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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0_New Novel/313_[NEW] 노벨화학상

[1917 노벨화학상] 수상자 없음 : 전쟁이 앗아간 과학의 시간

by 어셈블러 2026. 4.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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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12월, 스톡홀름.

또다시, 침묵이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의 네 번째 해. 유럽 전역의 참호와 전선에서는 여전히 수백만 명의 병사들이 피를 흘리고 있었습니다. 1917년은 전쟁사에서 가장 혼란스러운 해 중 하나였습니다. 2월에는 독일이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재개하여 대서양의 교역로를 차단했고, 4월에는 마침내 미국이 참전을 선언했습니다. 10월에는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 러시아가 전쟁에서 이탈하기 시작했으며, 서부 전선에서는 파스샹달 전투가 100일 이상 지속되며 50만 명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이런 세계에서 노벨위원회는 다시 한번 화학상 수상자를 선정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1916년에 이어 두 번째 연속 공백이었습니다.

두 해 연속으로 수상자가 없다는 것 — 이것은 단순한 심사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세계가 얼마나 깊이 무너져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였습니다.


 

📜 1917년의 세계 — 가장 어두운 해

 

1917년은 제1차 세계대전 전체를 통틀어서도 특히 처참한 해였습니다.

전쟁이 시작된 1914년만 해도 많은 사람들은 "크리스마스 전에는 끝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전선은 교착되었고, 전쟁은 끝을 알 수 없는 소모전으로 변해갔습니다. 1915년, 1916년을 거치면서 각국은 국가의 모든 자원 — 인적 자원, 물적 자원, 지적 자원을 포함하여 — 을 전쟁에 투입하는 '총력전' 체제로 전환해 갔습니다.

1917년 4월 6일, 미국이 참전했습니다. 이것은 전쟁의 판도를 결정적으로 바꾸는 사건이었습니다. 미국의 거대한 산업력과 인적 자원이 연합국 측에 합류하게 된 것입니다. 동시에, 미국의 과학자들도 전쟁 연구에 동원되기 시작했습니다. 세계의 과학계가 더욱 광범위하게 전쟁의 소용돌이에 빨려들어 갔습니다.

10월의 러시아 혁명은 또 다른 거대한 변화를 예고했습니다.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가 권력을 잡으면서 러시아는 사회주의 국가로의 변환을 시작했고, 이것은 이후 수십 년간 세계 정치와 과학계에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 1917년 화학계의 풍경

 

노벨상 수상자가 없었던 1917년에도, 세계의 화학 실험실에서는 전쟁의 그늘 아래 중요한 연구들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화학 무기의 진화 — 머스터드 가스의 등장

 

1917년 7월, 독일군은 벨기에 이프르 근처에서 새로운 화학 무기를 처음으로 사용했습니다. 바로 머스터드 가스 였습니다.

머스터드 가스의 화학명은 비스(2-클로로에틸)설파이드, C₄H₈Cl₂S. 겨자 씨앗 냄새와 비슷한 냄새가 나서 '머스터드 가스'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실제로는 기체보다 오일에 가까운 액체입니다. 이것이 특히 위험한 이유는 즉각적인 증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피부에 닿거나 흡입해도 처음에는 아무런 느낌이 없지만, 수 시간 후에 피부와 눈, 폐에 심각한 화상과 조직 손상을 일으킵니다.

이전의 염소 가스나 포스겐은 냄새가 즉각적으로 감지되어 병사들이 마스크를 쓸 수 있었지만, 머스터드 가스는 그것이 불가능했습니다. 이 새로운 무기의 등장으로 연합군은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1917년 7월부터 11월까지 이프르 지역에서만 약 14,000명이 머스터드 가스 피해를 입었습니다.

