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1년 12월 10일, 스톡홀름.
노벨 물리학상 시상식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해 노벨위원회는 수상자를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두 가지였습니다. 노벨위원회가 내세운 공식적 이유는 그해 후보들 중 노벨의 유언 — 전 해 동안 인류에 가장 큰 혜택을 준 발견이나 발명 — 에 완전히 부합하는 후보를 찾기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뒤에는 1931년 세계의 풍경이 있었습니다.
침묵한 시상식장 뒤편에서, 세계는 사상 최악의 경제적 혼돈 속에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물리학자들은 원자의 가장 깊숙한 층을 들여다보는 도구들을 벼리고 있었습니다. 노벨상이 없었던 그 해가, 역설적으로 물리학의 혁명이 가장 격렬하게 익어가던 시기였습니다.
📜 파트 1. 대공황의 절정 — 세계가 무너지다
1929년 10월 29일, 검은 화요일.
미국 뉴욕 증권거래소가 붕괴했습니다. 주가가 폭락하고, 은행들이 쓰러지고, 기업들이 문을 닫았습니다. 그 충격파가 대서양을 건너 유럽으로 밀려왔습니다.
1931년은 대공황이 가장 깊어진 해였습니다. 미국 실업률이 약 17%를 넘어섰습니다. 독일에서는 실업자 수가 600만 명에 달했습니다. 영국, 프랑스, 일본 — 주요 산업국가들이 모두 심각한 경기침체에 빠졌습니다.
그해 5월, 오스트리아의 크레디트안슈탈트 은행이 파산했습니다. 중유럽에서 가장 큰 은행의 붕괴는 연쇄 반응을 일으켰습니다. 독일 은행들이 뒤이어 쓰러졌고, 영국은 금본위제를 포기했습니다. 금융 시스템이 글로벌하게 연결된 세계에서, 위기는 연쇄 핵분열처럼 퍼져나갔습니다.
농촌에서는 곡물 가격이 폭락했습니다. 농민들이 빚을 갚지 못했습니다. 은행이 농장을 압류했습니다. 도시에서는 공장이 멈추고 노동자들이 거리로 나왔습니다. 미국에서 실직한 사람들이 공황 전에 멀쩡히 회사에 다니던 화이트칼라 직원들이 수프 배급 줄에 서는 장면이 일상이 되었습니다.
독일에서는 경제적 파국이 정치적 극단주의의 온상이 되었습니다.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당이 1930년 선거에서 원내 2당으로 부상했습니다. 공산당도 세력을 키웠습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민주주의는 경제 위기 앞에서 허약하게 흔들렸습니다. 세계는 전쟁의 씨앗이 뿌려지는 것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과학계도 이 경제 위기에서 자유롭지 않았습니다. 대학과 연구소의 예산이 삭감되었습니다. 연구비가 줄었습니다. 독일의 명문 연구소들이 위기를 맞았습니다. 유럽을 주름잡던 물리학의 중심지들이 점점 재정 압박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물리학자들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경제가 무너지는 한쪽에서, 우주의 가장 작은 단위를 이해하는 작업이 조용히 계속되었습니다. 어쩌면 세계가 혼돈에 빠져들수록, 자연의 근본 법칙을 탐구하는 것이 물리학자들에게 남은 가장 순수한 피난처였을지도 모릅니다.
📜 파트 2. 노벨위원회가 1931년을 비워둔 진짜 이유
노벨 물리학상의 역사를 살펴보면, 수상이 없는 해는 드물지 않습니다. 1916년, 1931년, 1934년, 그리고 1940~1942년. 이 빈 해들은 모두 공통점이 있습니다. 세계가 격변하던 시기이거나, 노벨위원회가 특정 수상을 한 해 더 숙고한 때입니다.
1931년의 공백에는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 양자역학의 주요 창시자들 — 하이젠베르크, 슈뢰딩거, 디랙 — 은 모두 1931년에 수상하기에는 아직 발견이 너무 최근이었습니다. 하이젠베르크의 행렬 역학은 1925년, 슈뢰딩거의 파동 방정식은 1926년, 디랙의 방정식은 1928년에 나왔습니다. 노벨위원회는 충분히 검증된 발견에 상을 주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특히 이렇게 혁명적인 이론들은 물리학 공동체가 수용하고 검증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실제로 하이젠베르크는 1932년 물리학상을 받았고, 슈뢰딩거와 디랙은 1933년 공동 수상했습니다. 연속으로 수상한 것으로 보아, 1931년 시상이 없었던 것은 이들의 업적을 한 해 더 검토할 시간을 벌기 위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둘째, 노벨위원회의 내부 논쟁이 있었습니다. 양자역학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 누구에게 가장 큰 공을 돌릴 것인지에 대한 견해 차이가 있었습니다. 행렬 역학의 하이젠베르크, 파동 역학의 슈뢰딩거, 통합 이론의 디랙, 그리고 행렬 역학을 수학적으로 완성한 보른 — 누가 더 근본적인 기여를 했는지에 대한 논쟁은 쉽게 결론나지 않았습니다.
