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9년 12월, 스톡홀름.
전쟁은 끝났습니다. 그러나 평화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1918년 11월 11일, 제1차 세계대전은 공식적으로 종전을 맞이했습니다. 4년 3개월에 걸친 전쟁은 약 1,7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유럽 전역을 폐허로 만들었습니다. 1919년은 바야흐로 그 상처를 수습하고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는 해였습니다. 파리 강화 회의가 열렸고, 6월에는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독일은 막대한 배상금과 영토 손실, 군비 제한을 수락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노벨위원회는 이 해에도 화학상 수상자를 내지 않기로 했습니다. 전쟁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세 번째 공백이 이어진 것입니다.
왜였을까요? 전쟁은 끝났는데, 왜 노벨화학상은 1919년에도 침묵을 지켰을까요?
그 이유를 이해하려면, 1919년의 과학계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었는지를 들여다봐야 합니다.
📜 베르사유 이후의 혼란 — 1919년의 세계
전쟁이 끝났다고 해서 곧바로 정상이 찾아오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1919년은 또 다른 의미에서 혼란의 해였습니다.
베르사유 조약과 분노한 독일
1919년 6월 28일, 파리 베르사유 궁전에서 제1차 세계대전의 공식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독일은 이 조약에 의해 영토의 약 13%, 인구의 약 10%, 그리고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상실했습니다. 독일군은 10만 명으로 제한되었고, 라인란트는 비무장 지대로 설정되었습니다.
독일 국민들은 이 조약을 '굴욕적인 딕타트(강제 명령)'로 받아들였습니다. 전장에서 패한 것이 아니라 등뒤에서 찔렸다는 '배후 중상 전설'이 퍼졌습니다. 이 분노와 굴욕감이 훗날 나치즘의 온상이 되었다는 것은 역사가들이 일반적으로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독일 과학자들과 연합국 과학자들이 노벨상을 통해 국제 협력을 재개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매우 복잡한 문제였습니다.
전 세계를 휩쓴 스페인 독감
1918년 말부터 시작된 스페인 독감 팬데믹은 1919년에도 맹위를 떨치고 있었습니다. 이 독감은 세계적으로 5,000만~1억 명을 사망시킨 것으로 추산되는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전염병 중 하나였습니다. 전쟁으로 면역력이 약해진 유럽에서 특히 많은 희생자가 나왔습니다.
스페인 독감은 과학계도 비켜가지 않았습니다. 많은 과학자들이 독감에 걸려 사망하거나 건강을 잃었고, 연구 활동도 크게 위축되었습니다.
러시아 혁명과 내전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이후 러시아는 극심한 내전 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적군(볼셰비키)과 백군(반볼셰비키), 그리고 여기에 개입한 영국, 프랑스, 미국, 일본 군대까지 — 러시아 전역이 혼란 속에 있었습니다.
러시아 과학계도 이 혼란에서 자유롭지 않았습니다. 많은 과학자들이 망명했고, 연구 기관들은 제대로 운영되지 못했습니다. 러시아가 세계 과학계의 정상적인 구성원으로 복귀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 과학계의 상처 — 전후 분열과 배제
1919년의 노벨화학상 공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또 다른 요인은, 전후 국제 과학계의 심각한 분열 상태였습니다.
국제 연구 협의회의 탄생과 독일 배제
1919년, 연합국 과학자들을 중심으로 국제 연구 협의회(International Research Council, IRC)가 창설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조직은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등 전쟁에서 패배한 동맹국 과학자들의 가입을 명시적으로 금지했습니다.
전쟁 중에 적국 과학자들이 전쟁 수행에 협력했다는 이유였습니다. 특히 독일의 93인 선언 — 독일 지식인들이 독일군의 전쟁 행위를 지지했던 그 선언 — 에 서명한 과학자들에 대한 반감이 컸습니다.
이 결정은 국제 과학 협력의 원칙에 심각한 타격을 가했습니다. 과학은 국경을 초월한 보편적 지식 추구라는 이상이, 전쟁의 상처와 정치적 보복의 논리 앞에서 무너진 것입니다.
노벨위원회는 이런 상황에서 수상자 선정이 어렵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전쟁 중 독일의 독가스 무기 개발에 참여했던 과학자들의 업적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독일 과학자를 수상자로 선정하면 연합국의 반발을 살 것이고, 연합국 과학자만 선정하면 과학상의 중립성을 훼손하는 것이었습니다.
