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310_New Novel/313_[NEW] 노벨화학상

[1939 노벨화학상] 아돌프 부테난트 & 레오폴트 루지치카 : 호르몬의 화학을 쓴 사람들, 성호르몬과 테르펜의 비밀

by 어셈블러 2026. 5. 13.
728x90
반응형

인간의 몸속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화학 메신저들이 있습니다. 혈액을 타고 온 몸을 돌아다니며 세포들에게 명령을 전달하는 이 분자들이 없다면, 성장도, 생식도, 감정도, 신진대사도 불가능합니다. 이것이 바로 호르몬입니다.

1929년부터 1934년 사이, 아돌프 부테난트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성호르몬들을 하나씩 순수하게 분리해내고 그 화학 구조를 밝혀냈습니다. 에스트로겐, 프로게스테론, 안드로스테론 —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만들고, 임신과 생식을 가능하게 하는 이 분자들의 정체가 드디어 화학의 언어로 기록되었습니다.

같은 시기, 크로아티아 출신의 스위스 화학자 레오폴트 루지치카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접근했습니다. 폴리메틸렌과 고급 테르펜의 구조를 밝히면서, 그는 자연계에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한 분자 가족의 비밀을 해독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성호르몬과 테르펜이 놀랍도록 긴밀한 관계에 있다는 것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1939년 노벨화학상은 이 두 연구 흐름이 만나는 지점에 세워진 이정표였습니다.


 

📜 아돌프 부테난트 — 호르몬을 분리한 사나이

 

아돌프 프리드리히 요한 부테난트는 1903년 3월 24일, 독일 북부 브레머헤펜 인근 레헤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상인이었고, 부테난트는 일반적인 독일 중산층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청년 시절 마르부르크 대학교에서 화학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이후 괴팅겐 대학교로 옮겨 아돌프 빈다우스의 지도 하에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빈다우스는 스테롤 화학의 선구자로 1928년 노벨화학상을 받은 인물이었습니다.

스승 빈다우스 밑에서 스테롤 화학을 배운 것은 부테난트의 이후 연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성호르몬들은 모두 스테롤 골격을 기반으로 하는 스테로이드 화합물이기 때문입니다.

 

에스트로겐의 발견

 

1929년, 부테난트는 에스트로겐을 순수하게 분리하는 데 처음으로 성공했습니다. 이 업적은 동시에 미국의 에드워드 도이지도 독립적으로 이루었습니다.

수천 리터의 임산부 소변으로부터 불과 수 밀리그램의 에스트로겐을 정제해내는 작업이었습니다. 엄청난 양의 생물학적 재료로부터 극소량의 순수 화합물을 얻어내는 이 과정은, 마치 광산에서 금을 채굴하는 것처럼 집요하고 정밀한 작업이었습니다.

부테난트는 이 에스트로겐의 화학식을 C₁₈H₂₄O₂로 결정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에스트론이라고 불리는 에스트로겐의 일종입니다.

 

안드로스테론과 테스토스테론

 

에스트로겐의 발견 이후, 부테난트는 남성 호르몬의 분리에 도전했습니다.

1931년, 그는 수만 리터의 남성 소변에서 안드로스테론을 분리했습니다. 15,000리터의 소변에서 얻은 것이 겨우 15밀리그램이었습니다. 이 극소량의 물질로 화학 구조를 밝혀내야 했습니다.

안드로스테론이 성호르몬으로서 에스트로겐보다 훨씬 약한 활성을 가진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더 강력한 남성 호르몬이 따로 있을 것이라는 가설이 제기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테스토스테론이었습니다.

1935년, 부테난트의 팀은 소 고환 조직에서 테스토스테론을 분리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같은 시기 네덜란드의 라커 연구팀도 독립적으로 테스토스테론을 분리했습니다. 두 팀은 거의 동시에 이 연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프로게스테론

 

에스트로겐, 안드로스테론에 이어 부테난트가 공략한 것은 황체 호르몬, 즉 프로게스테론이었습니다.

프로게스테론은 임신 유지에 필수적인 호르몬입니다. 수정란이 자궁에 착상할 수 있도록 자궁 내막을 준비시키고, 임신 기간 동안 자궁의 수축을 억제하는 역할을 합니다.