머스터드 가스의 이 참혹한 효과는 아이러니하게도, 훗날 암 치료의 기원이 됩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의학자들은 머스터드 가스와 유사한 화합물인 질소 머스터드가 빠르게 분열하는 세포를 죽인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것을 백혈병 치료에 적용했습니다. 이것이 현대 항암 화학요법(chemotherapy)의 출발점입니다. 죽음의 무기에서 생명을 구하는 약으로 — 화학의 양면성을 이보다 더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는 없을 것입니다.

 

하버-보슈 공정의 확장

 

전쟁이 계속되면서 독일의 암모니아 합성 생산 능력은 지속적으로 확대되었습니다. 1913년에 바스프(BASF)의 오파우 공장에서 시작된 하버-보슈 공정은 1917년에는 연간 수십만 톤의 암모니아를 생산할 수 있는 규모로 성장해 있었습니다.

이 암모니아는 두 가지 방향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는 질산으로 산화시켜 폭약 원료로 사용하는 것, 다른 하나는 비료로 사용하여 독일 내 식량 생산을 유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영국의 해상 봉쇄로 해외 원료 수입이 차단된 상황에서, 공기 중의 질소를 고정하여 암모니아를 만드는 하버-보슈 공정은 독일이 전쟁을 지속할 수 있게 해주는 핵심 기술이었습니다. 훗날 역사가들은 이 공정이 없었다면 독일은 1916년 이전에 이미 전쟁을 포기했을 것이라고 분석하기도 합니다.


 

🔬 수상 기회를 놓친 과학자들 — 1917년의 유력 후보들

 

1917년에 노벨화학상이 수여되었다면 누가 가장 유력한 후보였을까요?

 

발터 네른스트 — 다시 한번 주목받은 이름

 

열역학 제3법칙의 발견자 발터 네른스트는 1917년에도 여전히 유력한 후보였습니다. 그의 업적은 이미 화학계에서 충분히 인정받고 있었지만, 전쟁 중 그가 독일 군사 연구에 깊이 관여했다는 사실이 국제 과학계에서 그에 대한 평가를 복잡하게 만들었습니다.

실제로 네른스트는 이후 1920년에 노벨화학상을 수상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지 2년 후, 그의 열역학 연구에 대한 평가가 드디어 이루어진 것입니다.

 

프리드리히 베르기우스 — 고압 화학의 선구자

 

독일의 프리드리히 베르기우스는 1913년에 석탄을 수소화하여 액체 연료(석유)로 전환하는 방법을 개발했습니다. 고압 수소 환경에서 석탄을 처리하면 액체 탄화수소 혼합물이 생성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발견은 단기적으로는 전쟁에서의 연료 확보 문제와 연관되었습니다. 독일에는 풍부한 석탄이 있었지만 석유는 부족했습니다. 베르기우스의 기술은 이론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었습니다. 물론 당시에는 기술적·경제적 문제로 실용화에 한계가 있었지만, 이 아이디어는 훗날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의 합성 연료 생산 기술로 이어집니다.

베르기우스는 결국 1931년에 카를 보슈와 함께 노벨화학상을 공동 수상하게 됩니다.

 

프리드리히 파세르 — 합성 염료의 개척자

 

독일의 화학자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케쿨레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발전한 합성 염료 산업은 19세기 후반 독일 화학 산업의 핵심 동력이었습니다. 전쟁 전까지 독일은 전 세계 합성 염료 생산량의 약 80%를 차지했습니다.

전쟁이 시작되자 연합국들은 독일산 염료 수입이 차단되는 심각한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군복 제작에 필요한 염료마저 부족해지는 상황을 겪었습니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영국과 미국에서 독자적인 합성 화학 산업이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 전시 과학의 역설 — 파괴와 발견이 공존한 시대

 

전쟁 중의 과학은 역설적이게도 많은 기술적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이 혁신을 강제했기 때문입니다.