1918년 하버에게 상을 준 결정이 이미 큰 논란을 불러일으킨 터였습니다. 노벨위원회는 1919년에는 아예 수상자를 선정하지 않음으로써, 더 이상의 논쟁을 피하기로 한 것이 아닐까 추측됩니다.
학술지와 국제 학술 교류의 분단
전쟁 중에 교전국 간의 학술 교류가 단절된 것은 이미 언급했습니다. 그런데 이 단절은 전쟁이 끝난 1919년에도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독일 학술지에 게재된 논문들이 영국이나 프랑스의 주요 도서관에서 접근하기 어려웠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각국은 적성국의 특허를 몰수하고 자국의 기술 기밀을 더욱 철저하게 관리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전 세계적으로 어떤 연구가 어느 수준에 이르렀는지를 노벨위원회가 공정하게 평가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 1919년의 화학 — 어두움 속의 씨앗들
수상자가 없었던 1919년에도, 화학의 역사에서 의미 있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러더퍼드의 원자핵 분열 실험
1919년 물리학자 어니스트 러더퍼드는 역사적인 실험을 수행했습니다. 알파 입자로 질소 원자핵을 폭격했더니 산소와 수소(양성자)가 생성되었습니다.
N¹⁴ + α → O¹⁷ + H¹
이것은 인류 최초로 한 원소를 다른 원소로 변환시킨 실험이었습니다. 고대 연금술사들의 꿈이었던 원소 변환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것이 처음으로 실험적으로 증명된 순간이었습니다.
이 발견은 화학보다 물리학에 속하는 것이었지만, 원소의 본질에 대한 이해를 근본적으로 바꿔놓는 것이었습니다. 원자는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조건에서 다른 원소로 변환될 수 있다 — 이 인식은 훗날 핵화학과 방사화학의 발전으로 이어졌습니다.
프라우트 가설의 재조명
19세기 초 영국의 의사 윌리엄 프라우트는 모든 원소의 원자량이 수소 원자량의 정수배라는 가설을 제안한 바 있었습니다. 이 가설은 이후 더 정밀한 원자량 측정 결과들이 나오면서 반박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1919년 프랜시스 애스턴이 질량분광기를 완성하고 동위원소 연구를 본격화하면서, 프라우트 가설이 새로운 형태로 부활하게 됩니다. 각 동위원소의 질량은 사실상 수소 원자량의 정수배에 가깝다는 것 — 이것은 1922년 애스턴의 노벨화학상으로 이어집니다.
콜로이드 화학의 발전
독일의 리하르트 지그몬디는 1912년에 개발한 울트라현미경으로 콜로이드 입자의 브라운 운동을 관찰하고 콜로이드 화학의 기초를 다져가고 있었습니다. 지그몬디는 1925년에 노벨화학상을 수상하게 되는데, 1919년은 그 업적이 서서히 국제적으로 인정받아가던 시기였습니다.
🌍 1919년에 주목받았을 과학자들
1919년에 노벨화학상이 수여되었다면 누가 가장 유력한 후보였을까요?
프리츠 프레글 — 미량 분석의 개척자
오스트리아의 프리츠 프레글은 유기 화합물의 미량 분석 방법을 발전시키고 있었습니다. 기존의 분석법이 수 그램의 시료를 필요로 했다면, 프레글은 불과 수 밀리그램으로 탄소, 수소, 질소 함량을 정밀하게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했습니다.
이 기술은 당시 급속히 발전하고 있던 유기화학 연구에서 혁명적인 의미를 가졌습니다. 천연물 화학, 의약품 합성, 생화학 등 모든 분야에서 미량의 시료만으로 물질의 조성을 분석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프레글은 1923년에 노벨화학상을 수상했습니다. 만약 전쟁의 혼란이 없었다면 1919년에 받을 수도 있었을 업적입니다.
리하르트 지그몬디 — 울트라현미경의 발명자
독일 태생의 리하르트 지그몬디는 카를 지이스 광학 회사의 하인리히 지데나투프와 함께 1902년에 울트라현미경을 개발했습니다. 이 현미경은 가시광선의 파장보다 작은 콜로이드 입자를 간접적으로 관찰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콜로이드 — 우유, 혈액, 젤라틴, 안개 같은 물질들 — 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울트라현미경은 결정적인 도구였습니다. 지그몬디는 콜로이드가 균일한 혼합물이 아니라 입자가 용매에 분산된 불균질한 계라는 것을 울트라현미경으로 직접 관찰함으로써 증명했습니다.