1934년, 부테난트를 비롯한 여러 연구 그룹이 거의 동시에 프로게스테론을 순수하게 분리하고 구조를 밝혀냈습니다.

에스트로겐, 안드로스테론, 프로게스테론 — 이 세 가지 성호르몬의 화학 구조가 5년 사이에 모두 밝혀진 것은, 인류가 자신의 몸속에서 일어나는 가장 근본적인 생화학적 과정을 이해하는 데 새로운 장을 연 것이었습니다.


 

⚗️ 레오폴트 루지치카 — 향기와 호르몬 사이를 누빈 크로아티아인

 

레오폴트 루지치카는 1887년 9월 13일, 크로아티아 부코바르에서 태어났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였던 이 도시에서, 그는 체코계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어린 루지치카는 가톨릭 신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나, 종교인보다는 자연 세계의 비밀에 더 매료되었습니다. 결국 독일 카를스루에 공과대학교로 진학하여 화학을 공부했고, 헤르만 슈타우딩거의 지도 하에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슈타우딩거는 훗날 고분자 화학으로 1953년 노벨화학상을 받는 인물입니다.

박사 학위 후 루지치카는 스위스로 건너와 ETH 취리히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1929년에는 스위스 국적을 취득했습니다.

 

향기 분자에서 출발

 

루지치카의 연구는 처음에 예상치 못한 곳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향수 산업에서 사용하는 고급 향기 분자들의 화학 구조를 밝혀내는 작업이었습니다.

무스콘, 시베톤 — 이것들은 사향노루와 시벳고양이에서 추출하는 귀한 향기 물질들입니다. 향수 산업에서 황금처럼 귀중히 여기던 이 분자들의 구조는 당시 미스터리였습니다.

루지치카는 1926년 무스콘의 화학 구조를 밝혀냈습니다. 그것은 15개의 탄소 원자로 이루어진 대형 고리 구조(거대 고리 케톤)였습니다. 그리고 시베톤은 17개의 탄소로 이루어진 비슷한 구조였습니다.

이 발견에서 루지치카는 중요한 관찰을 했습니다. 이 향기 분자들이 작은 이소프렌 단위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 이소프렌 법칙의 발견 — 자연계의 놀라운 건축 원리

 

루지치카의 가장 중요한 이론적 기여는 이소프렌 법칙의 발견입니다.

 

이소프렌이란

 

이소프렌(C₅H₈)은 5개의 탄소를 가진 단순한 유기 분자입니다. 고무나무의 수액에서 분해되어 나오는 이 분자는 특별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루지치카는 자연계에 존재하는 수많은 테르펜 화합물들을 분석하다가 놀라운 패턴을 발견했습니다. 이 분자들이 모두 이소프렌 단위가 규칙적으로 연결된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테르펜들은 이소프렌 단위의 수에 따라 분류됩니다. 2개의 이소프렌 단위(탄소 10개)로 이루어진 것은 모노테르펜, 3개(탄소 15개)는 세스퀴테르펜, 4개(탄소 20개)는 디테르펜, 6개(탄소 30개)는 트리테르펜, 8개(탄소 40개)는 테트라테르펜(카로티노이드)입니다.

향기 분자들은 대부분 모노테르펜이나 세스퀴테르펜입니다. 고무는 이소프렌이 수천 개 연결된 폴리테르펜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콜레스테롤도, 스테로이드 호르몬도, 비타민 D도, 심지어 엽록소의 꼬리 구조도 모두 이소프렌 단위로 이루어진 것들이었습니다.

자연이 이소프렌이라는 하나의 단위를 반복해서 사용하여 향기 분자부터 고무, 비타민, 호르몬까지 다양한 물질을 만든다는 것 — 이것이 루지치카의 이소프렌 법칙이 밝혀낸 자연의 경제적인 설계 원리였습니다.

 

테르펜과 스테로이드의 연결

 

이소프렌 법칙의 가장 중요한 함의 중 하나는 테르펜과 스테로이드의 연결이었습니다.

스쿠알렌이라는 상어 간유에서 발견되는 물질은 탄소 30개의 트리테르펜입니다. 루지치카는 이 스쿠알렌이 적절히 접히고 고리화되면 콜레스테롤 같은 스테롤 골격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제안했습니다.

