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1년 12월 10일.
노벨 물리학상은 이번에도 수여되지 않았습니다.
1941년은 전쟁이 글자 그대로 전 세계로 확산된 해였습니다. 그리고 그해 과학, 특히 물리학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험한 방향으로 발걸음을 내딛었습니다.
1941년 12월 7일 — 노벨상 시상일로부터 불과 사흘 전 — 일본 해군 항공대가 하와이 진주만의 미국 태평양 함대를 기습 공격했습니다. 그 다음 날 미국이 일본에 선전포고했습니다. 독일이 미국에 선전포고했습니다. 세계 전체가 전쟁의 수렁으로 빠져들었습니다.
그리고 그해 말, 미국에서는 원자폭탄 개발이 국가적 최우선 과제로 결정되었습니다. 세계 최고의 물리학자들이 핵무기를 만드는 일에 동원되기 시작했습니다.
노벨상이 없는 해였지만, 물리학의 방향이 결정된 해였습니다.
📜 파트 1. 전쟁의 확산 — 1941년의 세계
1941년 6월 22일, 독일이 소련을 침공했습니다. 바르바로사 작전. 역사상 최대 규모의 지상군 작전이었습니다. 독일군 380만 명, 소련군 수백만 명이 소련 서쪽 국경 전체에서 충돌했습니다.
처음에 독일의 진격은 빨랐습니다. 6월에 시작해서 9월에는 레닌그라드를 포위하고 10월에는 모스크바 근방까지 접근했습니다. 수백만 명이 죽었습니다. 레닌그라드는 900일에 걸친 포위 공격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모스크바 앞에서 독일군이 막혔습니다. 겨울이 왔습니다. 독일군은 소련의 혹독한 겨울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보급이 끊겼습니다. 소련군이 반격했습니다. 독일군은 모스크바를 점령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전쟁의 첫 번째 전환점이었습니다. 독일의 전광석화 전략이 소련에서 좌절되었습니다.
동부 전선에서 소련과 독일이 싸우는 동안, 북아프리카에서는 이탈리아와 독일이 영국 이집트 군과 맞붙었습니다. 사막의 여우 롬멜이 북아프리카 전선을 이끌었습니다.
지중해 섬 몰타는 영국 전략 거점으로 독일과 이탈리아의 집중 폭격을 받았습니다. 한 섬에 투하된 폭탄의 양으로 역사상 가장 심하게 폭격을 받은 지역 중 하나였습니다.
진주만 — 전쟁이 태평양으로
1941년 12월 7일 이른 아침.
일본 해군 항공기 353대가 두 차례 파도를 이루어 하와이 오아후 섬의 진주만 미군 기지를 공격했습니다. 전함 애리조나를 비롯한 함선들이 침몰했습니다. 2,403명이 죽었습니다.
미국은 즉각 선전포고했습니다. 그 직후 독일과 이탈리아도 미국에 선전포고했습니다. 미국이 완전히 전쟁에 뛰어들었습니다.
미국의 참전은 전쟁의 판도를 바꾸었습니다. 미국의 산업 생산력, 자원, 인구가 연합국 편에 완전히 쏠렸습니다. 역사가들은 진주만 이후의 전쟁 결과는 거의 결정되어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이 되기까지 4년이 더 걸렸습니다.
📜 파트 2. 맨해튼 프로젝트의 본격 출발
1941년은 미국이 원자폭탄 개발을 국가적 최우선 과제로 결정한 해였습니다.
맨해튼 프로젝트의 공식 발족은 1942년이지만, 결정적인 준비와 결단이 1941년에 이루어졌습니다.
1941년 10월, 루스벨트 대통령이 원자폭탄 개발을 승인했습니다. 독일이 같은 연구를 하고 있다는 정보가 있었습니다. 독일이 먼저 핵폭탄을 만들면 전쟁에서 질 것이라는 공포가 결정을 가속했습니다.
오펜하이머, 페르미, 로렌스, 실라르드, 텔러, 위그너 — 세계 최고의 핵물리학자들이 미국 각지에서 비밀리에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 중 많은 이가 나치를 피해 유럽에서 망명해 온 물리학자들이었습니다. 헝가리인, 독일인, 이탈리아인, 오스트리아인, 영국인. 그들이 미국을 위해 핵폭탄을 만들게 됩니다.
