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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0_New Novel/315_[NEW] 노벨생리의학상

[1917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 없음 : 전쟁이 삼켜버린 한 해 — 러시아 혁명, 미국 참전, 그리고 총력전의 절정

by 어셈블러 2026. 4.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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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12월, 스톡홀름.

세 번째 해였습니다. 1915년, 1916년에 이어 또다시 노벨 생리의학상은 수여되지 않았습니다.

1917년은 제1차 세계대전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 해였습니다. 러시아에서는 혁명이 일어났고, 대서양 건너 미국이 마침내 참전을 선언했습니다. 전쟁은 진정한 의미의 세계대전이 되었습니다.

과학자들은 여전히 전선에 나가 있었고, 연구소는 여전히 비어 있었으며, 국가 간의 학술 교류는 여전히 단절된 상태였습니다.

노벨 위원회의 세 번째 침묵은, 어쩌면 가장 말이 많이 필요 없는 침묵이었습니다. 상황은 명백했습니다. 세상이 불타고 있는데, 우리가 무슨 축하를 할 수 있겠느냐고.


 

🌍 1917년, 세계는 어디로 가고 있었는가

 

1917년은 제1차 세계대전의 운명이 결정되어 가는 해였습니다. 동시에, 전쟁이 얼마나 많은 것을 파괴할 수 있는지를 다시 한번 증명한 해였습니다.

러시아 혁명 이 1917년의 가장 큰 사건이었습니다. 3월(구력 2월), 식량 부족과 전쟁 피로에 지친 러시아 민중이 봉기했고, 300년 로마노프 왕조가 무너졌습니다. 이어 11월(구력 10월),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가 권력을 잡았습니다. 러시아는 곧 독일과 단독 강화를 추진하게 됩니다.

미국의 참전 도 1917년의 결정적 사건이었습니다. 1917년 4월 6일, 미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연합국 편으로 참전했습니다.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이 미국 민간 선박을 침몰시킨 것이 직접적인 도화선이었습니다. 미국의 참전은 장기적으로 연합국의 승리를 확정짓는 요인이 되었지만, 1917년 당시에는 전선의 상황이 여전히 불투명했습니다.

잠수함 전쟁 이 대서양을 위험한 전장으로 만들었습니다. 독일은 영국으로 향하는 모든 선박을 무경고 침몰시키는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펼쳤습니다. 이 전술은 영국의 보급선을 끊으려는 의도였지만, 중립국 선박과 민간인 사망을 야기하여 국제적 분노를 샀습니다.

서부 전선에서는 파셴달 전투(Passchendaele) 로 알려진 제3차 이프르 전투가 7월부터 11월까지 계속되었습니다. 폭우와 포격으로 진흙탕이 된 전장에서 수십만 명이 쓰러졌습니다. 연합군은 약 8킬로미터를 전진하는 대가로 약 30만 명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같은 해, 프랑스군 내에서는 대규모 반란 이 일어났습니다. 니벨 공세의 처참한 실패에 충격받은 프랑스 병사들이 무의미한 공격 명령을 거부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한때 프랑스군 절반 이상의 사단에서 반란이 번졌습니다. 이 사태는 비밀에 부쳐졌지만, 프랑스군이 얼마나 한계에 다다랐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 노벨 위원회의 세 번째 침묵, 그 배경

 

1917년의 노벨 생리의학상 미수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해 노벨 위원회가 처해 있던 상황을 구체적으로 살펴야 합니다.

후보 추천 시스템의 마비 가 계속되었습니다. 노벨 위원회는 전 세계의 대학, 연구 기관, 학회 등에서 후보자를 추천받습니다. 그런데 전쟁이 3년째 계속되면서 이 추천 체계는 사실상 무너진 상태였습니다. 많은 기관들이 문을 닫았고, 살아남은 기관들도 전쟁 지원 업무에 매몰되어 있었습니다. 정상적인 추천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입니다.

심사위원들의 분열 도 문제였습니다. 노벨 생리의학상을 심사하는 카롤린스카 연구소의 위원들도 전쟁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았습니다. 어떤 나라의 과학자에게 상을 주느냐가 자동으로 정치적 입장 표명이 되는 상황에서, 합의를 이끌어내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노벨 재단의 재정적 어려움 도 한 요인이었습니다. 알프레드 노벨이 남긴 재산은 주로 유럽 각국의 투자로 운용되고 있었는데, 전쟁으로 인해 금융 시장이 불안정해지고 일부 투자가 위험에 처했습니다. 재단의 재정 상황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대규모 상금을 수여하는 것에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1917년에는 추가적인 복잡성이 있었습니다.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러시아의 과학계가 완전히 뒤집혔습니다. 러시아는 전통적으로 중요한 과학 인력과 연구 성과를 가진 나라였는데, 혁명과 내전으로 인해 그 모든 것이 불안정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미국의 참전은 과학 분야에서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제 미국의 과학자들도 전쟁 지원 연구에 동원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나마 전쟁의 직접적 영향에서 멀리 있던 미국이라는 과학 강국도 전쟁에 흡수되어 버린 것입니다.


 

🕯️ 잃어버린 영광 — 1917년의 잠재적 수상자들

 

비록 노벨상이 수여되지 않았지만, 1917년 당시에도 인류의 건강과 의학 발전에 기여한 위대한 연구들은 존재했습니다.

