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2년 2월, 케임브리지 캐번디시 연구소.
제임스 채드윅은 베릴륨에 알파 입자를 쏘았을 때 나오는 이상한 방사선에 대한 실험을 시작했습니다.
독일의 보테와 베커가 2년 전 이 방사선을 발견했었지만, 에너지가 높은 감마선이라고 해석했습니다. 프랑스의 이렌과 프레데리크 졸리오-퀴리도 같은 방사선을 연구했지만 역시 같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채드윅은 의심했습니다. 감마선이라면 설명이 안 되는 것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는 이 방사선이 파라핀을 때릴 때 양성자들이 튀어나오는 것을 측정했습니다. 운동량 보존 법칙으로 계산하면, 이 방사선 입자의 질량이 양성자와 비슷해야 했습니다. 그것은 감마선일 수 없었습니다.
채드윅의 결론은 간결했습니다. 이것은 전하를 갖지 않고 양성자와 비슷한 질량을 가진 새로운 입자다.
그것이 중성자였습니다.
이 발견이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지는지는, 그 이전에 원자핵이 얼마나 불완전하게 이해되었는지를 알 때 비로소 드러납니다. 중성자가 발견되기 전, 원자핵은 설명할 수 없는 수수께끼였습니다. 중성자가 발견된 후, 원자핵의 구조가 처음으로 완전히 이해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해 위에서 핵에너지, 핵의학, 핵무기가 모두 세워졌습니다.
📜 파트 1. 제임스 채드윅 — 러더퍼드의 오른팔
제임스 채드윅은 1891년 영국 체셔의 볼링턴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가 일자리를 찾아 맨체스터로 이사하면서 그는 맨체스터에서 성장했습니다. 어린 시절은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맨체스터 대학교에서 물리학을 공부했는데, 이것은 사실 우연한 일이었습니다. 처음에 채드윅은 수학과에 등록하려 했지만, 대학 측에서 물리학과에 배정했습니다. 처음에는 실망했지만 물리학에 적성이 맞았습니다.
맨체스터에서 어니스트 러더퍼드 교수의 연구실에 합류했습니다. 러더퍼드는 채드윅의 능력을 일찍 알아보았습니다. 채드윅은 1913년 러더퍼드의 추천으로 한스 가이거가 있는 베를린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가이거 계수기를 발명한 그 가이거입니다. 채드윅은 베를린에서 베타 방사선의 연속 스펙트럼을 연구했습니다.
그런데 1914년 7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습니다. 채드윅은 독일에 있었습니다. 영국과 독일이 적대국이 되었습니다. 채드윅은 영국으로 돌아갈 수 없었고, 루흘레벤 억류 캠프에 갇혔습니다.
4년을 독일 억류 캠프에서 보냈습니다. 그 시간에도 그는 가능한 한 물리학 연구를 계속했습니다. 캠프 내에 소박한 실험실을 만들었습니다. 비록 제대로 된 장비도 없었지만, 그는 연구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 시절의 고립과 인내가 채드윅의 특유의 끈질긴 탐구 방식을 만들었을 것입니다.
1918년 전쟁이 끝나고 케임브리지로 돌아온 채드윅은 러더퍼드의 오른팔이 되었습니다. 러더퍼드가 1919년 맨체스터에서 케임브리지 캐번디시 연구소로 자리를 옮기자 채드윅도 따라왔습니다. 캐번디시 연구소는 당시 세계 핵물리학의 중심이었습니다.
1932년 당시 그는 41세의 중견 물리학자였고, 캐번디시 연구소의 핵심 연구자였습니다. 그리고 그해, 10년 넘게 찾던 입자를 발견했습니다.
