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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0_New Novel/311_[NEW] 노벨물리학상

[1942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없음 : 세계 최초의 원자로가 임계 상태에 이른 해, 물리학은 인류에게 가장 강력한 도구를 안겨주었다

by 어셈블러 2026. 5.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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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12월 10일.

또다시 노벨 물리학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날로부터 불과 이틀 전인 12월 2일, 물리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가 일어났습니다. 시카고 대학교 지하에서 인류 최초의 인공 핵반응로 CP-1이 임계 상태에 도달한 것입니다.

노벨위원회가 침묵을 지키는 동안, 물리학자들은 세계를 바꾸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노벨상의 빈자리와 원자로의 가동이 같은 날 교차한 것은, 이 시기 과학과 세계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전쟁이 과학을 삼켰습니다. 과학이 전쟁의 방향을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만들어진 세계 속에서 우리는 지금도 살고 있습니다.


 

📜 파트 1. 1942년 12월 2일 — 핵 시대의 시작

 

시카고 스태그 필드 스타디움의 지하.

이 공간은 원래 대학 스쿼시 코트였습니다. 전쟁으로 운동 시설이 문을 닫으면서 비어있었고, 보안을 유지하기에 좋았습니다.

엔리코 페르미의 지휘 아래, 수십 명의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몇 주에 걸쳐 원자로를 만들었습니다. CP-1, 시카고 파일 1. 흑연 벽돌을 쌓고 사이에 우라늄 금속과 우라늄 산화물을 배치했습니다. 흑연이 감속재였습니다. 카드뮴으로 만든 제어봉이 반응을 통제했습니다.

12월 2일 오전부터 실험이 시작되었습니다. 제어봉을 조금씩 뽑아가면서 중성자 수를 측정했습니다. 중성자 계수기의 값이 점점 올라갔습니다.

오후 3시 25분. 제어봉이 충분히 빠져나왔습니다. 중성자 계수기가 계속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일정 수준을 넘어서자 스스로 유지되기 시작했습니다. 임계 상태. 핵분열의 연쇄 반응이 인간의 통제 하에 처음으로 지속되는 순간이었습니다.

28분 후, 제어봉이 다시 삽입되면서 반응이 멈추었습니다. 당시 발생한 전력은 0.5와트에 불과했습니다. 작은 전구 하나를 켜기에도 부족한 양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원리가 증명된 것입니다.

페르미는 전화로 코드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이탈리아 선원이 새로운 세계에 도착했습니다. 원주민들은 우호적이었습니다."

 

 

맨해튼 프로젝트 책임자 아서 콤튼이 이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그는 제임스 코넌트 하버드 총장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이탈리아 선원이 방금 새로운 세계에 도착했습니다."

 

 

 

 

"항해는 어땠습니까?"

 

 

 

 

"매우 잘 되었습니다."

 

 

코드로 이루어진 대화. 하지만 두 사람 모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습니다. 핵에너지의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원자로의 원리

 

CP-1이 어떻게 작동했는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라늄-235 원자핵이 중성자를 흡수하면 핵분열이 일어납니다. 핵이 두 개로 쪼개지고, 에너지와 함께 2~3개의 새로운 중성자가 방출됩니다. 이 중성자들이 다른 우라늄-235 원자핵에 흡수되면 또 핵분열이 일어납니다. 연쇄 반응입니다.

이 연쇄 반응이 스스로 유지되는 조건이 임계 상태입니다. 방출된 중성자 중 평균 하나 이상이 다음 핵분열을 일으키면 연쇄 반응이 지속됩니다. 하나보다 적으면 반응이 사그라들고, 하나보다 많으면 폭발적으로 증가합니다.

원자로는 이것을 정확히 하나로 유지하는 장치입니다. 제어봉이 중성자를 흡수해서 연쇄 반응을 조절합니다.

페르미가 1934년 발견한 느린 중성자가 핵분열을 더 잘 일으킨다는 원리가 여기서 사용되었습니다. 흑연 감속재가 중성자를 느리게 해서 핵분열 효율을 높입니다.

이 원리가 그대로 오늘날 전 세계 원자력 발전소에서 사용됩니다. 70년이 넘도록 바뀌지 않은 기본 원리입니다.


 

📜 파트 2. 1942년의 전쟁 — 전환점

 

1942년은 전쟁의 전환점이었습니다. 추축국의 공세가 절정에 달했다가 꺾이기 시작한 해였습니다.