쥘 보르데(Jules Bordet) 는 이 시기 가장 강력한 노벨상 후보 중 하나였습니다. 벨기에의 세균학자이자 면역학자인 그는 독일 점령하의 브뤼셀에서 연구를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핵심 업적인 보체 고정 반응 발견은 이미 의학계에서 폭넓게 활용되고 있었고, 1906년에는 백일해균(보르데텔라 페르투시스)를 옥타브 쟁구와 함께 발견하는 성과도 있었습니다. 그는 결국 1919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습니다.

프레더릭 가울랜드 홉킨스(Frederick Gowland Hopkins) 도 이 시기 중요한 연구를 하고 있었습니다. 영국의 생화학자인 그는 동물 성장에 필수적인 미지의 영양소들, 즉 비타민의 존재를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제안한 인물이었습니다. 1906년에 발표한 그의 연구는 비타민의 개념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1929년에 노벨상을 받았습니다.

전쟁은 이처럼 이미 충분한 업적을 쌓은 과학자들의 수상을 지연시켰습니다. 인정받아야 할 발견들이 인정받지 못한 채, 전쟁의 먼지 속에 묻혀갔습니다.


 

🏥 독가스와 의학 — 1917년의 의료 현장

 

1917년의 전쟁터는 의학에게도 가혹한 실험실이었습니다.

독가스 전쟁이 더욱 격렬해졌습니다. 독일군은 기존의 염소 가스와 포스겐에 더해 겨자 가스(mustard gas, 이페리트) 를 처음 사용했습니다. 1917년 7월 이프르 전선에서 처음 사용된 이 물질은 이전의 독가스들과 근본적으로 달랐습니다. 살인적인 호흡기 손상 외에도 피부와 눈에 심각한 물집과 괴사를 일으켰으며, 증상이 몇 시간 후에 나타났기 때문에 병사들이 즉시 대피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겨자 가스로 인한 부상자들을 치료하는 것은 당시 의사들에게 전혀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이 물질이 체내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어떻게 치료해야 하는지를 연구하는 것이 급박한 과제가 되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겨자 가스에 대한 연구가 훗날 항암제 개발의 기초가 됩니다. 겨자 가스의 세포 독성 메커니즘이 암세포를 선택적으로 죽이는 약물로 발전한 것입니다.

적십자사 와 의료 부대들은 전례 없는 규모의 부상자들을 처리해야 했습니다. 1917년에는 전선이 장기화되면서 부상자 치료 체계가 어느 정도 정비되었습니다. 전방 야전 의무대에서 후방 병원으로 이어지는 의료 후송 시스템이 구축되었고, 수술 기술과 마취 기술이 실전에서 빠르게 발전했습니다.

스페인 독감 의 전조가 이미 1917년에 있었다는 연구도 있습니다. 전쟁 중 병사들의 면역력 저하와 집단 생활로 인한 전염병 확산 환경이 조성되고 있었습니다. 이듬해인 1918년에 대유행한 스페인 독감의 씨앗이 이미 1917년의 참호 속에서 자라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 1917년의 침묵과 역사의 아이러니

 

1917년은 과학과 역사의 아이러니로 가득합니다.

독가스에서 항암제로 — 1917년 이프르에서 처음 사용된 겨자 가스는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한 무기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이 물질을 연구한 화학자들이 발견한 세포 독성 메커니즘은, 20세기 중반에 최초의 화학요법 항암제인 질소 머스타드로 발전했습니다. 대량 학살을 위해 만들어진 독이 생명을 살리는 약으로 변한 것입니다.

전쟁 중의 위생 혁명 — 19세기까지 전쟁에서 죽는 병사의 상당수는 전투가 아닌 전염병으로 사망했습니다. 1917년의 전쟁은 이 역사적 패턴을 처음으로 역전시킨 전쟁이었습니다. 장티푸스 예방 접종, 개선된 위생 시스템, 의료 지원 체계 덕분에 전투로 인한 사망자가 질병으로 인한 사망자를 초과했습니다. 이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의학의 진보를 보여주는 지표이기도 했습니다.

이 모든 아이러니를 품은 채, 1917년 노벨 생리의학상은 수여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해 이루어진 연구들, 그 해 발전된 기술들, 그 해 목숨을 바쳐 환자를 돌본 의사들과 간호사들의 노력은 역사 속 어딘가에 남아 있습니다.


 

📝 1917년의 침묵이 전하는 마지막 메시지

 

1917년, 전쟁은 절정이었고 과학은 침묵했습니다.

그러나 침묵 속에서도 불씨는 살아있었습니다.

피 흘리는 전선의 병원에서 새로운 수술 기법이 시험되고 있었습니다. 독가스를 분석하는 화학자들은 그 독이 어떤 세포 메커니즘을 파괴하는지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혁명의 혼돈 속에서도 러시아의 생리학자들은 실험 노트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1917년의 침묵은 과학이 죽은 것이 아니라, 잠시 숨을 죽이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노벨상이 없었던 그 해에도, 과학은 계속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계속 아팠고, 그 고통을 줄이려는 사람들은 계속 노력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왔을 때, 그 침묵 속에서 자라나고 있던 것들이 세상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인류의 역사를 바꾸었습니다.

1917년의 노벨 생리의학상이 없었다는 사실은, 그 해 훌륭한 과학자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훌륭한 과학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오직, 전쟁이 얼마나 많은 것을 파괴하는가를 증명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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