중성자가 예측되었었다
실제로 중성자의 존재는 이미 예측된 것이었습니다. 러더퍼드 자신이 1920년에 강연에서 전하가 없는 무거운 입자가 원자핵 안에 있을 것이라고 예측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것을 양성자와 전자가 결합한 형태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채드윅은 이 예측을 기억했습니다. 그리고 10년 이상 이 입자를 찾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전하가 없는 입자는 검출하기가 극히 어려웠습니다. 일반적인 전기적 검출기는 전하가 없는 입자를 감지하지 못합니다. 중성자를 찾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채드윅이 1932년 결정적인 실험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졸리오-퀴리 부부의 실험 덕분이었습니다. 부부가 발표한 결과를 읽은 채드윅은 즉시 이것이 중성자라고 직감했습니다. 그는 약 10일 동안 집중적인 실험을 수행했습니다. 수 주가 아니라 10일이었습니다. 그만큼 채드윅은 무엇을 찾는지 명확히 알고 있었고, 실험을 효율적으로 설계했습니다.
1932년 2월 27일, 채드윅은 '중성자의 가능한 존재'라는 제목의 짧은 논문을 네이처에 기고했습니다. 역사상 가장 중요한 논문 중 하나였습니다.
📜 파트 2. 중성자 발견의 충격 — 핵물리학의 혁명
중성자의 발견은 핵물리학에 즉각적이고 근본적인 혁명을 가져왔습니다.
그 이전까지 원자핵은 양성자와 전자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당시의 데이터와 완벽히 맞지 않는 모순된 모델이었습니다.
첫 번째 모순은 질량 문제였습니다. 예를 들어 헬륨 원자핵의 질량은 양성자 4개의 질량과 거의 같지만, 전하는 양성자 2개 분밖에 없습니다. 전자가 핵 안에 있어서 전하를 중화시킨다는 것이 당시의 설명이었습니다.
두 번째 모순은 양자역학에서 나왔습니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에 따르면, 전자를 원자핵처럼 작은 공간에 가두려면 전자가 엄청난 운동량을 가져야 합니다. 그 운동량을 유지하려면 수백 MeV의 에너지가 필요한데, 원자핵의 결합 에너지는 그것보다 훨씬 작습니다. 즉, 전자가 핵 안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중성자의 발견으로 이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원자핵은 양성자와 중성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중성자는 전하가 없기 때문에 전기적 반발 없이 핵 안에 존재할 수 있습니다. 헬륨 핵은 양성자 2개와 중성자 2개로 이루어져 있어 질량은 4단위이고 전하는 2단위입니다.
하이젠베르크는 중성자 발견 소식을 듣고 즉시 핵 구조 이론을 발표했습니다. 원자핵 안에서 양성자와 중성자가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지를 설명하는 이론. 핵물리학 이론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중성자의 특별한 성질 — 핵반응의 도구
중성자의 가장 혁명적인 측면은 핵반응의 새로운 도구로 기능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알파 입자나 양성자 같은 하전 입자를 원자핵에 쏘면, 원자핵의 전기적 반발력을 이겨내야 합니다. 핵에 가까워질수록 강해지는 반발력. 이것을 이겨내려면 입자를 매우 빠르게 가속해야 합니다. 이 때문에 가속기가 필요합니다.
중성자는 전하가 없습니다. 원자핵의 전기적 반발을 받지 않습니다. 따라서 중성자는 빠르게 가속하지 않아도 원자핵 안으로 침투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느린 중성자가 더 잘 흡수됩니다.
이것이 페르미가 1934년 발견한 것입니다. 파라핀으로 중성자를 느리게 하면 핵반응이 더 잘 일어납니다. 느린 중성자의 핵 포획 단면적이 빠른 중성자보다 훨씬 큽니다.
이 성질은 핵에너지 기술의 핵심입니다. 원자로에서 중성자를 사용하는 것, 감속재로 중성자를 느리게 하는 것 — 모두 여기서 나왔습니다.
동위원소의 완전한 이해
중성자 발견은 동위원소를 이해하는 데도 결정적이었습니다.