태평양에서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이 일어났습니다. 일본 해군이 미드웨이 섬을 공격했지만, 미국이 일본의 작전 계획을 암호 해독으로 미리 알고 있었습니다. 미국 항공모함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일본 항공모함 4척이 침몰했습니다. 태평양의 제해권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북아프리카에서 1942년 10월 엘알라메인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영국의 몽고메리 장군이 롬멜의 독일-이탈리아군을 격파했습니다.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추축국이 처음으로 대규모 패배를 당했습니다.

동부 전선에서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계속되었습니다. 독일 제6군이 스탈린그라드를 점령하려 했지만, 소련군이 완강히 저항했습니다. 11월, 소련군이 대규모 역공을 펼쳐 독일 제6군을 포위했습니다. 이것이 전쟁의 가장 큰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1943년 2월 독일 제6군이 항복했습니다. 동부 전선의 주도권이 소련으로 넘어갔습니다.

연합국이 반격을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전쟁의 방향이 바뀌고 있었습니다.

 

홀로코스트의 본격화

 

1942년은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가 체계적으로 진행된 해였습니다.

1942년 1월 반제 회의에서 나치 지도부가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책 — 실제로는 체계적 학살을 의미했습니다 — 을 결정했습니다. 폴란드에 절멸 수용소들이 건설되고 가동되었습니다.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트레블링카, 소비보르, 마이다넥.

유럽 전역에서 유대인들이 체포되어 이 수용소들로 이송되었습니다. 가스실에서 집단 학살이 이루어졌습니다.

세계대전 중 이루어진 이 범죄는 당시 전 세계에 완전히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연합국도 그 규모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수용소 생존자들의 증언과 해방 후 수용소 발견으로 비로소 그 전모가 드러났습니다.

이 역사적 사실이 1942년의 맥락에서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한 많은 과학자들이 유대인이었고, 그들이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습니다. 그들이 핵폭탄 개발에 참여한 동기 중 하나는 히틀러보다 먼저 핵무기를 갖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독일이 먼저 핵폭탄을 만들면 그 결과가 어떨지 그들은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 파트 3. 맨해튼 프로젝트 — 전속력

 

1942년 맨해튼 프로젝트는 전속력으로 가동되고 있었습니다.

세 곳의 비밀 시설이 동시에 건설되었습니다.

테네시주 오크리지. 우라늄 농축 시설. 우라늄-235를 분리하는 전자기 분리기와 기체 확산 장치가 설치되었습니다. 거대한 규모였습니다. 이 시설 건설에 동원된 사람 수가 수만 명이었습니다.

워싱턴주 핸퍼드. 플루토늄 생산 시설. 여기서 대형 원자로를 이용해 우라늄에서 플루토늄을 만들었습니다. 콜럼비아 강의 물이 냉각수로 사용되었습니다.

뉴멕시코주 로스앨러모스. 핵폭탄 설계 연구소. 오펜하이머가 지휘하는 이곳에서 과학자들이 핵폭탄 설계를 연구했습니다.

세 곳이 동시에, 비밀리에 진행되었습니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사람들은 자신이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른 채 일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구획화 secrecy. 필요한 것만 알게 하는 보안 시스템.

프로젝트의 총 비용은 전쟁 중 약 20억 달러에 달했습니다. 오늘날 가치로 약 300억 달러 이상. 당시로는 상상을 초월하는 투자였습니다.

페르미의 CP-1 성공은 이 프로젝트에 결정적인 확신을 주었습니다. 연쇄 반응이 통제 가능하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이제 그것을 폭발적으로 일어나게 하는 것이 다음 과제였습니다.


 

📜 파트 4. 레이더와 마이크로파 — 전쟁이 낳은 기술

 

1942년 미국에서는 전쟁 연구의 중심지인 MIT 방사선 연구소에서 레이더 기술이 빠르게 발전했습니다.

연구소 이름이 '방사선 연구소'인 것은 보안상의 위장이었습니다. 실제로는 레이더 연구소였습니다. 방사선이라고 하면 핵 관련으로 생각하지, 레이더와 연결 짓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이곳에서 수십 종의 레이더 시스템이 개발되었습니다. 항공기 탐지, 잠수함 탐지, 포격 조준, 항법 — 다양한 군사 용도로 레이더가 응용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마이크로파의 성질이 깊이 연구되었습니다. 마이크로파가 물 분자와 상호작용하는 방식, 마이크로파 공진 현상, 마이크로파 전파 특성. 이 모든 지식이 축적되었습니다.

전후 이 지식이 새로운 방향으로 응용되었습니다. 마이크로파 분광학은 분자 구조를 분석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핵자기공명 분광학도 마이크로파 기술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위성통신에서 마이크로파가 사용됩니다. 그리고 전자레인지.