히틀러가 유대인 과학자들을 쫓아낸 결과가, 미국 핵무기 개발을 앞당기는 아이러니로 이어진 것입니다. 만약 아인슈타인, 페르미, 실라르드, 텔러가 유럽에 남아있었다면 역사가 어떻게 달랐을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플루토늄의 발견
1940년 버클리에서 글렌 시보그 팀이 우라늄보다 무거운 원소들을 합성하고 있었습니다. 1941년, 그들은 원소 번호 94번 — 플루토늄 — 을 합성하고 핵분열이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플루토늄-239는 우라늄-235보다 더 쉽게 핵분열이 일어나고, 우라늄 원자로에서 중성자를 흡수해 만들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맨해튼 프로젝트에서 우라늄 외에 플루토늄도 폭발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실제로 나가사키에 투하된 팻맨 폭탄이 플루토늄 폭탄이었습니다. 히로시마의 리틀보이가 우라늄 폭탄이었고, 나가사키의 팻맨이 플루토늄 폭탄이었습니다.
플루토늄의 발견이 맨해튼 프로젝트의 범위를 크게 확장했습니다. 우라늄-235를 분리하는 것뿐만 아니라, 원자로에서 플루토늄을 생산하는 것도 프로젝트의 목표가 되었습니다.
시보그는 나중에 원소 번호 94번부터 103번까지를 포함해 10개의 인공 원소를 합성했습니다. 1951년 노벨 화학상을 받았습니다. 원소 106번은 그의 이름을 딴 시보귬입니다.
📜 파트 3. 물리학의 두 갈래 — 전쟁 중에도 계속된 기초 연구
전쟁 중에도 군사 연구와 무관한 기초 물리학 연구가 완전히 멈추지는 않았습니다.
1941년 당시 영국과 미국에서는 핵자기공명 현상의 초기 연구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원자핵이 자기장 안에서 특정 주파수의 전자기파와 공명한다는 현상. 이것이 전후 NMR 분광학으로, 나중에 MRI로 발전했습니다.
에드워드 퍼셀과 이지도어 라비는 이 분야에서 선구적인 연구를 했습니다. 퍼셀은 1952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MRI는 핵의학에서 가장 중요한 영상 기기 중 하나입니다. 두뇌, 척수, 관절의 연부 조직을 방사선 없이 볼 수 있습니다.
반도체 연구도 전쟁 전부터 꾸준히 진행되었고, 그 결실이 전후 트랜지스터 발명으로 이어졌습니다. 윌리엄 쇼클리, 월터 브래튼, 존 바딘이 1947년 트랜지스터를 발명했습니다. 이것은 전자 산업 전체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또한 양자전기역학 — 빛과 전자가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를 기술하는 이론 — 이 이 시기에 발전하고 있었습니다. 전후 리처드 파인먼, 줄리안 슈윙거, 도모나가 신이치로가 이 이론을 완성해 공동으로 노벨상을 받게 됩니다.
전쟁이 물리학을 군사 기술로 동원했지만, 그 기술 개발 과정에서 새로운 기초 지식도 축적되었습니다.
이안 플레밍과 물리학자들
제임스 본드 시리즈의 작가 이안 플레밍은 영국 해군 정보국에서 일했습니다. 그는 핵물리학자들을 독일로부터 보호하고, 독일의 핵 관련 시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작전에도 관여했습니다.
1941년부터 영국은 독일의 핵무기 연구 현황을 파악하려 했습니다. 덴마크의 닐스 보어가 어느 정도 정보를 제공할 수 있었지만, 독일 내부의 연구 실태는 불분명했습니다.
전쟁은 과학자들을 스파이의 세계와도 연결시켰습니다. 과학 정보가 군사 정보와 결합된 시대였습니다.
📜 파트 4. 핵물리학의 도덕적 딜레마
1941년 맨해튼 프로젝트의 결정은 많은 과학자들에게 깊은 도덕적 고뇌를 가져왔습니다.
레오 실라르드는 핵 연쇄 반응의 아이디어를 1933년에 처음 생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1939년 핵분열이 발견되자 즉시 연쇄 반응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보았고, 아인슈타인과 함께 루스벨트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미국이 핵무기를 개발해야 한다고 촉구하는 내용이었습니다.
하지만 실라르드는 동시에 이것이 얼마나 위험한 길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1941년 그는 핵무기가 민간인을 대량으로 죽이는 도구가 될 것을 우려했습니다.
실라르드는 나중에 핵무기를 일본에 사용하는 것에 반대하는 청원을 주도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1945년의 일이었고, 1941년에는 아직 독일과의 핵 경쟁이 가장 급박한 문제였습니다.
오펜하이머는 나중에 핵폭탄 투하 소식을 듣고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 기타의 구절을 인용했습니다.
"나는 이제 죽음이 되었다. 세계의 파괴자."
