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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0_New Novel/311_[NEW] 노벨물리학상

[1934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없음 : 물리학 역사상 가장 바쁜 해 중 하나였지만, 노벨상은 나오지 않았다

by 어셈블러 2026. 5.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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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12월 10일.

노벨 물리학상은 또 한 번 수여되지 않았습니다.

역설적인 것은 1934년이 물리학사에서 극히 바쁜 해였다는 점입니다. 중성자가 발견된 지 2년, 원자핵의 구조가 점점 밝혀지고 있었고, 새로운 원소들이 합성되고 있었습니다. 핵물리학이 막 폭발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시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수상이 없었습니다.

노벨상이 없는 해는 때로 물리학이 침묵한 해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 많은 것이 동시에 일어나 무엇을 먼저 상으로 인정해야 할지 판단이 어려운 해이기도 합니다. 1934년은 정확히 그런 해였습니다.


 

📜 파트 1. 왜 1934년인가 — 노벨위원회의 기다림

 

노벨위원회가 1934년 수상을 하지 않은 공식 이유는 1931년과 마찬가지로 명확히 발표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역사적 맥락을 보면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1932년은 핵물리학에서 기적의 해였습니다. 채드윅의 중성자 발견, 앤더슨의 양전자 발견, 코크로프트와 월턴의 최초 핵 변환 실험, 하이젠베르크의 핵 구조 이론 — 이 모든 것이 같은 해에 이루어졌습니다. 노벨위원회는 이 발견들을 검증하고 평가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실제로 채드윅은 1935년, 앤더슨과 헤스는 1936년에 수상하게 됩니다. 1934년이 비어있는 것은 이들의 수상을 위한 준비 단계였을 수 있습니다. 발견의 의미를 충분히 검증하고 합의하는 데 2~3년이 걸린 것입니다.

또한 1934년 자체의 발견들 — 페르미의 중성자 충격 실험, 졸리오-퀴리 부부의 인공 방사성 원소 합성, 유카와의 중간자 이론 — 도 아직 검증 중이었습니다. 이 발견들에 대한 상은 각각 1938년, 1935년, 1949년에 수여됩니다. 노벨위원회는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노벨 물리학상의 역사를 보면, 위원회가 발견의 중요성을 확신하는 데 평균 5~10년을 기다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1934년은 그 기다림의 해였습니다.


 

📜 파트 2. 1934년 물리학 — 들끓는 핵물리학

 

1934년에 일어난 물리학적 사건들을 살펴보면, 노벨상이 없었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페르미의 중성자 충격 실험 — 핵물리학의 새로운 장

 

엔리코 페르미는 1934년 로마에서 중성자를 다양한 원소에 충격시키는 체계적인 실험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중성자로 새로운 방사성 원소들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페르미의 전략은 간단하면서도 강력했습니다. 라듐과 베릴륨을 섞어 중성자원을 만들고, 이것을 수소에서 우라늄까지 주기율표의 원소들에 차례로 쏘아보는 것이었습니다. 중성자가 원자핵에 흡수되면 원자핵이 불안정해지고, 이것이 붕괴하면서 새로운 방사성 원소가 만들어집니다.

이 과정에서 페르미는 60개 이상의 새로운 방사성 원소를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핵물리학을 실험실에서 통제 가능한 연구로 만드는 혁명이었습니다. 이전까지 방사성 원소는 자연에서 발견하는 것이었습니다. 페르미는 원하는 방사성 원소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특히 중요한 발견이 있었습니다. 페르미는 파라핀이나 물 같은 수소가 풍부한 물질 속에서 중성자를 느리게 하면 핵반응이 더 잘 일어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느린 중성자가 빠른 중성자보다 핵에 포획될 확률이 훨씬 높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발견은 나중에 핵반응로 설계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해집니다. 원자로에서 감속재를 사용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물이나 흑연으로 중성자를 느리게 해서 핵분열 연쇄 반응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페르미가 1934년 우라늄에 중성자를 쏘았을 때, 그는 92번보다 무거운 새로운 초우라늄 원소가 만들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노벨위원회도 1938년 그에게 상을 줄 때 이것을 수상 이유 중 하나로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밝혀진 것은, 페르미가 우라늄에 중성자를 쏘았을 때 실제로 일어난 것이 핵분열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라늄 핵이 두 개의 더 작은 핵으로 쪼개진 것이었습니다. 페르미는 핵분열을 발견했지만 그것이 핵분열인 줄 몰랐습니다. 역사의 아이러니입니다.

