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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0_New Novel/315_[NEW] 노벨생리의학상

[1918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 없음 : 전쟁이 삼켜버린 한 해 — 스페인 독감과 종전, 이중의 재앙 앞에서

by 어셈블러 2026. 4.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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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12월, 스톡홀름.

네 번째 해, 마지막 침묵이었습니다.

1915년부터 시작된 노벨 생리의학상의 공백은 1918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1918년의 침묵에는 이전과 다른 무게가 있었습니다.

이 해, 전쟁은 마침내 끝났습니다. 1918년 11월 11일, 파리 시간 오전 11시 11분, 총성이 멈췄습니다. 4년 4개월에 걸친 제1차 세계대전이 공식적으로 종결되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는 순간, 또 다른 재앙이 유럽을 덮치고 있었습니다. 스페인 독감 —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전염병 유행 중 하나가 1918년 내내, 그리고 그 이후로도 이어졌습니다. 전쟁이 죽인 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독감이 죽였습니다.

1918년, 인류는 전쟁이라는 인재(人災)와 독감이라는 천재(天災)를 동시에 견뎌야 했습니다. 그 이중의 재앙 앞에서, 노벨상은 다시 한번 침묵을 선택했습니다.


 

🌍 1918년 — 전쟁의 끝과 역병의 시작

 

1918년은 두 개의 얼굴을 가진 해였습니다. 하나는 전쟁의 끝, 다른 하나는 역병의 시작이었습니다.

전쟁의 마지막 해 는 여전히 피로 물들어 있었습니다. 봄에는 독일군의 마지막 대공세인 춘계 공세(Spring Offensive) 가 시작되었습니다. 독일은 미군이 완전히 배치되기 전에 서부 전선을 돌파하려 했습니다. 새로운 전술인 침투 전술을 사용하여 일시적으로 연합군 방어선을 돌파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파리가 독일 장거리 포의 사정권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여름이 되자 상황이 역전되었습니다. 대규모로 배치된 미군의 참전과 함께 연합군이 반격을 시작했습니다. 8월 8일, 영국군의 아미앵 공세가 시작되어 독일군이 대규모로 붕괴되기 시작했습니다.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이 날을 "독일군의 검은 날"이라 불렀습니다.

오스만 제국, 불가리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차례로 무너졌습니다. 11월에는 독일 내에서 혁명이 일어나 황제가 퇴위했습니다. 11월 11일,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났습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는 그 순간에도, 또 다른 전투가 진행 중이었습니다.

스페인 독감(Spanish Flu) 은 1918년 봄부터 이미 세계를 휩쓸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연구에 따르면 이 독감 바이러스는 H1N1 인플루엔자 A형이었으며, 기원지는 스페인이 아니라 미국 캔자스 주의 군 기지로 추정됩니다. '스페인 독감'이라는 이름은 전시 언론 통제를 받지 않던 스페인에서 이 질병에 대한 보도가 자유롭게 이루어진 것에서 비롯된 오해입니다.

이 독감은 세 번의 물결로 세계를 강타했습니다. 1918년 봄의 첫 번째 물결, 1918년 가을의 두 번째 물결(가장 치명적), 1919년 겨울의 세 번째 물결이었습니다.

특히 두 번째 물결은 전례 없이 치명적이었습니다. 평상시의 독감은 노인과 어린이에게 가장 위험합니다. 그런데 스페인 독감은 20-40대 젊고 건강한 성인에게 가장 높은 사망률을 보였습니다. 이것은 면역 시스템이 강한 사람일수록 바이러스에 대한 과잉 면역 반응(사이토카인 폭풍)이 더 심하게 일어났기 때문으로 현재 이해되고 있습니다.

1918년 한 해에만 전 세계 감염자는 5억 명 이상, 사망자는 2천만-5천만 명으로 추산됩니다. 어떤 추산은 1억 명까지도 봅니다. 이는 4년간의 세계대전 사망자(약 2천만 명)와 맞먹거나 그 이상입니다.


 

🚫 이중의 재앙 앞에서 선택된 침묵

 

1918년 노벨 생리의학상의 미수여는, 이전 세 해와는 다른 맥락을 가집니다.

전쟁의 끝 무렵과 종전 이후, 노벨 위원회는 시상을 재개할 수 있었을까요? 이론적으로는 가능했습니다. 휴전이 11월에 이루어졌으니, 12월 시상식을 위한 준비가 불가능하진 않았습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1918년 시상을 강행하는 것은 여러 이유에서 적절하지 않았습니다.

첫째, 전쟁이 끝났지만 혼란은 계속되었습니다. 휴전이 선언된 것은 11월이었지만, 평화 조약이 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유럽은 여전히 혼란스러웠습니다.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오스만 제국의 붕괴와 함께 새로운 국가들이 탄생하고 있었습니다. 동유럽에서는 내전과 혁명이 계속되었습니다.

둘째, 스페인 독감이 절정이었습니다. 1918년 가을은 스페인 독감 2차 유행의 정점이었습니다. 노르웨이, 스웨덴을 포함한 스칸디나비아 국가들도 독감의 영향권 안에 있었습니다. 시상식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것 자체가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셋째, 시상 준비를 위한 시스템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4년간 마비되어 있던 후보 추천과 심사 시스템을 불과 몇 달 안에 정상화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1919년에 수여된 노벨상들이 실질적으로는 1918년 이전의 업적들에 대한 것이었다는 사실이, 이 시스템 회복에 시간이 필요했음을 보여줍니다.

