갔습니다. 예멘의 내전 현장, 남수단의 늪지대, 시리아의 폐허 속으로 트럭을 몰고 들어갔습니다.

"빈 밥그릇이 있는 곳에 평화는 머물 수 없다."

WFP의 트럭이 도착해 아이들의 손에 영양죽이 쥐어지는 순간, 그곳은 전쟁터가 아니라 다시 사람이 사는 마을이 되었습니다.

 

✈️ 물류의 신(神) : 멈춘 세상을 연결하다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은 WFP에게 사상 최악의 도전이었습니다.

국경이 폐쇄되고 상업용 항공기 운항이 중단되면서, 전 세계의 구호 물류망이 마비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식량뿐만 아니라 마스크, 방호복, 의료 장비를 실어 나를 길이 막힌 것입니다.

이때 WFP가 나섰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거대한 물류 네트워크를 '글로벌 공공재' 로 내놓았습니다.

  • 유엔 인도주의 항공 서비스 (UNHAS): WFP는 멈춰선 민항기를 대신해 전 세계 130개국에 의료진과 구호 요원, 방역 물품을 실어 날랐습니다. 항공사들이 운항을 포기한 위험 지역까지 날아가는 WFP의 비행기는 2020년의 유일한 '생명줄' 이었습니다.

"WFP가 없었다면, 우리는 팬데믹이라는 폭풍 속에서 눈을 가린 채 싸워야 했을 것입니다." (세계보건기구 WHO)

 

🗣️ 데이비드 비즐리의 경고 : "성서적 규모의 기근"

 

당시 WFP를 이끌던 사무총장 데이비드 비즐리 (David Beasley)의 리더십도 빛을 발했습니다.

그는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 출신의 공화당원이었지만, WFP 수장이 된 후에는 정치색을 버리고 오직 "돈을 달라" 고 외치는 세일즈맨이 되었습니다.

2020년 4월, 그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전 세계 지도자들을 향해 섬뜩한 경고를 날렸습니다.

"우리는 지금 코로나19뿐만 아니라, '기아 팬데믹'이라는 이중고에 직면해 있습니다. 지금 당장 행동하지 않으면 우리는 몇 달 안에 '성서적 규모의 대기근'(Famines of biblical proportions)을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하루에 30만 명이 굶어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의 직설적이고 호소력 짙은 경고는 세계 지도자들의 지갑을 열게 만들었습니다. 덕분에 WFP는 역대 최대 규모의 모금액을 달성하여 최악의 시나리오를 막을 수 있었습니다.

 

🇰🇷 한국과 WFP : 가장 아름다운 증거

 

WFP의 노벨상 수상은 대한민국에게도 남다른 의미가 있었습니다. 한국은 WFP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졸업생' 이자 '증거' 였기 때문입니다.

1964년, WFP가 처음으로 한국 땅을 밟았을 때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습니다. 6.25 전쟁의 상처가 아물지 않았고, 보릿고개마다 사람들이 굶어 죽었습니다. WFP가 지원한 밀가루와 옥수수 가루는 한국 아이들의 급식이 되었고, 치수 사업(새마을 운동 등)의 노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반세기가 지난 2020년. 한국은 원조를 받던 나라(수혜국)에서 원조를 주는 나라(공여국)로 변신한 유일한 국가로서, WFP 집행이사국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데이비드 비즐리 사무총장은 기회가 될 때마다 한국을 언급했습니다.

"WFP가 꿈꾸는 미래가 가능한지 묻는다면, 한국을 보라. 그들은 해냈다. 제로 헝거(Zero Hunger)는 불가능한 꿈이 아니다."

 

🏆 2020년 노벨 평화상 : 연대만이 살길이다

 

노벨상 시상식은 코로나19 때문에 온라인으로 축소 진행되었습니다. 로마의 WFP 본부에서 메달을 받은 비즐리 사무총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상은 WFP 직원들만의 것이 아닙니다. 굶주림과 싸우며 쓰러져간, 그리고 지금도 굶주림 때문에 울고 있는 전 세계 6억 9천만 명의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식량은 평화로 가는 길입니다."

상금 1,000만 크로나(약 13억 원)는 전 세계 긴급 구호 식량 구매에 쓰였습니다.

 

🧐 TMI : WFP의 뒷이야기

 

파란 조끼 천사들의 숨겨진 이야기입니다.

  • 최고의 맛집?: 분쟁 지역의 종군 기자들이나 외교관들 사이에서 "WFP 구내식당이 맛집"이라는 소문이 있습니다. 전 세계 오지에서 식자재를 조달하고 요리하는 노하우가 엄청나기 때문이라는데, 사실은 척박한 환경에서 안전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 노란색 스마일: WFP의 트럭이나 텐트를 보면 로고와 함께 노란색 스마일 마크나 아이들의 그림이 자주 보입니다. 이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과 '미소'를 잃지 말자는 WFP의 정신을 보여줍니다.
  • 테러의 표적: 평화상 수상의 영광 뒤에는 피눈물도 있습니다. WFP 직원들은 무장 단체들의 표적이 되기도 하고, 지뢰를 밟거나 납치당하기도 합니다. 식량 트럭을 운전하다가 공격받아 숨지는 일도 다반사입니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밥을 배달합니다.

 

✍️ 마치며 : 밥은 하늘이다

 

2020년의 노벨 평화상은 우리에게 가장 기본적이고 오래된 진리를 다시 일깨워 주었습니다.

한국의 동학 사상가 해월 최시형 선생은 "밥이 곧 하늘이다(이천식천, 以天食天)" 라고 했습니다. 밥을 나누는 것은 생명을 나누는 것이고, 하늘을 모시는 것처럼 거룩한 일이라는 뜻입니다.

WFP는 2020년, 코로나19라는 어두운 하늘 아래서 전 세계 사람들에게 밥이라는 하늘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우리가 오늘 먹은 따뜻한 한 끼가 누군가에게는 평생의 소원일 수 있습니다. 그 소원을 지키기 위해 오늘도 험한 길을 달리는 푸른 트럭의 엔진 소리를 기억하며, 오늘의 포스트를 마칩니다.

다음 포스트에서는 2021년으로 넘어갑니다. "민주주의와 항구적인 평화의 전제 조건인 표현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공로로, 필리핀과 러시아의 언론인 마리아 레사드미트리 무라토프 가 수상했습니다. 가짜 뉴스와 독재 정권의 탄압에 맞서 펜을 들고 싸운 진짜 기자들의 이야기를 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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