 

졸리오-퀴리 부부의 인공 방사성 원소 — 인간이 만든 방사성 물질

 

마리 퀴리의 딸 이렌 퀴리와 그녀의 남편 프레데리크 졸리오-퀴리는 1934년 1월 알파 입자를 알루미늄에 충격시켜 인공 방사성 원소를 처음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알루미늄에 알파 입자를 쏘면 인이 만들어지고, 이 인이 방사성을 띠며 붕괴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자연에는 존재하지 않는 방사성 인-30이었습니다. 이것은 자연에 존재하지 않는 방사성 원소를 인간이 처음으로 만들어낸 사건이었습니다.

이렌의 어머니 마리 퀴리는 이 발견 소식을 들었습니다. 노년에 병상에 있던 마리 퀴리가 딸의 실험을 직접 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방사능을 연구하는 집안에서, 어머니가 자연 방사성 원소를 발견하고 딸이 인공 방사성 원소를 만든 것이었습니다. 마리 퀴리는 그해 7월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업적으로 부부는 1935년 노벨 화학상을 받았습니다. 물리학상이 아닌 화학상이었습니다. 새로운 원소를 합성했다는 점에서 화학적 업적으로 분류된 것입니다.

인공 방사성 원소의 합성은 의학에 혁명을 가져왔습니다. 원하는 방사성 동위원소를 만들어서 의학 연구와 진단에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핵의학에서 사용하는 수십 가지 방사성 동위원소들이 이 기술의 직접적 후손입니다.

 

유카와 히데키의 중간자 이론 — 핵력의 매개 입자

 

일본의 유카와 히데키는 1934년 핵력을 설명하는 이론을 발표했습니다.

이 이론이 다루는 문제는 근본적이었습니다. 원자핵 안에는 양성자와 중성자가 매우 가까이 있습니다. 양성자들은 같은 양의 전하를 가지고 있어 강하게 서로를 밀어냅니다. 그런데 원자핵은 안정적입니다. 무엇이 양성자들을 핵 안에 묶어두는가?

전자기력으로는 설명이 안 됩니다. 다른 힘이 필요합니다. 유카와는 이것을 새로운 종류의 힘 — 강한 핵력 — 과 그것을 매개하는 새로운 입자의 교환으로 설명했습니다.

전자기력이 광자의 교환으로 작용하듯이, 강한 핵력도 어떤 입자의 교환으로 작용해야 한다고 유카와는 생각했습니다. 그 입자의 질량을 계산했더니 전자보다 약 200배 무거워야 했습니다. 당시에는 그런 질량의 입자가 발견된 적이 없었습니다.

유카와는 이 아직 발견되지 않은 입자를 이론적으로 예측했습니다. 나중에 파이 중간자라고 불리게 되는 입자. 1947년 세실 파월이 우주선 실험에서 파이 중간자를 발견했습니다. 유카와는 1949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습니다. 아시아인 최초의 노벨 물리학상이었습니다.

유카와의 이론은 더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힘이 입자의 교환으로 매개된다는 개념은 이후 소립자물리학의 기본 틀이 됩니다. 전자기력의 광자, 약한 핵력의 W와 Z 보손, 강한 핵력의 글루온 — 모두 이 패러다임의 확장입니다. 유카와의 1934년 아이디어가 20세기 후반 표준 모형의 씨앗이었습니다.