동위원소란 같은 원소이지만 질량이 다른 것들입니다. 예를 들어 수소에는 일반 수소, 중수소, 삼중수소가 있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양성자 1개를 가지지만 중성자 수가 다릅니다. 일반 수소는 중성자가 없고, 중수소는 1개, 삼중수소는 2개.
중성자가 발견되기 전에는 동위원소의 존재를 설명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같은 원소인데 질량이 다르다는 것을. 중성자의 발견이 이 수수께끼를 풀었습니다. 중성자 수만 다르면 화학적 성질은 거의 같지만 질량은 다릅니다.
동위원소의 이해는 핵물리학, 핵의학, 방사성 연대 측정 — 다양한 분야에서 핵심적입니다.
📜 파트 3. 중성자와 핵무기 — 발견의 무거운 유산
중성자 발견은 인류에게 이중적 선물이었습니다.
한쪽에서 중성자는 핵의학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중성자로 방사성 동위원소를 만들어 질병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것. 오늘날 수백만 명의 생명을 구하는 기술입니다. 중성자 산란을 이용한 재료 분석도 중요합니다. 단백질, 금속, 폴리머 같은 재료의 내부 구조를 중성자로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다른 한쪽에서 중성자는 핵무기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핵분열에서 연쇄 반응을 일으키는 것이 바로 중성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라늄이 핵분열할 때 나오는 중성자가 다른 우라늄 원자핵을 분열시키고, 또 중성자가 나오는 연쇄 반응. 이것을 폭발적으로 진행시키면 핵폭탄이 됩니다.
채드윅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습니다. 그는 영국 과학자 대표단의 책임자로 원자폭탄 개발에 기여했습니다. 영국이 핵폭탄 개발 능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미국과 공동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한 것은, 미국의 산업 능력이 훨씬 컸기 때문이었습니다.
전후 채드윅은 이것을 후회했다고 전해집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원자폭탄이 가져온 결과를 보면서, 자신이 발견한 중성자가 그 파괴의 핵심에 있다는 것을.
하지만 그는 또한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중성자를 발견하지 않은 척할 수는 없다고. 자연의 진실을 밝힌 것이 자신의 책임이었지, 그것이 어떻게 사용되는지는 자신의 손을 넘어선 것이었다고.
과학과 도덕, 지식과 책임의 관계에 대한 이 딜레마는 지금도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있습니다. 채드윅의 경우가 이 딜레마의 가장 구체적인 예 중 하나입니다.
📜 파트 4. 1932년의 기적 — 왜 하나의 해에 이렇게 많은 발견이 쏟아졌나
1932년은 물리학사에서 가장 놀라운 한 해입니다.
채드윅의 중성자 발견, 앤더슨의 양전자 발견, 코크로프트와 월턴의 최초 인공 핵 변환 실험, 로렌스의 사이클로트론 첫 성공 — 이 모두가 1932년에 이루어졌습니다.
왜 하나의 해에 이렇게 많은 것이 나왔을까요?
부분적으로는 1920년대의 이론적 혁명이 1930년대 초에 실험적 검증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양자역학이 확립되면서 원자핵에 대한 이론적 예측들이 나왔습니다. 러더퍼드의 중성자 예측, 디랙의 반물질 예측. 이것들이 실험으로 확인되는 데 몇 년이 걸렸습니다.
또한 실험 기술의 발전이 역할을 했습니다. 클라우드 챔버가 더 정밀해졌고, 가속기 기술이 발전했으며, 방사성 원소를 이용한 실험 방법이 성숙했습니다. 이론과 기술이 동시에 익은 순간, 여러 발견이 쏟아져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물리학자들의 네트워크가 중요했습니다. 케임브리지, 코펜하겐, 괴팅겐, 로마, 파리의 연구소들이 긴밀하게 소통했습니다. 졸리오-퀴리의 논문을 읽고 채드윅이 결정적 실험을 한 것이 바로 이 네트워크의 힘이었습니다.