 

질소 고정 기술의 산업화

 

하버-보슈 공정이 1917년에 빠르게 확대된 것은 이미 언급했습니다. 그런데 이 기술의 진정한 의미는 전쟁이 끝난 후에 드러났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전시에 폭약 원료를 만들던 암모니아 합성 공장들은 비료 생산 시설로 전환되었습니다. 농업용 질소 비료의 대량 생산이 가능해지면서, 인류의 식량 생산량은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오늘날 지구상의 80억 명 인구 중 약 40~50%가 하버-보슈 공정으로 만들어진 질소 비료 덕분에 먹고 살 수 있다고 추산됩니다. 전쟁 무기를 위한 기술이 결국 인류를 먹여 살리는 기술로 전환된 것입니다.

 

독가스 대응 기술 — 방호 마스크의 진화

 

머스터드 가스를 비롯한 화학 무기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방호 장비 기술도 급격히 발전했습니다.

초기의 조잡한 천 마스크에서 시작하여, 1917년에는 활성탄을 이용한 필터 방식의 방독면이 개발되었습니다. 활성탄이 독성 가스 분자를 흡착할 수 있다는 원리를 이용한 것입니다. 이 기술은 이후 공기 정화 기술, 수처리 기술, 냉장고 필터 등 다양한 분야에 응용되었습니다.

 

군용 항공기 재료 — 알루미늄 합금의 발전

 

전쟁 중에는 항공기 기술도 급속히 발전했습니다. 초기의 나무와 천으로 만든 비행기에서 금속 구조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가볍고 강한 알루미늄 합금의 개발이 중요한 과제가 되었습니다.

독일의 알프레트 빌름이 1906년에 개발한 두랄루민(알루미늄-구리-마그네슘 합금)은 1917년에는 군용 항공기에 광범위하게 사용되었습니다. 이 합금 기술의 발전은 전쟁 후 민간 항공 산업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 과학자들의 전쟁 참여 — 각국의 사례들

 

전쟁 중 과학자들의 처지와 역할은 나라마다 달랐습니다.

 

독일의 경우 — 전쟁에 동원된 과학 엘리트

 

독일에서는 빌헬름 황제 연구소를 중심으로 최고의 과학자들이 전시 연구에 집중적으로 투입되었습니다. 하버, 네른스트, 한(Otto Hahn), 마이트너(Lise Meitner) 등이 독가스 연구에 참여했거나 그 주변에 있었습니다.

리제 마이트너는 나중에 핵분열을 발견하게 되는 물리화학자인데, 1917년에는 오토 한과 함께 방사성 원소 프로탁티늄을 발견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전쟁의 혼란 속에서도 기초 과학 연구를 이어가는 과학자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영국의 경우 — 과학의 실용적 동원

 

영국에서는 왕립학회를 중심으로 과학자들이 전쟁 관련 연구에 조직적으로 투입되었습니다. 폭약, 독가스 대응, 의료 기술, 항법 장치 개발 등 다양한 분야에서 과학자들이 활약했습니다.

물리화학자 윌리엄 포프는 머스터드 가스의 합성 방법을 분석하여 영국도 이 무기를 생산할 수 있게 하는 작업을 주도했습니다. 상대방의 무기를 분석하고 역설계하는 것도 전시 과학의 중요한 임무였습니다.

 

미국의 경우 — 늦은 참전, 빠른 동원

 

1917년 4월 참전한 미국은 곧바로 대규모 과학 동원 체제를 구축했습니다. 국립 연구 위원회(National Research Council)가 설립되어 민간 과학자들과 군사 연구를 연결하는 조정 기관 역할을 했습니다.

화학전 분야에서 미국은 에지우드 병기창(Edgewood Arsenal)을 중심으로 화학 무기 연구 및 생산 체계를 빠르게 구축했습니다. 미국의 합성 화학 산업이 독자적으로 발전하게 된 것도 이 시기였습니다.


 

🧐 전쟁이 바꿔놓은 화학의 지형

 

1917년이 끝날 무렵, 유럽의 화학 산업과 화학 연구의 지형은 전쟁 전과 크게 달라져 있었습니다.