막스 보른은 1954년에야 노벨상을 받았습니다. 하이젠베르크와 함께 행렬 역학을 완성한 그가 왜 20년 넘게 기다려야 했는지는 노벨상 역사의 수수께끼 중 하나입니다.
셋째, 대공황으로 인한 노벨재단의 재정 압박도 일부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노벨상 상금의 원천인 알프레드 노벨의 유산이 주로 주식과 채권에 투자되어 있었는데, 대공황으로 인해 이 투자 자산의 가치가 하락했습니다. 이것이 노벨위원회의 결정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수 있습니다.
📜 파트 3. 1931년 물리학 — 수상 없음, 하지만 혁명은 진행 중
노벨상이 없었던 해라고 해서 물리학이 멈춘 것은 아니었습니다. 1931년은 양자역학의 수학적 토대가 완성되어 가던 시기이자, 핵물리학의 새로운 장이 열리기 직전이었습니다.
1926~1927년 슈뢰딩거와 하이젠베르크가 각각 파동 역학과 행렬 역학을 발표하고, 디랙이 이들을 통합하는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1930년 디랙은 기념비적인 교과서 '양자역학의 원리'를 출판했습니다. 이 책은 이후 수십 년간 양자역학의 표준 교과서로 자리 잡았습니다.
1931년에는 이 이론적 토대 위에서 다양한 응용과 검증 연구들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분자의 에너지 준위, 금속의 전기 전도성, 화학 결합의 본질 — 양자역학이 화학과 물질 과학을 새롭게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폰 노이만은 1931년경 양자역학의 수학적 토대를 힐베르트 공간 이론으로 엄밀하게 정립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그의 책 '양자역학의 수학적 기초'는 1932년 출판되었습니다. 이 작업 덕분에 양자역학은 물리학의 직관적 아이디어에서 엄밀한 수학적 이론으로 변모했습니다.
디랙의 방정식과 반물질의 예언
1928년 폴 디랙은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을 통합한 디랙 방정식을 발표했습니다. 이 방정식은 전자의 운동을 상대론적으로 기술했고, 자연스럽게 전자의 스핀을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이 방정식에는 이상한 해가 있었습니다. 음의 에너지 상태.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해석이 필요했습니다.
처음에 디랙은 이 음의 에너지 상태를 '디랙 바다'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려 했습니다. 음의 에너지 상태가 모두 전자로 가득 차 있다고 가정하고, 거기서 전자가 빠져나오면 마치 양의 전하를 가진 것처럼 보이는 구멍이 생긴다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 그는 이 구멍이 양성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맞지 않았습니다. 양성자는 전자보다 질량이 약 1836배 큰데, 디랙 방정식의 대칭성은 이 구멍이 전자와 똑같은 질량을 가져야 함을 요구했습니다.
디랙은 1931년 이것이 전자와 같은 질량을 가지지만 반대 전하를 가진 입자 — 즉 반전자 — 의 존재를 의미한다고 예측했습니다. 이 입자는 자연에서 아직 발견된 적이 없었습니다.
이 예측은 1932년 칼 앤더슨이 우주선 실험에서 양전자를 발견하면서 확인되었습니다. 반물질의 최초 이론적 예측이 1931년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순간은 물리학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인류가 처음으로 순수한 수학적 추론으로 새로운 물질의 존재를 예측하고, 그것이 실험으로 확인된 사례였습니다. 이후 소립자물리학에서 새로운 입자를 먼저 이론으로 예측하고 나중에 실험으로 발견하는 패턴이 반복되었습니다. 힉스 보손은 1964년에 예측되었고 2012년에 발견되었습니다. 모두 디랙이 1931년 열어놓은 방법론의 계보입니다.