📜 파트 5. 1935년 노벨 물리학상
1935년 노벨 물리학상은 제임스 채드윅에게 수여되었습니다.
"중성자 발견에 대하여"
수상 당시 44세였습니다. 발견으로부터 3년이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노벨위원회가 이례적으로 빨리 수상을 결정한 편이었습니다. 그만큼 중성자 발견의 중요성이 명백했습니다.
노벨상 강연에서 채드윅은 중성자의 발견 과정을 상세히 설명했습니다. 그는 졸리오-퀴리 부부가 이미 중성자를 발견하는 데 거의 다가갔었다고 솔직하게 인정했습니다. 단지 올바른 해석을 하지 못했을 뿐이라고.
이것이 과학의 공동 작업 방식을 잘 보여줍니다. 보테와 베커, 졸리오-퀴리 부부의 실험들이 없었다면 채드윅의 발견도 없었습니다. 과학은 어깨를 딛고 올라서는 작업입니다.
채드윅은 이후 리버풀 대학교 교수가 되었고, 전쟁 후 케임브리지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1974년 82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 파트 6. 중성자의 현대적 유산
중성자는 오늘날 세상 곳곳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원자력 발전이 가장 규모가 큰 응용입니다. 전 세계에 약 440개의 핵발전소가 있으며, 전 세계 전력의 약 10%를 공급합니다. 이 모든 원자로의 핵심에서 중성자가 핵분열을 유지합니다.
중성자 치료는 암 치료에 사용됩니다. 특히 붕소 중성자 포획 치료는 암세포에 선택적으로 붕소를 흡수시킨 후 중성자를 쏘아 암세포만 파괴하는 기술입니다.
중성자 산란 연구는 물질의 내부 구조를 들여다보는 강력한 도구입니다. 단백질의 3차원 구조, 금속 합금의 미세구조, 고분자의 형태 — 이런 것들을 X선이 아닌 중성자로 분석합니다. 중성자가 가벼운 원소인 수소를 잘 검출하기 때문에 생체 분자 연구에 특히 유용합니다.
방사성 동위원소 생산도 중요합니다. 핵반응로에서 다양한 방사성 동위원소를 생산해 의료 진단과 치료에 사용합니다. 테크네튬-99m, 요오드-131, 루테튬-177 같은 의료용 방사성 동위원소가 매일 수천 명의 진단과 치료에 사용됩니다.
채드윅이 베릴륨에 알파 입자를 쏘던 그 실험이, 이 모든 기술의 시작이었습니다.
📜 파트 7. 1935년의 세계 — 중성자가 발견된 시대의 풍경
중성자가 발견된 1932년, 그리고 채드윅이 노벨상을 받은 1935년 사이에 세계는 급격히 변했습니다.
1933년 히틀러가 독일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유대계 과학자들이 대거 독일을 떠났습니다. 이렌과 프레데리크 졸리오-퀴리가 인공 방사성 원소를 합성해서 1935년 노벨 화학상을 받았습니다. 페르미가 로마에서 중성자 충격 실험을 시작했습니다. 로렌스가 버클리에서 더 큰 사이클로트론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핵물리학은 1930년대 중반에 폭발적으로 발전하고 있었습니다. 채드윅이 발견한 중성자가 이 모든 연구의 핵심 도구였습니다.
1935년은 또한 독일의 뉘른베르크법이 통과된 해였습니다. 유대인의 독일 시민권을 박탈하는 법. 유럽에 전운이 드리우기 시작했습니다. 과학자들도 이 변화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채드윅은 1935년 노벨상을 받고 리버풀 대학교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그는 케임브리지 캐번디시 연구소를 떠나 독립적인 연구소를 이끌게 되었습니다. 리버풀에서 그는 영국의 사이클로트론 개발을 이끌었습니다.
중성자와 동위원소 의학
중성자 발견이 의학에 가져온 또 다른 혁명이 있습니다. 방사성 동위원소 의학입니다.