이 말은 핵물리학자들이 자신들이 만든 것의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1941년 맨해튼 프로젝트의 결정은 물리학자들을 단순한 진리 탐구자에서 인류 운명의 결정자로 변모시켰습니다. 그것이 좋은 일이었는지 나쁜 일이었는지는 역사가 지금도 판단하고 있습니다.
📜 파트 5. 소립자물리학의 새로운 발견들
전쟁의 어둠 속에서도 기초 물리학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1941년 전후로 뮤온의 성질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었습니다. 1936년 칼 앤더슨이 우주선에서 발견한 뮤온은 전자와 같은 종류의 입자이지만 207배 무거운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유카와가 예언한 파이 중간자라고 생각했지만, 핵력에 반응하지 않는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다른 입자임이 확인되었습니다.
이것이 소립자물리학에서 '세대' 구조가 있다는 첫 번째 단서였습니다. 전자의 무거운 버전인 뮤온이 있다면, 다른 입자들도 무거운 버전이 있을 수 있다는 것. 나중에 쿼크와 렙톤에 3개의 세대가 있다는 것이 발견됩니다. 뮤온은 두 번째 세대의 렙톤입니다.
또한 이 시기 코스모트론 이전의 초기 가속기들을 이용한 핵반응 연구가 이어졌습니다. 로렌스의 버클리 사이클로트론이 계속 새로운 동위원소들을 생산하고 있었습니다.
📜 파트 6. 전쟁 중의 과학자 공동체 — 분열과 연대
전쟁은 국제적인 과학자 공동체를 갈라놓았습니다.
같은 해 같은 대학에서 공부했던 사람들이 적국의 편에 서서 맞섰습니다. 하이젠베르크와 보어, 한과 마이트너, 파인먼과 독일 물리학자들. 과학은 국경이 없다고 하지만, 전쟁은 그 국경을 물리적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새로운 연대도 있었습니다.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온 유럽 물리학자들이 미국 물리학자들과 함께 일했습니다. 영국과 미국이 레이더 기술을 공유했습니다. 언어와 문화가 달라도 과학의 공통 언어로 소통했습니다.
맨해튼 프로젝트는 이런 의미에서 놀라운 국제 협력이었습니다. 미국인, 영국인, 캐나다인, 헝가리인, 이탈리아인, 독일인, 덴마크인 — 다양한 나라 출신의 과학자들이 하나의 목표를 위해 일했습니다. 그 목표가 핵폭탄이라는 것이 비극이었지만.
여성 과학자들의 역할
전쟁 중 많은 남성 과학자들이 군사 프로젝트에 동원되면서, 대학과 연구소에서 여성 과학자들의 역할이 커졌습니다.
마리아 괴페르트 메이어는 이 시기 핵물리학 연구를 계속했습니다. 그녀는 나중에 1963년 원자핵의 껍데기 모형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습니다. 마리 퀴리 이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두 번째 여성이었습니다.
맨해튼 프로젝트에서도 여성 과학자들이 참여했습니다. 리제 마이트너는 핵분열 이론을 만들었지만 맨해튼 프로젝트 참여 요청을 거부했습니다. 그녀는 나중에 이 결정에 자부심을 가졌습니다.
📜 파트 7. 마무리 — 두 번째 침묵 속 두 번째 해
1941년 노벨상의 부재. 그것은 단순히 좋은 연구가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세계가 전쟁 중이었고, 과학은 전쟁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노벨상이 상징하는 인류에 대한 공헌이라는 가치가, 서로를 죽이는 세계에서는 자리를 잡기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1941년 가장 집중적으로 진행된 물리학 연구는 인류에게 가장 치명적인 무기를 만드는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나중에 핵발전과 핵의학으로도 이어진다는 것을 알더라도, 1941년의 방향은 분명 살상 무기였습니다.
노벨이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하고 그것이 전쟁에 사용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노벨상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유산이 인류에 대한 공헌을 기리는 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상이 중단된 해에, 다이너마이트보다 수백만 배 강력한 무기가 개발되기 시작했습니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때로 이렇게 극적입니다.
1942년에도 같은 침묵이 계속됩니다. 그리고 그해 12월, 인류 최초의 원자로가 임계 상태에 도달합니다. 1943년,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노벨위원회는 다시 상을 수여하기 시작합니다.
3년의 침묵이 끝나는 그 시점에, 세상은 이미 되돌릴 수 없는 방향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 파트 8. 1941년의 물리학 지식 — 이미 알고 있던 것들
1941년 당시 물리학이 이미 알고 있던 것들을 정리해보면, 그 지식이 얼마나 강력한 힘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E=mc². 질량과 에너지가 동등하다는 아인슈타인의 1905년 공식. 이것이 핵물리학의 에너지 계산에 사용되었습니다. 핵분열에서 잃어버리는 질량이 에너지로 전환된다는 것. 작은 질량 차이가 엄청난 에너지가 된다는 것. 우라늄 1킬로그램의 완전 핵분열이 TNT 약 2만 톤의 에너지와 같다는 계산.