 

블래킷과 오치알리니의 양전자 연구

 

1933년 블래킷과 오치알리니는 우주선이 물질을 통과할 때 전자-양전자 쌍이 만들어지고 소멸하는 것을 안개 상자에서 관찰했습니다. 이것은 앤더슨의 양전자 발견을 확인하고, 반물질 물질 쌍 생성과 소멸이라는 새로운 현상을 처음으로 보여주었습니다.

1934년에는 이 연구가 계속되었습니다. 반물질과 물질이 만나면 에너지로 전환된다는 것 — 질량-에너지 등가 원리 E=mc²의 가장 극적인 실현 — 이 실험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쌍 소멸에서 나오는 감마선의 에너지가 정확히 두 입자의 질량 에너지와 같다는 것이 측정되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질량-에너지 등가 원리가 입자물리학 실험에서 직접 확인된 것입니다.


 

📜 파트 3. 세계의 풍경 — 1934년의 어둠

 

1934년 세계는 어둠 속으로 걸어들어가고 있었습니다.

1월, 히틀러는 독일 대통령 힌덴부르크와 10년 불가침조약을 체결하고 권력을 강화했습니다. 3월에는 히틀러가 독일 내 교회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고, 나치의 반유대주의 정책이 체계적으로 심화되었습니다.

6월 30일에서 7월 2일 사이, 히틀러는 자신의 정적들을 대거 숙청하는 장검의 밤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SA 지도자 에른스트 롬과 수십 명의 정치적 반대자들이 즉결 처형되었습니다. 법적 절차는 없었습니다. 이것은 나치 국가가 법치주의를 완전히 버린 공개 선언이었습니다.

8월, 힌덴부르크가 사망하자 히틀러는 총리와 대통령직을 통합해 총통이 되었습니다. 독일은 이제 완전한 독재 국가가 되었습니다.

소련에서는 스탈린의 대숙청이 시작되는 전야였습니다. 12월에 레닌그라드 당 지도자 키로프가 암살되었고, 스탈린은 이것을 빌미로 대대적인 반대파 숙청을 시작했습니다.

스페인에서는 좌우 정치 세력 간의 긴장이 고조되어 내전의 전조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10월 스페인 아스투리아스에서 광부들이 봉기했고, 정부가 강제 진압했습니다.

중국에서는 장제스의 국민당이 공산당에 대한 포위를 강화했고,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이 대장정을 시작했습니다.

아시아에서 일본은 만주를 점령하고 중국 본토에 대한 야심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세계의 정치 지도가 전쟁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유럽의 많은 과학자들이 망명의 길에 올랐습니다. 아인슈타인은 1933년 이미 미국으로 떠났고, 수많은 유대계 물리학자들이 독일을 떠났습니다.

케임브리지와 코펜하겐, 파리로 망명자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리고 더 많은 이들이 미국으로 향했습니다. 세계 물리학의 중심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동하는 대전환이 진행 중이었습니다.

나치를 피해 독일을 떠난 유대계 과학자들의 명단은 물리학의 역사를 통째로 바꿀 만한 이름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막스 보른, 레오 실라르드, 에드워드 텔러, 빅터 바이스코프, 제임스 프랑크, 오토 슈테른 — 이들이 미국 대학으로 흘러들어가면서 미국 물리학이 세계 최고 수준으로 도약하는 기반이 만들어졌습니다.

히틀러가 유대인 과학자를 쫓아낸 결과가,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의 과학 강국 부상을 가져왔습니다.


 

📜 파트 4. 1934년 — 핵물리학 혁명의 도화선

 

1934년을 물리학사의 큰 흐름 속에서 보면, 그것이 결정적인 전환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전해까지 물리학의 화두는 양자역학이었습니다. 전자의 행동, 원자의 스펙트럼, 화학 결합의 본질. 하이젠베르크, 슈뢰딩거, 디랙이 그 주인공들이었습니다.