퍼시 스펜서는 레이더용 마그네트론을 연구하던 중 주머니에 있던 초콜릿 바가 녹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마이크로파가 초콜릿 속의 지방과 당을 가열한 것이었습니다. 1945년의 이 우연한 발견이 1947년 첫 번째 상업용 전자레인지로 이어졌습니다. 처음에는 냉장고 크기에 가격이 수천 달러였지만, 점점 작고 저렴해지면서 지금은 모든 부엌에 있습니다.

전쟁의 도구가 부엌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 파트 5. 1942년의 다른 과학들

 

핵물리학과 레이더만이 1942년 과학의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페니실린의 대량 생산이 1942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알렉산더 플레밍이 1928년 발견한 페니실린은 14년 동안 의료에 활용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대량으로 안정적으로 생산하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전쟁 중 부상병들의 감염이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전쟁 전에는 감염으로 죽는 병사가 총상으로 죽는 병사만큼 많았습니다. 페니실린이 이것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미국 정부는 대량 생산 기술 개발을 긴급 과제로 삼았습니다.

1942년부터 여러 제약회사들이 경쟁적으로 페니실린 발효 기술을 개선했습니다. 1943년에는 충분한 양이 생산되어 전방 병원에 공급되기 시작했습니다. 수십만 명의 부상병이 페니실린 덕분에 살았습니다.

항생제 시대의 시작이었습니다. 이후 스트렙토마이신, 테트라사이클린 등 다양한 항생제가 개발되어 수백만 명의 생명을 구했습니다.

 

초기 컴퓨터의 발전

 

1942년 존 맥클라키와 존 에커트가 에니악의 전신이 되는 계산기를 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에니악은 1945년 완성되었습니다.

영국에서는 블레츨리 파크에서 콜로서스가 개발되었습니다. 독일의 로렌츠 암호 기계를 해독하기 위한 특수 목적 계산기였습니다. 이것이 세계 최초의 프로그래밍 가능한 전자식 컴퓨터로 평가받습니다.

이 초기 컴퓨터들이 현대 컴퓨터의 기원입니다. 전쟁이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정보 처리 기계를 만드는 긴급한 필요를 만들었고, 그것이 디지털 시대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 파트 6. 과학의 동원 — 새로운 시대의 시작

 

제2차 세계대전은 과학과 국가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꾸었습니다.

이전까지 대부분의 과학 연구는 대학이나 소규모 연구소에서 개인 과학자들이 독립적으로 수행했습니다. 국가가 과학에 관심을 가지기는 했지만, 직접 관리하고 동원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전쟁은 이것을 완전히 바꾸었습니다. 레이더, 핵무기, 페니실린, 컴퓨터 — 이 모든 것이 국가가 과학자들을 동원하고 막대한 자원을 쏟아부은 결과였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이 방식이 과학 연구의 표준이 되었습니다. 미국 국립과학재단, 국방고등연구계획국 — 오늘날 DARPA — 같은 기관들이 생겨났습니다. 정부가 과학 연구에 막대한 자금을 지원하는 빅 사이언스의 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것의 장점은 명확합니다. 레이더나 핵물리학처럼 막대한 투자가 필요한 연구가 가능해졌습니다. 세계 최대의 가속기 LHC, 제임스 웹 우주 망원경, 인간 게놈 프로젝트 — 이런 것들은 국가적 지원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단점도 있습니다. 과학이 국가의 목표에 종속될 위험이 있습니다. 군사 연구에 자원이 집중되면 기초 과학이 소외될 수 있습니다. 과학자들이 자신의 연구가 어떻게 사용될지 통제하기 어려워집니다.

이 긴장이 1942년에 시작되었고, 지금도 계속됩니다.


 

📜 파트 7. 노벨상 없는 세 해가 남긴 것

 

1940, 1941, 1942 — 세 해 동안 노벨 물리학상은 수여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3년 동안 물리학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기술들이 탄생했습니다.

세계 최초의 원자로가 가동되었습니다. 레이더가 전쟁을 바꾸고, 전후 전자레인지와 위성통신을 낳았습니다. 페니실린의 대량 생산이 시작되어 수십만 명의 생명을 구했습니다. 초기 컴퓨터가 개발되어 디지털 시대의 씨앗이 뿌려졌습니다.

노벨상의 침묵이 과학의 침묵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세계가 스스로를 파괴하는 동안에도 과학자들이 묵묵히 일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줍니다.