불확정성 원리와 터널 효과. 양자역학이 예측한 터널 효과는 알파 붕괴를 설명하고, 이것이 방사성 원소의 특성을 이해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핵무기 설계에서 터널 효과를 고려해야 했습니다.
중성자의 느린 중성자 효과. 페르미가 발견한 것. 이것이 원자로 설계에서 감속재를 사용하는 이유였습니다.
임계 질량. 핵분열 연쇄 반응이 스스로 유지되기 위한 최소 물질량. 프리쉬와 페이얼스가 1940년 계산한 것. 이것이 핵폭탄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모든 지식이 1941년 이미 물리학자들의 머릿속에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실제로 구현하는 공학적, 산업적 과제였습니다. 맨해튼 프로젝트는 그 과제를 해결하는 3년의 여정이었습니다.
독일의 핵 연구 — 다른 방향
1941년 독일에서도 핵물리학 연구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하이젠베르크가 이끄는 우라늄 클럽. 독일도 핵분열 연쇄 반응을 연구했습니다. 하지만 독일의 접근 방식은 미국과 달랐습니다.
독일은 중수소 중수를 감속재로 사용하는 방식을 연구했습니다. 중수는 물보다 중성자를 잘 감속시킵니다. 하지만 노르웨이의 중수 공장이 연합군의 특수부대에 의해 파괴되면서 공급이 끊겼습니다.
또한 독일은 흑연을 감속재로 사용하는 것을 잘못된 계산으로 포기했습니다. 페르미가 미국에서 흑연 감속재로 성공한 것과 달리, 독일의 계산이 틀렸습니다. 흑연의 순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불순물이 많은 흑연은 중성자를 흡수해서 감속재로 부적합합니다. 독일의 흑연이 불순물이 많았고, 그 결과 흑연 감속재를 포기한 것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독일은 임계 상태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하이젠베르크가 의도적으로 연구를 방해했는지, 아니면 단순히 자원과 기술의 한계였는지는 여전히 논쟁 중입니다. 팜 홀 녹음 — 전쟁 후 영국에 억류된 독일 핵 과학자들의 대화 녹음 — 은 그들이 히로시마 원폭 소식을 듣고 놀랐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만약 의도적으로 방해했다면 놀랄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일본의 핵 연구
일본도 핵폭탄 개발을 시도했습니다. 육군의 니-고 프로젝트와 해군의 F-고 프로젝트.
니시나 요시오가 이끄는 팀이 이화학연구소에서 연구했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우라늄 원료를 충분히 구하지 못했고, 자원과 산업 능력에서 미국에 훨씬 뒤졌습니다.
결국 일본도 임계 상태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세 나라가 핵무기를 향해 달렸지만, 먼저 도착한 것은 미국이었습니다. 그리고 미국이 만든 폭탄이 독일이 아니라 일본에 투하되었습니다. 독일은 이미 1945년 5월에 항복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과학자들의 책임 논쟁
1941년 맨해튼 프로젝트가 시작되면서 많은 과학자들이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이것이 옳은 일인가?
한편에서는 독일이 먼저 핵폭탄을 만들면 나치가 세계를 지배할 것이라는 공포가 있었습니다. 유대계 망명 과학자들은 특히 이 두려움을 강하게 느꼈습니다. 나치가 원자폭탄을 가지면 어떻게 될지 상상조차 하기 싫었습니다.
다른 한편에서는 이것이 결국 민간인 대량 학살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습니다. 레오 실라르드는 1941년부터 이미 이 걱정을 했습니다. 핵폭탄은 군사 목표물만이 아니라 도시 전체를 파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딜레마는 1945년 폭탄이 완성되고 사용될 준비가 되었을 때 더 심각해졌습니다. 몇몇 과학자들이 일본에 경고 없이 사용하는 것에 반대하는 청원을 했습니다. 하지만 결정은 정치가들이 했습니다.
과학자들이 자신의 발견이 어떻게 사용될지 통제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이 1941년에 가장 날카롭게 제기되었고, 지금도 답이 없습니다.
📜 파트 9. 앨런 튜링과 암호 해독 — 또 다른 물리학자들
1941년 물리학과 수학이 전쟁에서 보여준 또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암호 해독.