1934년부터 물리학의 무대가 원자핵으로 이동합니다. 채드윅의 중성자 발견이 1932년에 이루어졌지만, 그 의미가 완전히 펼쳐지기 시작한 것이 1934년이었습니다.

페르미의 중성자 충격 실험은 원자핵을 실험적으로 탐구하는 새로운 방법을 열었습니다. 졸리오-퀴리 부부의 인공 방사성 원소 합성은 핵물리학이 실용적 도구를 만드는 데도 쓰일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유카와의 중간자 이론은 핵력의 본질에 대한 이론적 이해를 제공했습니다.

이 모든 발전의 끝에 무엇이 있었는지 우리는 압니다. 핵분열, 원자폭탄, 원자로. 하지만 1934년의 물리학자들은 그것을 몰랐습니다. 페르미는 자신이 핵분열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채드윅이 중성자를 발견할 때 그것이 폭탄의 씨앗이 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지식은 항상 중립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사용되는지는 지식을 가진 사람들과 사회가 결정합니다. 1934년 로마의 실험실에서 페르미가 중성자를 쏘았을 때, 그것은 순수한 호기심의 산물이었습니다. 그것이 핵무기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수많은 선택과 결정이 있었습니다. 과학자들의 결정도, 정치가들의 결정도.


 

📜 파트 5. 마리 퀴리의 마지막 해

 

1934년은 마리 퀴리가 세상을 떠난 해이기도 합니다.

7월 4일, 마리 스클로도프스카 퀴리는 6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인은 재생불량성 빈혈이었습니다. 수십 년간 방사성 물질을 연구하면서 받은 방사선 피폭의 결과였습니다. 그녀가 연구한 라듐이 그녀를 죽인 것입니다.

마리 퀴리는 두 개의 노벨상을 받은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1903년 노벨 물리학상과 1911년 노벨 화학상. 게다가 두 다른 과학 분야에서 노벨상을 받은 유일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녀의 딸 이렌이 같은 해 인공 방사성 원소를 만들어 이듬해 노벨 화학상을 받게 됩니다. 어머니와 딸이 모두 노벨상을 받는 것은 물리학사에서 유일한 사례입니다.

마리 퀴리가 세상을 떠나던 그해, 그녀의 딸이 방사성 물질을 인공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어머니가 평생 연구한 방사능의 세계를 딸이 새로운 단계로 끌어올린 것이었습니다.

마리 퀴리의 연구 노트는 지금도 파리 국립도서관에 납으로 차폐된 상자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방사성이 너무 강해 연구자들이 손으로 직접 만질 수 없습니다. 그녀의 지식이 여전히 위험한 에너지를 품고 있는 것처럼.


 

📜 파트 6. 마무리 — 비어있는 해의 의미

 

1934년의 빈 노벨상 자리는 단순히 그해 업적이 부족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물리학은 1920년대의 양자혁명을 마무리하고 1930년대의 핵물리학 혁명으로 넘어가는 전환점에 있었습니다. 하이젠베르크, 슈뢰딩거, 디랙을 연이어 수상한 노벨위원회는 다음 혁명의 성과를 기다리며 잠시 숨을 고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1935년부터 채드윅, 앤더슨, 헤스, 페르미, 로렌스 등이 연이어 수상합니다. 핵물리학의 시대가 노벨상의 역사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 시작 바로 직전의 해가 1934년이었습니다.

노벨상이 없는 해가 존재한다는 것은 과학상의 본질에 대해 흥미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과학의 혁명은 언제나 진행 중입니다. 1934년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노벨위원회는 충분히 검증되고 확인된 업적을 기다렸습니다.

