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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0_New Novel/315_[NEW] 노벨생리의학상

[1916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 없음 : 전쟁이 삼켜버린 한 해 — 베르됭과 솜, 인류 역사상 가장 피로 물든 해

by 어셈블러 2026. 4.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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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12월, 스톡홀름.

두 번째 해였습니다. 또다시 노벨 생리의학상은 수여되지 않았습니다.

1915년이 전쟁의 충격 속에서 처음으로 맞이한 침묵이었다면, 1916년은 그 침묵이 굳어지는 해였습니다. 전선은 교착되었고, 전쟁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으며, 인류가 서로를 얼마나 효율적으로 파괴할 수 있는지에 대한 기록이 계속 경신되고 있었습니다.

노벨 위원회는 다시 한번 침묵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인류의 양심이 낼 수 있는 유일한 소리였습니다.


 

🌍 1916년,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했던 두 전투

 

1916년을 이해하는 두 개의 열쇠가 있습니다. 베르됭 전투솜 전투 입니다.

이 두 전투는 현대 전쟁사에서 가장 참혹한 이름들로 기억됩니다. 숫자로만 봐도 그 규모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베르됭 전투(Battle of Verdun) 는 1916년 2월 21일부터 12월 18일까지, 거의 10개월에 걸쳐 계속되었습니다. 독일군은 프랑스군의 사기를 꺾고 전쟁 의지를 소진시키기 위해 프랑스 북동부의 요새 도시 베르됭을 집중 공격했습니다.

독일 전략가들의 논리는 냉혹했습니다. 프랑스가 베르됭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프랑스의 명예와 직결된 상징적 요새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프랑스는 이 전투에서 이기기 위해 군대를 쏟아붓을 것이고, 독일은 그 병사들을 계속 죽이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전략의 목표가 영토 점령이 아니라 적군의 피를 뽑아내는 것 이었습니다.

열 달 동안, 양측 합쳐 70만 명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그 좁은 땅에 쏟아진 포탄이 수천만 발이었고, 폭격으로 지형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흙 속에 묻힌 주검이 너무 많아, 오늘날에도 베르됭 일대의 땅에서는 유골과 불발탄이 발굴됩니다.

솜 전투(Battle of the Somme) 는 1916년 7월 1일에 시작되었습니다. 영국군이 주도한 이 공세는, 베르됭에서 압박받고 있는 프랑스군을 돕기 위해 독일군의 주의를 분산시키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첫날 하루만에 영국군 사망자가 19,240명 이었습니다. 이것은 영국 군사 역사상 단 하루 최대 사망자 기록으로, 지금도 깨지지 않습니다. 전투는 11월까지 계속되었고, 양측 합쳐 약 100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솜 전투는 또 다른 이유로 역사에 기록됩니다. 이 전투에서 처음으로 탱크 가 전장에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1916년 9월 15일, 영국군은 49대의 탱크를 전투에 투입했습니다. 전선을 돌파하기 위한 새 무기였지만, 기계적 결함과 전술 부재로 인해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전쟁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신호였습니다.

1916년, 인류는 서로를 죽이기 위해 모든 과학 기술을 동원했습니다. 그 기술들은 바로 전날까지만 해도 인류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것들이었습니다.


 

🚫 노벨 위원회의 두 번째 침묵

 

1916년 노벨 위원회가 다시 상을 수여하지 않기로 한 결정은, 1915년보다 오히려 더 분명한 이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1915년에는 전쟁이 시작된 직후의 혼란이라는 맥락이 있었습니다. 어쩌면 곧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1916년은 달랐습니다. 전쟁은 장기화되었고,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1916년의 결정은 전쟁이 끝나지 않는 한 정상적인 노벨상 시상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었습니다.

당시 노벨 위원회가 직면한 딜레마를 생각해 봅시다. 노벨상은 국적을 불문하고 가장 뛰어난 업적에 주어야 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쟁 중인 상황에서는 이 원칙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만약 독일 과학자에게 상을 준다면? 연합국은 적국 과학자에게 상을 줬다며 노벨상의 중립성에 의문을 제기할 것입니다. 반대로 영국이나 프랑스 과학자에게 준다면? 동맹국은 편향된 시상이라고 반발할 것입니다.

스웨덴은 이 전쟁에서 중립을 지켰습니다. 노벨 위원회는 그 중립성을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지켜야 했습니다. 설령 그 대가가 시상 포기라 하더라도.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은 "인류에게 가장 큰 혜택을 준 발견"을 한 사람에게 상을 주라고 했습니다. 수백만 명이 서로를 죽이고 있는 상황에서, 어떤 과학적 발견이 그 기준을 충족한다고 선언할 수 있었을까요?

위원회는 다시 침묵을 선택했습니다. 상금은 이월되었습니다.


 

🕯️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살아있었던 의학 연구

 

그럼에도 불구하고, 1916년에도 의학은 완전히 멈추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전쟁은 어떤 의미에서 특정 의학 분야에 강력한 추진력을 제공했습니다.