중성자로 안정한 원소를 충격시키면 방사성 동위원소가 만들어집니다. 페르미가 1934년 시작한 연구. 이것이 의학적으로 유용한 방사성 동위원소를 만드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테크네튬-99m은 오늘날 가장 많이 사용되는 의료용 방사성 동위원소입니다. 뼈 스캔, 심장 검사, 폐 검사 등 다양한 핵의학 검사에 사용됩니다. 전 세계에서 매년 약 4천만 건의 검사에 테크네튬-99m이 사용됩니다.
요오드-131은 갑상선암 치료에 사용됩니다. 갑상선이 요오드를 선택적으로 흡수하는 성질을 이용해, 방사성 요오드가 갑상선 암세포를 선택적으로 파괴합니다.
이 모든 의료 응용의 근본에 중성자가 있습니다. 채드윅이 발견한 전하 없는 입자가 오늘날 수백만 명의 병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데 사용됩니다.
채드윅과 전후 세계
전쟁이 끝난 후 채드윅은 핵 시대의 윤리적 문제들을 깊이 고민했습니다.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 그것을 가능하게 한 핵분열의 연쇄 반응. 그리고 연쇄 반응을 가능하게 한 중성자. 채드윅이 발견한 입자가 그 파괴의 핵심에 있었습니다.
채드윅은 전후 원자에너지의 평화적 이용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영국의 핵에너지 정책에 자문 역할을 했습니다. 맨체스터 대학교 총장을 지냈습니다.
그는 1974년 케임브리지에서 82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발견한 중성자는 그보다 오래, 지금도 살아서 일하고 있습니다.
📜 파트 8. 마무리 — 세 번째 입자
양성자, 전자에 이어 세 번째로 발견된 기본 입자 — 중성자.
이 발견 이전까지 원자핵은 불완전하게 이해된 수수께끼였습니다. 채드윅의 중성자가 그 퍼즐의 마지막 조각을 채웠습니다. 원자핵의 구조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해 위에서 핵물리학 전체가 세워졌습니다. 핵에너지도, 핵의학도, 핵무기도. 좋은 것과 나쁜 것 모두 함께.
채드윅은 이 모든 것의 씨앗을 뿌린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1920년대부터 10년 넘게 중성자를 찾은 끈기, 졸리오-퀴리의 논문을 읽고 즉시 핵심을 파악한 통찰력, 10일 만에 결정적 실험을 완성한 효율성 — 이것이 역사를 바꾼 발견의 배경이었습니다.
물리학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들은 종종 이처럼 오랜 기다림과 결정적 순간의 결합에서 나옵니다. 러더퍼드가 1920년 예측하고, 채드윅이 12년을 찾아다닌 끝에 발견한 중성자. 그 사이의 12년이 헛된 세월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채드윅을 준비시킨 시간이었습니다.
📜 파트 9. 중성자의 세계 — 보이지 않는 것이 바꾼 모든 것
전하가 없어서 보이지 않는 입자가 세상을 바꾸었습니다.
중성자는 전하가 없기 때문에 전기적 검출기로 직접 볼 수 없습니다. 중성자가 양성자를 튀어나오게 하거나, 핵을 분열시키거나, 새로운 동위원소를 만들 때 그 효과를 통해 간접적으로 존재를 알 수 있습니다.
이 보이지 않음이 역설적으로 중성자의 강점이 됩니다. 전하가 없어서 원자핵의 전기적 반발을 받지 않습니다. 원자핵에 쉽게 침투합니다. 빠른 중성자는 그냥 통과하고, 느린 중성자는 핵에 포획됩니다.