전쟁 전 독일이 압도적으로 지배하던 화학 산업의 판도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영국, 프랑스, 미국에서 독자적인 화학 산업을 육성할 필요성이 분명해졌고, 각국 정부는 화학 연구와 산업에 대한 지원을 대폭 늘렸습니다.

특히 미국에서는 독일 화학 기업들의 특허가 전시에 몰수되어 미국 기업들에게 라이선스가 주어졌습니다. 이것이 미국 합성 화학 산업 발전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습니다. 20세기 중반 이후 미국이 세계 화학 산업을 이끌게 되는 것은 이 시기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국제 과학 협력 네트워크의 붕괴

 

1917년, 교전국 사이의 과학 협력은 완전히 불가능했습니다. 독일 과학자와 영국 과학자가 학술지를 공유하거나 학술대회에서 만나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 되었습니다.

이 단절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오랫동안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전후에 설립된 국제 연구 협의회는 독일을 비롯한 동맹국 과학자들을 배제한 채로 출발했습니다. 192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겨우 국제 과학 협력이 부분적으로 복원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단절의 비용은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서로 다른 나라의 과학자들이 독립적으로 비슷한 연구를 진행하면서 중복 연구가 발생했고, 서로의 발견에서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사라졌습니다. 과학 지식의 축적 속도가 느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 1917년의 물리학 — 화학의 이웃에서 일어난 혁명

 

1917년, 화학의 이웃 분야인 물리학에서는 중요한 발전이 있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일반 상대성 이론의 우주론적 함의를 탐구하는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그는 우주가 정적이어야 한다는 당시의 믿음에 맞추기 위해 우주 상수를 도입했는데, 이것은 나중에 그가 "일생 최대의 실수"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이 논문은 현대 우주론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또한 1917년에 아인슈타인은 유도 방출의 개념을 발표했습니다 — 나중에 레이저 기술의 이론적 토대가 되는 바로 그 개념입니다. 전쟁의 포성이 울리는 가운데서도, 순수 기초 과학 연구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물리학과 화학은 이 시기에 점점 더 깊이 연결되어 갔습니다. 양자론의 발전이 원자와 분자의 구조를 이해하는 새로운 틀을 제공했고, 이것은 화학 결합의 본질을 설명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 꽃을 피우게 되는 양자 화학의 씨앗이 전쟁의 혼란 속에서도 조용히 싹트고 있었던 것입니다.


 

🌱 1917년이 남긴 교훈 — 과학과 평화의 불가분한 관계

 

1917년의 노벨화학상 공백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 걸까요?

어쩌면 그것은 과학의 진보가 평화로운 국제 협력 없이는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일지 모릅니다. 실험실 안에서 혼자 발견을 이룰 수도 있지만, 그 발견이 검증되고 확산되고 더 큰 발견으로 이어지려면 열린 학술 환경이 필요합니다. 국경을 넘는 지식의 흐름이 필요합니다.

전쟁은 그 흐름을 막았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두 해 연속 노벨화학상 공백이라는 형태로 기록되었습니다.

또한 1917년은, 과학 기술이 전쟁 수행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렸음을 알리는 해이기도 했습니다. 화학 무기, 항공기, 잠수함, 기관총 — 이 모든 것들이 새로운 수준의 기술적 전쟁의 도구들이었습니다.

과학과 기술이 전쟁에 동원되면 어떤 결과가 빚어지는지를 1917년은 처참하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교훈은, 이후 핵무기가 등장하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더욱 참혹한 형태로 반복됩니다.

1917년 스톡홀름의 침묵 — 그것은 단순히 노벨위원회의 결정이 아니라, 전쟁으로 인해 인류의 지적 발전이 멈추어 서는 순간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리고 그 기록은, 평화가 과학의 가장 중요한 조건임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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