중성자 발견의 전야
1930~31년경, 독일의 발터 보테와 허버트 베커가 베릴륨에 알파 입자를 쏘았을 때 매우 투과력이 강한 방사선이 나온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이것을 에너지가 높은 감마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프랑스의 이렌 퀴리와 프레데리크 졸리오도 이 방사선을 연구했습니다. 이 방사선을 파라핀에 쏘면 양성자들이 튀어나왔습니다. 그들도 여전히 고에너지 감마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에너지 계산이 맞지 않았습니다. 감마선이 양성자를 그렇게 튀어나오게 하려면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했는데, 베릴륨 실험에서 나오는 방사선의 에너지로는 설명이 되지 않았습니다.
케임브리지의 제임스 채드윅은 이 실험 결과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스승 러더퍼드가 1920년에 제안한 가설 — 원자핵 안에 전하가 없는 무거운 입자가 있을 것이라는 — 을 기억했습니다.
1932년 채드윅은 체계적인 실험을 통해 이것이 사실 질량이 양성자와 비슷한 전하 없는 새로운 입자라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그것이 중성자였습니다.
중성자 발견의 직전 단계가 1931년에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보테와 베커의 실험, 졸리오-퀴리의 추가 실험 — 모두 1931년에 진행된 것들이었습니다. 채드윅이 이 단서들을 모아 중성자를 발견하기까지 불과 1년이 남아있었습니다.
파울리의 뉴트리노 가설
1930년 12월, 볼프강 파울리는 편지를 한 통 썼습니다. 방사성 붕괴 연구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베타 붕괴에서 에너지 보존 법칙을 지키는 방법을 제안했습니다.
베타 붕괴에서 방출되는 전자의 에너지가 연속 분포를 보인다는 것이 당시의 수수께끼였습니다. 에너지 보존 법칙을 적용하면, 방출되는 전자는 항상 같은 에너지를 가져야 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전자의 에너지가 0에서 최대값까지 연속적으로 분포했습니다.
파울리는 이것이 검출되지 않는 새로운 입자 — 나중에 뉴트리노라고 불리게 될 것 — 가 함께 방출되기 때문이라고 제안했습니다. 이 입자는 전하가 없고 질량이 거의 없어서 검출이 극히 어려웠습니다.
이 아이디어는 1931년에도 물리학자들 사이에서 논의되고 있었습니다. 뉴트리노의 실험적 발견은 1956년에야 이루어졌지만, 그 씨앗은 1930~31년에 뿌려진 것이었습니다.
📜 파트 4. 물리학의 지도가 바뀌고 있었다
1931년 당시 세계 물리학의 중심은 어디였을까요?
전통적인 중심은 유럽이었습니다. 영국 케임브리지의 캐번디시 연구소, 독일 괴팅겐 대학교, 덴마크 코펜하겐의 보어 연구소, 독일 뮌헨 대학교, 독일 함부르크 대학교 — 이 곳들이 물리학의 핵심 허브였습니다.
닐스 보어의 코펜하겐은 특별한 위치였습니다. 하이젠베르크, 디랙, 파울리, 크라머르스 — 당시 최고의 이론 물리학자들이 코펜하겐을 방문하고 토론했습니다. 코펜하겐 해석이라는 이름 자체가 양자역학의 철학적 기반이 거기서 형성되었음을 말해줍니다.
괴팅겐도 핵심 중의 핵심이었습니다. 막스 보른,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파스쿠알 조르당이 행렬 역학을 완성한 곳입니다. 독일 수학의 전통과 물리학이 결합한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1931년부터 이 지형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나치즘의 부상이 독일 학계에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했습니다. 유대계 물리학자들이 불안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본격적인 탄압은 시작되지 않았지만, 분위기는 달라지고 있었습니다.
2년 뒤인 1933년 히틀러가 집권하면서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유대계 과학자 대탈출이 시작됩니다. 막스 보른,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레오 실라르드, 에드워드 텔러, 제임스 프랑크, 빅터 바이스코프, 엔리코 페르미 — 수십 명의 최고 물리학자들이 미국으로 향했습니다. 세계 물리학의 중심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동하는 거대한 전환이 시작되는 전야가 1931년이었습니다.
📜 파트 5. 1931년의 과학적 지평 — 원자와 핵의 세계
1931년이라는 해를 물리학사의 지도 위에 정확히 놓아보면,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전환점에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전 10년, 즉 1921~1930년은 양자역학의 탄생과 정립의 시기였습니다. 드 브로이의 물질파, 하이젠베르크의 행렬 역학, 슈뢰딩거의 파동 방정식, 디랙의 상대론적 양자역학, 파울리의 배타 원리, 보른의 확률 해석 — 이 모두가 불과 10년 사이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1932~1939년은 핵물리학의 황금기입니다. 중성자 발견, 양전자 발견, 핵분열 발견, 사이클로트론 발명, 중성자 충격 실험 — 이 모두가 연이어 나왔습니다.