과학과 그 인정 사이의 시차. 페르미가 1934년 핵분열을 일으켰다는 것을 1938년에서야 알았을 때, 노벨위원회도 이미 그에게 상을 준 후였습니다. 수상 이유가 나중에 수정되어야 할 만큼 역사는 복잡하게 움직입니다.

침묵한 1934년 12월 10일. 세계가 전쟁을 향해 걸어가는 동안, 물리학자들은 원자핵의 비밀을 캐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발견한 것이 무엇으로 이어질지 아직 아무도 몰랐습니다.


 

📜 파트 7. 1934년의 물리학자들 — 그들은 어디 있었나

 

1934년 주요 물리학자들의 위치를 살펴보면 당시의 세계 물리학 지형도가 보입니다.

하이젠베르크는 라이프치히 대학교 교수였습니다. 나치 치하의 독일에서 양자역학을 가르쳤습니다. 레나르트와 슈타르크의 공격을 받고 있었지만 아직 독일에 있었습니다.

슈뢰딩거는 1933년 나치 독일을 피해 옥스퍼드로 갔습니다. 1934년 그는 잠시 그라츠로 돌아왔다가 다시 영국으로 떠났습니다.

디랙은 케임브리지에서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1933년 노벨상 수상 후에도 케임브리지에 머물렀습니다.

아인슈타인은 1933년부터 미국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 있었습니다. 독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페르미는 로마에서 중성자 충격 실험을 시작했습니다. 이탈리아가 아직 나치 독일만큼 극단적이지 않았고, 무솔리니 정권이 아직 반유대법을 통과시키기 전이었습니다. 페르미는 1938년까지 이탈리아에 있었습니다.

보어는 코펜하겐에서 연구소를 이끌었습니다. 그의 연구소는 유럽 물리학의 허브로서 다양한 국적의 물리학자들이 모이는 곳이었습니다.

러더퍼드는 케임브리지 캐번디시 연구소장으로 있었습니다. 1937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핵물리학의 원로 지도자였습니다.

 

1934년 — 핵물리학 혁명의 진원지들

 

1934년 핵물리학 연구가 활발히 진행된 곳들을 살펴보면:

로마. 페르미와 비아 파니스페르나의 소년들. 중성자 충격 실험. 60개 이상의 새로운 방사성 원소 생산.

파리. 이렌과 프레데리크 졸리오-퀴리. 인공 방사성 원소 합성 성공. 알루미늄에 알파 입자를 쏘아 방사성 인 합성.

케임브리지. 채드윅 이후 중성자를 이용한 다양한 핵 실험. 코크로프트와 월턴의 가속기 연구.

버클리. 로렌스의 사이클로트론 연구. 점점 더 큰 사이클로트론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오사카. 유카와 히데키가 중간자 이론을 발전시키고 있었습니다.

1934년은 핵물리학이 동시에 여러 곳에서 폭발적으로 발전하던 시기였습니다. 노벨상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은 것이 동시에 일어나서 어느 것을 먼저 상으로 인정해야 할지 가리기 어려운 해였습니다.

 

핵물리학과 일상의 관계

 

1934년의 핵물리학 연구가 오늘날 우리 일상에 어떻게 연결되는지 생각해봅니다.

페르미의 중성자 충격 실험은 원자로로 이어졌습니다. 전 세계 전력의 약 10%가 핵발전에서 나옵니다.

졸리오-퀴리의 인공 방사성 원소 합성은 핵의학으로 이어졌습니다. 매년 수천만 건의 핵의학 검사가 이루어집니다. 갑상선 질환 치료, 암 진단, 뼈 스캔.

유카와의 중간자 이론은 소립자물리학으로 이어졌습니다. 표준 모형, LHC, 힉스 보손 발견.

그리고 이 모든 것의 뿌리에 1934년의 연구들이 있습니다.

노벨상이 없었던 해였지만, 인류 문명의 방향을 바꾼 해였습니다. 실험실에서의 조용한 연구들이 수십 년 후 세계를 바꿀 기술들의 씨앗을 뿌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1934년이었습니다.