이 성질이 원자로를 가능하게 하고, 핵의학을 가능하게 하고, 중성자 산란 기술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이 세상을 움직이고 있습니다. 중성자뿐 아니라 뉴트리노, 암흑 물질, 암흑 에너지. 현대 물리학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세계를 탐구합니다. 채드윅이 보이지 않는 중성자를 찾아낸 방법 — 간접적 효과를 통해 존재를 추론하는 것 — 이 여전히 과학의 핵심 방법론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찾는 것. 그것이 과학의 가장 중요한 능력 중 하나입니다. 채드윅이 1932년 보여준 것처럼.
📜 파트 10. 중성자가 여는 문 — 핵물리학의 새로운 세계
채드윅이 중성자를 발견하기 전과 후를 비교하면, 그 발견이 얼마나 근본적인 것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중성자 발견 전: 원자핵은 양성자와 전자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모델에는 모순이 있었습니다. 불확정성 원리에 의하면 전자가 그렇게 작은 공간에 가두어질 수 없었습니다. 핵의 스핀 값도 이 모델로는 설명이 안 되었습니다.
중성자 발견 후: 원자핵은 양성자와 중성자로 이루어집니다. 모순이 해결되었습니다. 동위원소도 설명됩니다. 핵분열도 가능해졌습니다.
중성자는 자연의 퍼즐 한 조각이었습니다. 그 조각이 제자리를 찾으면서 핵물리학 전체가 정합적으로 맞아들어갔습니다.
과학의 역사는 이런 순간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오랫동안 맞지 않던 퍼즐 조각이 하나 찾아지면서 전체 그림이 완성되는 순간. 채드윅의 중성자 발견이 그런 순간이었습니다.
이후 핵물리학은 연속적으로 발전했습니다. 핵력 이론, 핵 구조 이론, 핵분열 발견, 핵융합 연구. 이 모든 것의 시작에 중성자가 있었습니다.
중성자는 아직도 많은 것을 열어주고 있습니다. 중성자별 내부의 물리학, 중성자를 이용한 새로운 물질 분석 기술, 핵융합 발전에서의 중성자 역할. 채드윅이 1932년 열어놓은 문을 우리는 아직 완전히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노벨상이 인정하는 것은 인류에 대한 공헌입니다. 그 공헌이 때로는 즉각적으로 보이고, 때로는 수십 년 후에야 드러납니다. 물리학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발견들은 발견 당시에는 그 의미를 완전히 알 수 없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깊은 의미가 드러났습니다. 그것이 기초 과학 연구의 본질입니다. 당장의 응용을 넘어서, 자연의 근본 원리를 이해하는 것. 그 이해가 쌓여서 새로운 기술이 되고, 새로운 의학이 되고, 새로운 세계관이 됩니다.
물리학의 이야기는 이 한 해로 끝나지 않습니다. 각각의 발견이 다음 발견으로 이어지고, 각각의 물리학자가 다음 세대의 어깨 위에 올라섭니다. 그렇게 인류의 지식이 쌓여갑니다. 멈추지 않고,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과학은 혼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한 과학자의 발견 위에 다른 과학자가 서고, 그 위에 또 다른 과학자가 섭니다. 이것이 뉴턴이 말한 '거인의 어깨 위에 서는 것'입니다. 채드윅이 러더퍼드의 예언 위에 섰고, 앤더슨이 헤스의 발견 위에 섰으며, 디랙이 하이젠베르크와 슈뢰딩거의 이론 위에 섰습니다. 과학은 이렇게 세대를 넘어 이어집니다. 노벨상은 그 과정에서 특히 빛나는 순간들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 순간들 뒤에는 수많은 다른 과학자들의 노력이 있었습니다. 알려진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이름도 모두 함께 지식의 탑을 쌓았습니다. 그것이 과학의 공동 작업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지금도 계속됩니다. 오늘도 세계 곳곳의 실험실에서 새로운 발견을 향한 실험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미래의 물리학자들이 지금은 상상도 못하는 발견을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발견들이 또 세상을 바꿀 것입니다. 채드윅의 중성자가 핵의학을 만들었듯이, 아직 알지 못하는 미래의 발견들이 미래의 의학을 만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