노벨 위원회는 다시 한번 신중한 선택을 했습니다. 서두르지 않고, 제대로 된 심사를 거쳐 합당한 수상자를 선정할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리기로 한 것입니다.


 

🕯️ 1918년의 잠재적 수상자 — 역사가 선택하지 못한 이름들

 

1918년에 수여되었을 법한 노벨 생리의학상 후보들을 떠올려 봅니다.

쥘 보르데 — 그는 1919년 노벨상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1918년에도 강력한 후보였을 것입니다. 그의 보체 고정 반응 발견과 백일해균 동정은 이미 의학계에서 광범위하게 활용되고 있었습니다.

아우구스트 크로그(August Krogh) — 덴마크의 생리학자로, 그는 1920년 노벨상을 받았습니다. 모세혈관의 능동적 조절 메커니즘에 관한 그의 연구는 1910년대에 완성되어 있었습니다.

파울 에를리히(Paul Ehrlich) — 1908년 노벨상을 받은 그는 이미 수상자였지만, 그의 화학요법 연구, 특히 매독 치료제 살바르산(606번째 화합물)의 개발은 공중 보건에 계속해서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습니다. 참고로 에를리히는 1915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기타사토 시바사부로 — 일본의 세균학자로 파상풍 항독소 개발과 페스트균 공동 발견 등 뛰어난 업적을 가졌음에도 끝내 노벨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스페인 독감 자체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이 1918년에 가장 절실한 연구를 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독감 바이러스의 정체는 1918년에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과학자들은 이것이 세균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더 작은 무언가에 의한 것인지조차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전자현미경이 발명된 것은 1930년대였고,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분리 동정된 것은 1933년이었습니다.

스페인 독감과 싸우고 있던 그 순간의 의사들과 과학자들은, 자신들이 맞서고 있는 적이 무엇인지조차 모른 채 싸웠습니다.


 

🏥 스페인 독감 — 전쟁보다 더 많은 생명을 앗아간 역병

 

스페인 독감이 의학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특별합니다. 그것은 단순한 전염병 유행이 아니라, 현대 바이러스학과 전염병학의 탄생을 촉발시킨 사건이었습니다.

스페인 독감의 특이한 점들을 당시 의사들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왜 젊고 건강한 사람들이 더 많이 죽는가? 왜 폐가 이처럼 빠르게 파괴되는가? 왜 이번 독감은 이전의 것들과 다른가?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이 나오기까지 수십 년이 걸렸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스페인 독감이 인플루엔자 A H1N1 바이러스에 의한 것이며, 면역 과잉 반응(사이토카인 폭풍)이 주요 사망 메커니즘 중 하나였음을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2005년에는 알래스카 영구 동토에 묻혀 있던 스페인 독감 희생자의 유골에서 바이러스 유전자를 복원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1918년의 스페인 독감은 비극이었지만, 그로부터 배운 것들이 현대 역학과 바이러스학의 기초를 만들었습니다. 전염병 확산 모델, 집단 면역의 개념, 바이러스 변이 추적 — 이 모든 현대적 도구들은 1918년의 경험에서 중요한 교훈을 얻었습니다.

2020년에 시작된 코로나19 팬데믹에 전 세계가 이처럼 조직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던 것도, 1918년 스페인 독감의 경험에서 비롯된 역학 지식과 공중 보건 체계 덕분이었습니다.


 

📜 네 번의 침묵이 끝나는 순간

 

1919년, 마침내 노벨 생리의학상이 다시 수여되었습니다. 수상자는 쥘 보르데 였습니다.

4년의 침묵이 끝났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상이 재개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인류가 전쟁이라는 광기에서 빠져나와, 다시 과학과 이성의 언어로 돌아왔다는 선언이었습니다.

1915년부터 1918년까지 4년간의 노벨 생리의학상 공백은, 오늘날 노벨상 역사에서 가장 긴 연속 미수여 기간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공백 동안 수여되지 않은 상금은 재단에 적립되어 이후 수상자들의 상금을 더욱 풍성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물질적인 상금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4년간 전쟁과 역병 속에서도 연구를 멈추지 않은 과학자들의 헌신이었습니다.


 

📝 1918년의 침묵, 그리고 그 이후

 

1918년은 전쟁의 끝이자 역병의 절정이었습니다.

그 이중의 재앙 앞에서 노벨 생리의학상은 네 번째로 침묵했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침묵이었습니다. 세상이 무너지는 소리 앞에서, 상을 수여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그러나 그 침묵 속에서도 과학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상처를 봉합한 외과 의사들의 손끝에서 새로운 기술이 탄생했습니다. 스페인 독감 환자 곁을 떠나지 않은 의사들과 간호사들의 헌신에서 전염병학의 씨앗이 뿌려졌습니다. 독가스의 메커니즘을 분석한 화학자들의 연구에서 훗날 항암제가 탄생했습니다.

전쟁이 과학을 죽일 수는 없었습니다. 그것은 단지 과학의 목소리를 일시적으로 침묵시켰을 뿐입니다.

1919년부터 다시 수여되기 시작한 노벨상들은, 그 침묵 속에서도 살아남은 과학의 불꽃들에 대한 뒤늦은 헌정이었습니다.

1918년의 마지막 침묵은, 인류가 전쟁과 역병을 함께 겪으며 배운 것들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묻습니다. 우리는 그 교훈을 기억하고 있는가? 평화는 당연한 것이 아니며, 과학의 번영에는 평화라는 조건이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않고 있는가?

1918년의 침묵은 여전히 그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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