1931년은 정확히 이 두 시대 사이의 경첩에 해당합니다. 양자역학이 완성되고, 핵물리학이 폭발하기 직전의 순간. 노벨위원회가 그해를 비워둔 것은, 어쩌면 이 두 혁명 사이에서 어느 쪽에 상을 줄지 판단을 보류한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대공황의 한복판에서, 정치적 극단주의가 자라나는 시대에, 물리학자들은 조용히 원자의 비밀을 풀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하는 일의 의미를 그들 자신도 완전히 알지 못하면서.
중성자를 발견하면 핵폭탄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반물질을 예측하면 PET 스캐너로 암을 진단할 수 있다는 것을 — 그 누구도 아직 알지 못했습니다.
📜 파트 6. 양자역학이 바꾼 세계관 — 철학적 혁명
1931년 물리학에서 일어나고 있던 일들은 단순히 기술적 진보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 자체의 혁명이었습니다.
뉴턴 이후 250년간 물리학은 결정론의 세계였습니다. 모든 것에는 원인이 있고, 원인을 알면 결과를 예측할 수 있습니다. 라플라스의 악마 — 모든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알면 우주의 과거와 미래를 완벽하게 알 수 있다는 개념 — 이 지배적인 세계관이었습니다.
양자역학은 이것을 정면으로 뒤집었습니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는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히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슈뢰딩거의 파동함수는 입자의 위치를 확률적으로만 기술합니다. 보른의 해석은 파동함수의 제곱이 측정값의 확률을 준다고 합니다.
이것은 측정 기술의 한계가 아닙니다. 아무리 기술이 발달해도 이 불확정성을 없앨 수 없습니다. 자연 자체가 확률적으로 작동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신은 주사위를 굴리지 않는다"는 유명한 말이 이 시기에 나왔습니다. 그는 평생 양자역학의 확률적 해석에 반대했고, 더 깊은 결정론적 이론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후의 실험들은 자연이 정말로 비결정론적임을 거듭 확인했습니다. 1931년에는 아직 이 논쟁이 한창이었지만, 방향은 이미 정해지고 있었습니다.
인간은 3천 년간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의 본질을 오해하고 있었다는 것, 자연의 밑바닥에는 확률과 불확정성이 있다는 것 — 이 인식의 전환이 1920년대부터 1930년대에 걸쳐 완성되고 있었습니다.
📜 파트 7. 마무리 — 침묵도 역사다
1931년 노벨 물리학상이 수여되지 않았다는 것은 역사의 한 빈칸입니다.
하지만 그 빈칸을 채우는 것들은 충분히 있었습니다. 디랙의 반물질 예언, 중성자 발견의 직전 단계, 양자역학의 수학적 완성, 뉴트리노 가설, 핵물리학의 새로운 실험들.
세계가 경제적 혼란 속에 있었지만, 물리학자들은 원자의 세계를 이해하는 작업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노벨상이 없었던 그 해에도.
대공황의 파도가 세계를 휩쓸고, 정치의 어둠이 유럽을 덮어가는 동안, 독일의 괴팅겐에서, 영국의 케임브리지에서, 덴마크의 코펜하겐에서 과학자들은 칠판 앞에 서있었습니다. 그들이 쓴 방정식들이 세상을 바꿀 것임을 알면서, 혹은 알지 못하면서.
1931년의 침묵은 다음 해의 폭발적인 수상으로 이어졌습니다. 1932년과 1933년은 양자역학의 창시자들이 연이어 노벨상을 받는 시기가 됩니다. 하이젠베르크, 슈뢰딩거, 디랙. 그리고 그 이후로 채드윅, 헤스, 앤더슨, 페르미, 로렌스가 이어집니다. 핵물리학의 황금기가 노벨상의 역사에서도 황금기로 기록됩니다.
그 모든 것의 전야가 1931년이었습니다.
상이 없는 해도, 역사의 일부입니다. 어쩌면 가장 긴장된 숨을 고르던 순간이었습니다. 폭풍 직전의 고요처럼.