 

📜 파트 8. 1934년 — 두 혁명의 사이에서

 

1934년을 물리학사의 큰 흐름 속에서 한 번 더 바라봅니다.

1920년대의 양자혁명은 원자를 이해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었습니다. 전자의 세계, 원자의 스펙트럼, 화학 결합. 하이젠베르크, 슈뢰딩거, 디랙의 시대.

1930년대의 핵물리학 혁명은 원자핵을 이해하는 방식을 바꾸었습니다. 중성자, 양전자, 인공 방사성 원소, 핵분열. 채드윅, 앤더슨, 페르미, 졸리오-퀴리의 시대.

1934년은 두 혁명 사이의 경첩이었습니다. 양자역학의 완성 위에서 핵물리학이 폭발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해. 이 전환의 해에 노벨위원회는 침묵을 선택했습니다.

그것이 틀린 선택이었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1934년의 발견들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수년이 지나야 분명해졌습니다. 페르미의 중성자 실험이 핵분열로 이어지고, 졸리오-퀴리의 인공 방사성 원소가 핵의학으로 이어지고, 유카와의 이론이 표준 모형으로 이어지는 것은 모두 수십 년 후의 일이었습니다.

노벨상은 이미 이루어진 것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과학의 가장 큰 의미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향해 나아가는 데 있습니다. 1934년은 그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가장 거대하게 잉태되던 해였습니다.


 

📜 파트 9. 1934년의 인물들 — 침묵 속의 거인들

 

1934년 노벨 물리학상 시상이 없던 해, 그 침묵 속에서 거인들이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마리 퀴리는 그해 7월 세상을 떠났습니다. 두 개의 노벨상 — 물리학과 화학 — 을 받은 유일한 인물. 방사능을 연구하다가 방사선으로 인한 재생불량성 빈혈로 66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의 연구 노트는 지금도 납으로 차폐된 상자에 보관되어 있을 만큼 방사능이 강합니다.

같은 해 그녀의 딸 이렌 졸리오-퀴리가 인공 방사성 원소를 합성해서 이듬해 노벨 화학상을 받습니다. 어머니와 딸이 모두 노벨상을 받은 유일한 사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던 그해에 딸이 핵물리학의 새 장을 열었습니다.

닐스 보어는 코펜하겐에서 연구소를 이끌면서 핵물리학의 발전을 주시했습니다. 유럽 각지에서 몰려오는 물리학자들을 맞이했습니다. 그는 코펜하겐을 세계 물리학의 학술 수도로 만들었습니다.

러더퍼드는 케임브리지에서 중성자 발견 후의 핵물리학 발전을 이끌었습니다. 자신이 1920년에 예언한 중성자가 발견되고, 그것이 핵물리학을 어떻게 바꾸는지를 지켜보았습니다. 그는 1937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핵물리학의 원로였습니다.

이 거인들의 어깨 위에서 1934년의 연구들이 이루어졌습니다. 노벨상은 없었지만, 물리학은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노벨상이 인정하는 것은 인류에 대한 공헌입니다. 그 공헌이 때로는 즉각적으로 보이고, 때로는 수십 년 후에야 드러납니다. 물리학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발견들은 발견 당시에는 그 의미를 완전히 알 수 없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깊은 의미가 드러났습니다. 그것이 기초 과학 연구의 본질입니다. 당장의 응용을 넘어서, 자연의 근본 원리를 이해하는 것. 그 이해가 쌓여서 새로운 기술이 되고, 새로운 의학이 되고, 새로운 세계관이 됩니다.

물리학의 이야기는 이 한 해로 끝나지 않습니다. 각각의 발견이 다음 발견으로 이어지고, 각각의 물리학자가 다음 세대의 어깨 위에 올라섭니다. 그렇게 인류의 지식이 쌓여갑니다. 멈추지 않고,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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