이 제안은 훗날 생화학자들에 의해 실험적으로 확인되었고, 콜레스테롤과 모든 스테로이드 호르몬의 생합성 경로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가 되었습니다.


 

💡 호르몬 합성의 문을 열다

 

부테난트가 성호르몬을 분리하고 구조를 밝혀낸 후, 루지치카는 이 호르몬들을 실험실에서 합성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1934년, 루지치카는 안드로스테론으로부터 테스토스테론을 합성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것은 성호르몬이 최초로 실험실에서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순간이었습니다.

이 합성의 성공은 단순히 학문적인 의미를 넘어 실용적인 혁명의 시작이었습니다. 이제 이론적으로는 성호르몬을 대량 생산하는 것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경구 피임약으로 가는 길

 

성호르몬의 화학 구조가 밝혀지고 합성이 가능해지자, 이를 의학적으로 응용하려는 연구가 폭발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1960년대 경구 피임약의 개발은 이 연구의 가장 중요한 결실 중 하나입니다. 합성 프로게스테론과 에스트로겐을 이용한 피임약은 여성의 생식 건강과 사회적 지위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또한 성호르몬 관련 질환의 치료, 폐경 후 호르몬 대체 요법, 그리고 스포츠에서 논란이 된 아나볼릭 스테로이드의 사용 — 이 모든 것이 부테난트와 루지치카가 연 문을 통해 나온 것들입니다.


 

🏆 1939년 노벨화학상 — 또 한 번의 나치 개입

 

1939년, 스웨덴 왕립과학원은 아돌프 부테난트와 레오폴트 루지치카를 공동 수상자로 선정했습니다.

 

 

부테난트에게: "성호르몬 연구에 대한 공로를 인정하여"
루지치카에게: "폴리메틸렌과 고급 테르펜 연구에 대한 공로를 인정하여"

 

 

그러나 리하르트 쿤의 전례처럼, 부테난트는 나치 정권의 금지 명령으로 인해 수상을 거부해야 했습니다. 반면 스위스 국적의 루지치카는 제한 없이 상을 수락했습니다.

부테난트도 전쟁이 끝난 1949년에 뒤늦게 노벨상 메달과 증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상금은 역시 돌려받지 못했습니다.


 

✍️ 전후의 두 과학자

 

전쟁이 끝난 후 두 과학자의 길은 달라졌습니다.

루지치카는 스위스에서 평화롭게 연구를 계속했습니다. 그는 생화학과 천연물 화학에 지속적으로 기여했고, 1976년 9월 26일, 8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예술 수집가로도 유명했던 그는 자신의 컬렉션을 취리히 대학교에 기증했습니다.

부테난트는 더 복잡한 경로를 걸었습니다. 전후 독일 과학의 재건에 참여하여 막스 플랑크 생화학 연구소를 설립했고, 1960년부터 1972년까지 막스 플랑크 협회의 총재를 역임했습니다. 1995년 1월 18일, 91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독일 과학계의 원로로 활동했습니다.


 

🌍 스테로이드 화학이 바꾼 세상

 

부테난트와 루지치카의 연구가 열어놓은 스테로이드 화학의 세계는, 이후 몇십 년 동안 의학과 생물학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았습니다.

코르티솔 같은 스트레스 호르몬, 알도스테론 같은 미네랄 코르티코이드, 담즙산, 비타민 D — 이 모든 것이 스테로이드 골격을 기반으로 하는 화합물들입니다. 그리고 이 화합물들의 합성과 대사를 이해하는 것이 수많은 질병의 치료에 핵심이 됩니다.

류마티스 관절염에서 코르티손 치료, 심장 질환에서 콜레스테롤 저하제(스타틴), 암 치료에서의 호르몬 요법 — 현대 의학의 가장 중요한 치료들이 스테로이드 화학 위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시작에는 아돌프 부테난트와 레오폴트 루지치카가 있었습니다. 소변 수만 리터로부터 호르몬 몇 밀리그램을 뽑아내는 인내의 과학과, 향기 분자 속에서 자연의 건축 원리를 읽어내는 통찰의 과학이 만나서 이 모든 것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 몸을 조종하는 화학 메신저들의 정체를 밝혀낸 두 사람. 그들의 이름은 스테로이드 화학의 역사에서 지워지지 않는 이름으로 남아 있습니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