하지만 그 일의 방향에 대해 우리는 지금도 질문해야 합니다. 과학이 전쟁의 도구가 되었을 때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었는가. 핵에너지라는 강력한 도구를 얻었지만, 핵무기라는 위협도 함께 얻었습니다. 레이더를 얻었지만, 더 정밀한 폭격 능력도 얻었습니다.

1943년부터 노벨위원회는 다시 시상을 시작합니다. 세 해의 상금은 각 해의 특별 기금으로 이월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시상이 재개되었을 때, 세계는 원자폭탄 이전과 이후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과학이 만든 가장 파괴적인 무기가 두 도시를 재로 만든 후였습니다. 노벨위원회가 다시 시상을 시작하면서 인류에 대한 공헌이라는 원래의 가치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더 무거워졌습니다.

세 해의 침묵이 끝났을 때, 세상은 이미 달라져 있었습니다. 핵의 시대, 디지털의 씨앗, 항생제의 시작, 레이더 위의 세계. 노벨이 꿈꾼 인류에 대한 공헌이라는 이상이, 전쟁이 만들어낸 기술들을 어떻게 포용하거나 거부해야 하는지를 묻고 있었습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아직 우리는 완전히 갖고 있지 않습니다.


 

📜 파트 5. CP-1 이후 — 원자력의 시대

 

CP-1의 성공 이후 맨해튼 프로젝트는 더 큰 원자로 건설로 나아갔습니다.

X-10 흑연 원자로가 오크리지에 건설되었습니다. CP-1보다 수천 배 강력한 원자로였습니다. 이것이 플루토늄 생산에 사용되었습니다.

핸퍼드에는 B 원자로가 건설되었습니다. 콜럼비아 강물을 냉각수로 사용하는 거대한 원자로였습니다. 나가사키 원폭에 사용된 플루토늄이 여기서 만들어졌습니다.

원자로 기술은 전후 민간 발전으로 이어졌습니다. 1956년 영국에서 세계 최초의 상업용 원자력 발전소가 가동되었습니다. 1957년 미국에서 첫 번째 상업용 원자력 발전소가 가동되었습니다. 그리고 현재 전 세계에 약 440개의 원자력 발전소가 있습니다.

페르미가 1942년 12월 2일 달성한 임계 상태. 그 0.5와트의 출력이 현재 수천 메가와트의 발전소들의 출발점이었습니다.

 

핵에너지의 두 얼굴

 

페르미의 CP-1이 달성한 것은 핵에너지의 통제 가능성이었습니다. 그것이 평화적으로 사용되면 전기를 만들고, 군사적으로 사용되면 핵무기가 됩니다.

원자력 발전은 탄소 배출이 없는 발전원으로, 기후 변화 시대에 다시 주목받고 있습니다. 최신의 소형 모듈 원자로들이 개발되고 있습니다. 핵융합 발전도 기술적 장벽을 낮추고 있습니다.

하지만 체르노빌과 후쿠시마 같은 사고들이 원자력의 위험성을 상기시킵니다. 방사성 폐기물 처리 문제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이 1942년 12월 2일 시카고의 지하였습니다.

 

과학과 역사의 교차점

 

1942년은 과학이 역사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 가장 직접적으로 관여한 해 중 하나였습니다.

페르미의 원자로가 임계에 도달한 것은 단순한 실험실 성공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맨해튼 프로젝트를 본격적으로 가동시키는 결정적 증거가 되었습니다. 연쇄 반응이 통제 가능하다는 것이 증명되었으니, 이제 폭발적 연쇄 반응도 가능하다는 확신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스탈린그라드, 미드웨이, 엘알라메인 — 전쟁의 전환점들이 1942년에 모두 일어났습니다. 과학과 군사 전략이 동시에 전쟁의 방향을 바꾸고 있었습니다.

레이더가 잠수함을 잡았습니다. 페니실린이 부상병을 살렸습니다. 원자로가 핵폭탄의 가능성을 증명했습니다. 암호 해독이 전략적 정보를 제공했습니다. 1942년은 과학이 전쟁의 승패를 결정하는 요소임이 완전히 드러난 해였습니다.

이후 냉전 시대는 두 강대국의 과학기술 경쟁으로 정의되었습니다. 핵무기, 우주 경쟁, 컴퓨터 기술. 그 경쟁의 출발점이 1942년의 전쟁에 있었습니다.