📜 파트 8. 노벨상을 받지 못한 물리학자들 — 1931년의 그림자
노벨 물리학상이 주어지지 않은 1931년을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마땅히 받았어야 했지만 받지 못한 사람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막스 보른은 하이젠베르크와 함께 행렬 역학을 완성했습니다. 파동함수의 확률 해석을 제안한 것도 보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이젠베르크는 1932년에 상을 받았고, 보른은 1954년에야 상을 받았습니다. 22년의 간격. 노벨 물리학상 역사에서 가장 논쟁적인 수상 지연 중 하나입니다.
리제 마이트너는 30년 이상 오토 한과 함께 핵물리학을 연구했습니다. 핵분열의 이론을 만든 것도 마이트너였습니다. 하지만 노벨상은 한에게만 갔습니다. 마이트너는 노벨상 후보로 수십 차례 추천되었지만 받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1968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같은 해 오토 한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놀드 조머펠트는 하이젠베르크와 파울리의 스승이었습니다. 원자 스펙트럼 이론에 결정적 기여를 했습니다. 원자를 양자론으로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하지만 노벨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노벨상 후보로 가장 많이 추천된 물리학자 중 한 명으로 꼽히지만, 끝내 받지 못했습니다.
노벨상이 없었던 해의 역설
1931년 노벨상이 없었다는 것은 역설적 의미를 가집니다.
그해 물리학계에서 상을 받을 만한 발견이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너무 많았습니다. 디랙의 반물질 예언, 양자역학의 수학적 완성, 중성자 발견의 전야 — 이 모든 것이 1931년에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역설은 여기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발견들은 때로 당대에 충분히 인정받지 못합니다. 너무 새롭고 너무 혁명적이어서,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보는 데 시간이 걸립니다.
1931년의 물리학은 이 역설의 가장 극적인 시기였습니다. 양자역학이 바로 그 해에 완성되어 가고 있었지만, 그것이 후세에 어떤 의미를 가질지를 당대의 누구도 완전히 알지 못했습니다.
노벨상은 이미 검증된 중요성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과학의 가장 큰 혁명은 검증에 시간이 걸립니다. 1931년 노벨상이 없었던 것은 어쩌면 그해 물리학이 너무 빠르게 달리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노벨위원회가 따라가기 어려울 만큼.
1931년에서 현재까지 — 연속된 혁명
1931년에 진행 중이었던 물리학의 혁명이 어디까지 이어졌는지 살펴보면 그 중요성이 더 명확해집니다.
양자역학은 현대 화학 전체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주기율표의 모든 원소가 왜 그런 특성을 가지는지, 화학 결합이 왜 생기는지, 분자가 왜 그런 모양을 가지는지 — 이 모든 것이 양자역학으로 설명됩니다.
반도체 기술이 현대 전자산업을 만들었습니다. 트랜지스터, 집적회로, 마이크로프로세서 — 이 모든 것이 양자역학의 응용입니다. 스마트폰, 컴퓨터, 인터넷 — 현대 정보 문명이 양자역학 위에 서 있습니다.
디랙의 반물질 예언이 PET 스캔이 되었습니다. 뉴트리노 연구가 태양 내부를 들여다보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양자 얽힘이 양자 컴퓨터와 양자 암호의 기반이 되고 있습니다.
1931년에 씨앗으로 있던 것들이 100년 만에 이렇게 자랐습니다. 그 씨앗들이 자라는 것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물리학자들도 있었지만, 그들이 뿌린 것은 계속 자라고 있습니다.
노벨상이 없었던 1931년. 하지만 그해의 물리학은 인류의 미래를 바꾸고 있었습니다.
📜 파트 9. 대공황 속 과학의 정신 — 멈추지 않는 탐구
대공황이 절정이던 1931년, 과학자들이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한 직업적 의무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물리학자들에게 원자의 세계를 탐구하는 것은 경제적 어려움과 정치적 불안을 초월한 순수한 지적 호기심의 표현이었습니다. 세계가 무너지고 있을 때, 자연의 법칙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양자역학의 방정식은 경기침체와 무관하게 참이었습니다.
보어의 코펜하겐 연구소에는 1931년에도 세계 각지에서 젊은 물리학자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장학금이 줄어도, 연구비가 삭감되어도, 기차를 타고 코펜하겐까지 왔습니다. 보어와 토론하기 위해. 양자역학의 가장 깊은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이것이 과학의 정신입니다. 세계가 어떤 상태에 있든, 진리를 향한 탐구는 계속됩니다. 1931년 노벨상이 없었던 해에도, 그 탐구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풍요롭게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노벨상이 인정하는 것은 발견 자체입니다. 하지만 발견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상과 무관하게 계속되는 탐구의 정신입니다. 1931년이 그것을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