영국 블레츨리 파크에서 앨런 튜링과 동료들이 독일의 에니그마 암호 기계를 해독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에니그마는 수학적으로 극히 복잡한 암호 체계였습니다.
튜링은 수학자였지만 물리적 기계를 설계했습니다. 봄브라는 전기기계식 계산기. 에니그마의 가능한 설정들을 빠르게 순환하면서 맞는 설정을 찾는 기계였습니다.
나중에 더 발전된 콜로서스가 만들어졌습니다. 독일의 더 복잡한 로렌츠 암호를 해독하기 위한 기계. 이것이 세계 최초의 프로그래밍 가능한 전자식 컴퓨터로 평가받습니다.
암호 해독에서 얻은 정보가 전쟁의 경과에 결정적이었습니다. 연합국이 독일의 U보트 작전을 미리 알고 대응할 수 있었습니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서도 암호 해독 정보가 사용되었습니다.
튜링은 컴퓨터 과학의 아버지로 불립니다. 그가 1941년 전쟁 중 개발한 계산 기계들이 현대 컴퓨터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노벨상이 없는 해에, 과학이 세계를 구하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기초를 놓았습니다.
📜 파트 10. 전쟁이 낳은 기술들 — 역설적 유산
1941년 전쟁 중에 진행된 연구들이 전후 세계를 어떻게 바꾸었는지 살펴봅니다.
레이더가 위성항법으로 이어졌습니다. 전쟁 중 발전한 전자기파 기술이 전후 레이더 천문학, 전파 망원경, GPS 기술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스마트폰으로 길을 찾는 것이 1941년 레이더 기술과 연결됩니다.
암호 해독이 컴퓨터 시대를 열었습니다. 앨런 튜링과 블레츨리 파크의 동료들이 암호 해독을 위해 만든 계산 기계들이 현대 컴퓨터의 선구자가 되었습니다. 1941년의 전쟁이 컴퓨터 시대를 앞당겼습니다.
맨해튼 프로젝트가 빅 사이언스를 만들었습니다. 정부가 막대한 자금을 투자해서 수천 명의 과학자를 한 목표로 조직하는 방식. 이것이 전후 냉전 시대의 우주 경쟁, 인간 게놈 프로젝트, LHC 프로젝트로 이어졌습니다.
이 모든 것이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이 가져온 기술 가속의 결과입니다. 전쟁이 없었다면 이 기술들이 훨씬 천천히 발전했을 것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인류가 서로를 죽이면서 인류의 삶을 바꿀 기술들을 만들어냈습니다.
노벨상이 없던 1941년. 하지만 그해의 선택들이 지금 우리 세계의 많은 부분을 결정했습니다.
노벨상이 인정하는 것은 인류에 대한 공헌입니다. 그 공헌이 때로는 즉각적으로 보이고, 때로는 수십 년 후에야 드러납니다. 물리학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발견들은 발견 당시에는 그 의미를 완전히 알 수 없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깊은 의미가 드러났습니다. 그것이 기초 과학 연구의 본질입니다. 당장의 응용을 넘어서, 자연의 근본 원리를 이해하는 것. 그 이해가 쌓여서 새로운 기술이 되고, 새로운 의학이 되고, 새로운 세계관이 됩니다.
물리학의 이야기는 이 한 해로 끝나지 않습니다. 각각의 발견이 다음 발견으로 이어지고, 각각의 물리학자가 다음 세대의 어깨 위에 올라섭니다. 그렇게 인류의 지식이 쌓여갑니다. 멈추지 않고,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과학은 혼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한 과학자의 발견 위에 다른 과학자가 서고, 그 위에 또 다른 과학자가 섭니다. 이것이 뉴턴이 말한 '거인의 어깨 위에 서는 것'입니다. 채드윅이 러더퍼드의 예언 위에 섰고, 앤더슨이 헤스의 발견 위에 섰으며, 디랙이 하이젠베르크와 슈뢰딩거의 이론 위에 섰습니다. 과학은 이렇게 세대를 넘어 이어집니다. 노벨상은 그 과정에서 특히 빛나는 순간들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 순간들 뒤에는 수많은 다른 과학자들의 노력이 있었습니다. 알려진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이름도 모두 함께 지식의 탑을 쌓았습니다. 그것이 과학의 공동 작업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지금도 계속됩니다. 오늘도 세계 곳곳의 실험실에서 새로운 발견을 향한 실험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미래의 물리학자들이 지금은 상상도 못하는 발견을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발견들이 또 세상을 바꿀 것입니다. 채드윅의 중성자가 핵의학을 만들었듯이, 아직 알지 못하는 미래의 발견들이 미래의 의학을 만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