지그몬디는 1925년에 이 업적으로 노벨화학상을 수상했습니다.
발터 네른스트 — 세 번째 유력 후보
열역학 제3법칙의 발견자 네른스트는 1916년, 1917년에 이어 1919년에도 여전히 강력한 수상 후보였습니다. 그의 업적은 이미 충분히 성숙했고, 화학계에서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쟁 중 독일 군사 연구에 참여했다는 이력, 그리고 독가스 무기 개발에 관여했다는 사실이 여전히 노벨위원회의 고민거리였을 것입니다.
결국 네른스트는 1920년에 노벨화학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1919년이 끝나고 겨우 한 해 뒤의 일이었습니다.
✍️ 전쟁이 과학에 남긴 상처 — 깊고 오래된 흔적
1916년, 1917년, 1919년 — 세 해의 노벨화학상 공백은 단순히 세 해의 빈칸이 아닙니다.
그것은 제1차 세계대전이 인류의 지적 발전에 남긴 흔적의 일부입니다. 전쟁은 수백만 명의 인명을 앗아갔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과학자들의 연구를 멈추게 하고, 국제 과학 협력의 네트워크를 끊어놓고, 과학 지식을 살상 무기 개발에 동원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1919년에도 과학계는 그 상처를 안고 있었습니다. 승전국과 패전국 사이의 반감, 독가스 무기 개발자들에 대한 윤리적 논쟁, 국제 학술 교류의 부분적 단절 — 이 모든 것들이 1919년의 노벨화학상을 다시 한번 침묵하게 만들었습니다.
재건의 시작
그러나 1919년은 절망만의 해가 아니었습니다. 전쟁의 잿더미 위에서, 과학자들은 서서히 연구를 재개하고 있었습니다.
파괴된 실험실들이 재건되었고, 군사 연구에 동원되었던 과학자들이 기초 연구로 돌아왔습니다. 새로운 세대의 학생들이 다시 대학 실험실을 채우기 시작했습니다.
1920년부터는 노벨화학상도 다시 정상적으로 수여되기 시작했습니다. 네른스트, 소디, 애스턴, 프레글 — 1920년대 초의 노벨화학상 수상자들은 전쟁 기간 동안 미뤄졌던 인정이 한꺼번에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평화의 중요성
1919년의 공백은 우리에게 평화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줍니다.
과학은 평화로운 시대에 꽃을 피웁니다. 국경을 초월한 자유로운 지식의 교류, 개방적인 학술 공동체, 그리고 연구자들이 전쟁이나 박해의 두려움 없이 순수하게 지적 탐구에 몰두할 수 있는 환경 — 이것들이 과학 발전의 진정한 토양입니다.
전쟁은 그 토양을 황폐화시킵니다. 그리고 그 황폐화의 흔적이 1916년, 1917년, 1919년 세 해의 노벨화학상 공백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 번째 침묵, 1919년 — 그것은 전쟁이 앗아간 과학의 시간에 대한 마지막 기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화학의 시간은 다시 흘러갔습니다.
🌱 1920년대를 향한 기대 — 화학의 재탄생
1919년이 끝나갈 무렵, 화학계에는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었습니다.
전쟁 중에 집중적으로 발전한 공업 화학 — 폭약, 염료, 합성 연료, 비료 — 의 기술들이 평화로운 목적으로 전환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암모니아 합성 공장들이 비료 생산 시설로 바뀌어갔고, 염료 화학 기술이 의약품 합성에 응용되기 시작했습니다.
물리화학과 구조화학 분야에서는 원자와 분자의 세계를 이해하는 새로운 도구들이 등장하고 있었습니다. X선 결정학, 질량분광기, 초원심분리기 — 이 기술들이 1920년대에 화학 연구를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릴 것이었습니다.
생화학 분야에서는 효소, 비타민, 호르몬에 대한 이해가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었습니다. 생명 현상의 화학적 기반을 밝히려는 시도가 본격화되면서, 생화학은 독립적인 학문 분야로 자리잡아갔습니다.
1919년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습니다. 전쟁의 상처를 안고 있으면서도, 인류는 다시 지식의 탑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재건의 역사는, 1920년 노벨화학상 — 발터 네른스트의 수상 — 과 함께 새로운 장을 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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