 

1942년을 살았던 과학자들의 시선

 

1942년 세계 최초의 원자로가 임계에 도달하던 그 순간, 그 자리에 있던 과학자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페르미는 "이탈리아 선원이 새로운 세계에 도착했습니다"라는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흥분된 표현이었지만, 동시에 새로운 세계가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실라르드는 그 자리에서 페르미와 악수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회고하기를, 그날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어두운 날 중 하나였다고 했습니다. 핵에너지가 무기로 사용될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연구를 멈추려 했지만 혼자서는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과학자의 딜레마입니다. 자연의 비밀을 밝히는 순수한 탐구가 어느 순간 돌이킬 수 없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그 결과를 멈출 수 없을 때, 과학자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노벨이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하고 그 무기 사용에 충격을 받아 노벨상을 만들었다는 이야기처럼, 많은 과학자들이 자신의 발견의 이중성을 직면했습니다. 1942년은 그런 순간 중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그 3년의 침묵 끝에, 1943년부터 노벨위원회는 다시 인류에 대한 공헌을 기리기 시작합니다. 전쟁이 끝나지 않았지만, 과학의 가치를 인정하는 일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결정이었습니다.


 

📜 파트 6. 핵에너지의 미래 — CP-1에서 핵융합까지

 

페르미의 CP-1이 임계 상태에 도달한 1942년 12월 2일. 그 순간이 열어놓은 핵에너지의 가능성은 80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 탐구되고 있습니다.

핵분열 발전은 현재 전 세계 전력의 약 10%를 공급합니다. 탄소 배출 없이 대규모로 전기를 생산하는 방법으로, 기후 변화 대응에서 다시 주목받고 있습니다. 소형 모듈 원자로, 고온 가스 원자로, 4세대 원자로 등 새로운 기술들이 개발되고 있습니다.

핵융합은 다른 방향입니다. 수소 원자핵들이 합쳐져서 헬륨이 될 때 나오는 에너지. 태양이 에너지를 만드는 방식. 핵분열보다 훨씬 많은 에너지를 만들고, 위험한 방사성 폐기물도 훨씬 적습니다. 수십 년간 꿈의 에너지원이었습니다.

2022년 말, 미국 국립점화시설에서 핵융합 점화에 성공했습니다. 투입한 에너지보다 더 많은 에너지가 나온 것이었습니다. 페르미의 CP-1이 핵분열로 임계 상태를 달성한 것처럼, NIF가 핵융합으로 점화에 성공한 것입니다. 핵융합 발전의 실현이 한 걸음 더 가까워졌습니다.

페르미가 1942년 달성한 것의 메아리가 80년 후에도 계속 울리고 있습니다. 그 0.5와트의 작은 출력이 앞으로 어디까지 이어질지, 아직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노벨상이 인정하는 것은 인류에 대한 공헌입니다. 그 공헌이 때로는 즉각적으로 보이고, 때로는 수십 년 후에야 드러납니다. 물리학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발견들은 발견 당시에는 그 의미를 완전히 알 수 없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깊은 의미가 드러났습니다. 그것이 기초 과학 연구의 본질입니다. 당장의 응용을 넘어서, 자연의 근본 원리를 이해하는 것. 그 이해가 쌓여서 새로운 기술이 되고, 새로운 의학이 되고, 새로운 세계관이 됩니다.

물리학의 이야기는 이 한 해로 끝나지 않습니다. 각각의 발견이 다음 발견으로 이어지고, 각각의 물리학자가 다음 세대의 어깨 위에 올라섭니다. 그렇게 인류의 지식이 쌓여갑니다. 멈추지 않고,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과학은 혼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한 과학자의 발견 위에 다른 과학자가 서고, 그 위에 또 다른 과학자가 섭니다. 이것이 뉴턴이 말한 '거인의 어깨 위에 서는 것'입니다. 채드윅이 러더퍼드의 예언 위에 섰고, 앤더슨이 헤스의 발견 위에 섰으며, 디랙이 하이젠베르크와 슈뢰딩거의 이론 위에 섰습니다. 과학은 이렇게 세대를 넘어 이어집니다. 노벨상은 그 과정에서 특히 빛나는 순간들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 순간들 뒤에는 수많은 다른 과학자들의 노력이 있었습니다. 알려진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이름도 모두 함께 지식의 탑을 쌓았습니다. 그것이 과학의 공동 작업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지금도 계속됩니다. 오늘도 세계 곳곳의 실험실에서 새로운 발견을 향한 실험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미래의 물리학자들이 지금은 상상도 못하는 발견을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발견들이 또 세상을 바꿀 것입니다. 채드윅의 중성자가 핵의학을 만들었듯이, 아직 알지 못하는 미래의 발견들이 미래의 의학을 만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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