마리 퀴리 는 프랑스에서 이동식 X선 차량을 만들어 전선의 부상병 진료를 돕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직접 운전하며 전선을 누빈 이 X선 차량들은 '쁘띠 퀴리(Petite Curie)'라 불렸습니다. 그녀의 딸 이렌도 어머니와 함께 전장 방사선 진단을 도왔습니다. X선 진단이 전시 의료에서 실용화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이었습니다.

아르센 다킨(Henry Dakin)알렉시 카렐 (1912년 노벨상 수상자)은 협력하여 '카렐-다킨 방법'이라는 상처 세척 치료법을 개발했습니다. 이 방법은 차아염소산나트륨 용액으로 상처를 지속적으로 세척하여 감염을 막는 것으로, 전선에서 급격히 확산되었습니다. 이전까지 전쟁 부상의 주요 사인이었던 가스 괴저와 패혈증 사망률이 이 방법으로 크게 줄었습니다.

독가스의 등장은 역설적으로 산소 치료호흡기 의학 의 발전을 촉진했습니다. 염소 가스와 포스겐 가스에 의한 폐 손상을 치료하기 위한 연구들이 이루어졌고, 이는 훗날 폐질환 치료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쥘 보르데 — 벨기에의 면역학자이자 1919년 노벨상 수상자 — 는 이 시기에도 브뤼셀 파스퇴르 연구소에서 면역학 연구를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독일에 점령당한 벨기에에서, 점령군의 감시 아래에서도 그는 연구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의 백일해균 연구와 보체 고정 반응 연구는 전쟁 중에도 조용히 성숙해가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이름은 1916년 노벨 수상자 명단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연구는 전쟁 이후 수천만 명의 생명을 구했습니다.


 

⚔️ 1916년, 전쟁이 과학에 남긴 상처

 

1916년이 과학에 미친 영향을 단순히 연구 중단으로만 설명할 수 없습니다. 더 깊고 구조적인 상처가 있었습니다.

세대의 단절 이 일어났습니다. 1914년에서 1918년 사이, 유럽 전역의 대학과 연구소에서 연구 활동을 해야 할 세대의 청년들이 전선으로 나갔습니다. 그 중 상당수가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이들이 이루었을 발견들, 만들었을 이론들은 영원히 사라졌습니다.

과학의 군사화 가 가속되었습니다. 독가스 개발에 참여한 과학자들은, 처음에는 애국심에서 혹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시작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과학이 대량 살상 무기 개발에 이용될 수 있다는 선례가 만들어졌습니다. 이 선례는 제2차 세계대전의 핵폭탄으로 이어지는 긴 그림자를 드리웠습니다.

국제 협력의 붕괴 가 과학 발전을 둔화시켰습니다. 20세기 초까지 유럽의 과학자들은 국경을 넘어 자유롭게 교류했습니다. 독일 실험실에서 연구하는 프랑스 학생, 영국 대학에서 강의하는 오스트리아 교수가 일상적인 일이었습니다. 전쟁은 이 연결망을 끊어놓았고, 국가주의적 과학이라는 기형적 개념을 강화했습니다.


 

📜 멈추지 않은 시계 — 침묵이 남긴 것들

 

1916년 노벨 생리의학상의 공백은 역사의 각주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류가 과학 발전을 위해 어떤 환경이 필요한지를 보여주는 구체적인 증거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공백이 갖는 역설적 측면입니다. 1916년 수여되지 않은 노벨상 상금은 후에 다른 수상자들에게 돌아갔습니다. 즉, 전쟁이 지연시킨 인정들은 결국 나중에 지급되었습니다. 과학의 가치는 전쟁으로 파괴될 수 없었습니다. 단지 지연될 뿐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1916년이 과학적으로 빈약한 해였기 때문에 노벨상이 수여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훌륭한 과학자들이 있었고, 가치 있는 연구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이라는 비정상적 상황이 그것들을 인정하는 절차를 마비시켰습니다.

이것은 제도가 얼마나 취약할 수 있는지를, 그리고 그 제도를 지키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줍니다.

과학이 번성하기 위해서는 평화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단순한 낭만이 아니라, 1916년 노벨상의 침묵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냉혹한 역사적 교훈입니다.


 

📝 피로 물든 해를 넘어 — 베르됭의 들판에서 배우는 것

 

1916년, 베르됭의 들판은 피로 가득했습니다. 솜 강변의 흙은 수십만 명의 젊은이들을 삼켰습니다.

그 해에 노벨 생리의학상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해에도 어딘가에서는 환자를 돌보는 의사들이 있었고, 현미경 앞에 앉은 연구자들이 있었고, 더 나은 치료법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전쟁이 모든 것을 파괴할 수는 없었습니다. 인간의 지식을 향한 욕구, 고통을 줄이고자 하는 의지는 포탄보다 더 질긴 것이었습니다.

1916년의 침묵은 패배가 아닙니다. 그것은 광기 앞에서 이성이 일시적으로 비켜선 것입니다. 그리고 이성은 돌아왔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다시 노벨상이 수여되었고, 그 이후 인류의 의학 역사는 더 찬란하게 빛났습니다.

베르됭은 지금 평화로운 들판입니다. 그 땅 아래에 잠든 수십만 명의 젊음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만이, 1916년의 노벨상 침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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