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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_Novel/305_노벨화학상

[2016 노벨화학상] 장 피에르 소바주, 프레이저 스토다트, 벤 페링하 : 세상에서 가장 작은 기계, '분자 기계'의 탄생

by 어셈블러 2025. 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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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이지 않는 모터가 돌아간다"

 

인류의 역사는 도구와 기계의 역사입니다. 증기 기관의 발명은 산업 혁명을 일으켰고, 전기 모터의 발명은 현대 문명을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기계의 크기를 계속 줄이고 줄여서, 눈에 보이지 않는 분자 크기까지 줄인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리처드 파인만은 1959년 "바닥에는 아직 풍요로운 공간이 있다(There's plenty of room at the bottom)"며 나노 세계의 가능성을 예언했습니다.

하지만 화학자들에게는 큰 난관이 있었습니다. 분자들은 가만히 있지 않고 미친 듯이 움직이는 데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제어하기가 너무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분자를 톱니바퀴나 피스톤처럼 조립해서, 에너지를 주면 '일(Work)'을 하게 만들 수 있을까?"

오늘 소개할 2016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들은 이 꿈을 현실로 만든 '나노 세계의 엔지니어'들입니다.

두 개의 분자 고리를 사슬처럼 엮어낸 프랑스의 장 피에르 소바주(Jean-Pierre Sauvage). 분자를 축에 끼워 엘리베이터처럼 움직이게 한 영국의 프레이저 스토다트(Sir J. Fraser Stoddart). 그리고 한쪽 방향으로 회전하는 분자 모터를 만들어 나노 자동차를 굴린 네덜란드의 벤 페링하(Bernard L. Feringa).

정지해 있던 화학 분자에 '움직임(Movement)' 을 부여하여, 영화 <이너스페이스>나 <마이크로 결사대>의 상상을 현실로 앞당긴 그들의 마법 같은 조립 과정을 소개합니다.

 

📜 장 피에르 소바주 : 화학 결합이 아닌 '기계적 결합'

 

이야기의 시작은 1983년 프랑스입니다. 화학자들은 오랫동안 두 개의 고리 분자를 사슬처럼 연결하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확률적으로 두 고리가 우연히 겹쳐질 때 본드를 붙이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장 피에르 소바주는 여기서 기막힌 꾀를 냅니다. 바로 '구리 이온(Cu+)' 을 미끼로 쓰는 것이었습니다.

[ 소바주의 마법 ]

  1. 반원 모양의 분자 두 개를 준비합니다.
  2. 가운데에 구리 이온을 놓습니다.
  3. 그러면 분자들은 구리 이온을 좋아해서 그 주변으로 모여들어 둥글게 얽힙니다.
  4. 이때 양 끝을 화학적으로 이어 붙이면 완벽한 '사슬(Chain)' 이 됩니다.
  5. 마지막으로 구리 이온을 쏙 빼냅니다.

남은 것은 두 개의 고리가 서로 얽혀 있는 구조였습니다. 소바주는 이를 '카테난(Catenane)' 이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혁명이었습니다. 두 고리는 화학적으로 본드칠(공유 결합)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저 물리적으로 얽혀서 풀리지 않을 뿐입니다. 이것을 '기계적 결합(Mechanical Bond)' 이라고 합니다. 이 느슨한 결합 덕분에 두 고리는 서로를 따라 빙글빙글 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계의 '부품'이 탄생한 것입니다.

 

🧐 프레이저 스토다트 : 분자 엘리베이터를 만들다

 

1991년, 영국의 프레이저 스토다트는 소바주의 아이디어를 한 단계 더 발전시킵니다. "고리 두 개를 엮는 것 말고, 긴 막대기(축)에 고리(바퀴)를 끼우면 어떨까?"

그는 전자가 부족한 막대기와 전자가 풍부한 고리를 이용해, 막대기 위에 고리를 끼워 넣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고리가 빠지지 않도록 막대기 양 끝에 뚱뚱한 마개를 달았습니다.

이 구조를 '로탁세인(Rotaxane)' 이라고 합니다. 스토다트는 여기에 열이나 산성도 같은 자극을 주어, 고리가 막대기의 왼쪽 끝에서 오른쪽 끝으로 왔다 갔다 하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분자 수준의 '피스톤'이자 '엘리베이터'다!"

그는 이 원리를 이용해 0.7나노미터 높이를 오르내리는 '분자 승강기' 와, 인공 근육처럼 수축하고 이완하는 '분자 근육' 을 만들어냈습니다. 심지어 이를 이용해 초미세 컴퓨터 칩(20kB 메모리)을 구현하기도 했습니다.

 

⚡️ 벤 페링하 : 한쪽으로만 도는 '모터'와 '나노카'

 

부품(카테난)과 피스톤(로탁세인)은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기계가 되려면 스스로 동력을 내는 '모터(Motor)' 가 필요했습니다. 문제는 분자 세계의 무질서함이었습니다. 분자를 회전시키면 오른쪽으로 돌았다가 왼쪽으로 돌았다가 제멋대로 춤을 춥니다.

1999년, 네덜란드의 벤 페링하는 이 랜덤한 움직임을 통제하는 데 성공합니다. 그는 이중 결합으로 연결된 날개 모양의 분자를 만들고, 여기에 자외선(빛)을 쏘았습니다.

  1. 빛을 받으면 분자가 180도 회전합니다. (여기까진 평범합니다.)
  2. 하지만 페링하는 분자 구조를 톱니바퀴(라쳇)처럼 교묘하게 비틀어 놓아서, 절대로 뒤로는 못 돌아가게(역회전 방지) 만들었습니다.
  3. 다시 빛을 쏘면 또 앞으로 180도 돕니다.

결과적으로 이 분자는 한쪽 방향으로만 360도 빙글빙글 도는 '분자 모터(Molecular Motor)' 가 되었습니다. 분당 1,200만 번이나 회전하는 강력한 엔진이었습니다.

2011년, 페링하는 이 모터 4개를 바퀴로 달고 나노 차체(Chassis)를 얹어서 '나노카(Nanocar)' 를 만들었습니다. 이 자동차는 전기를 가하자 금속 표면 위를 실제로 주행했습니다. 인류 최초의 분자 자동차 드라이빙이었습니다.

 

🏆 노벨상 : 나노 혁명의 서막

 

2016년, 스웨덴 왕립과학원은 장 피에르 소바주, 프레이저 스토다트, 벤 페링하에게 노벨 화학상을 수여합니다. 수상 이유는 "분자 기계의 설계와 합성" 이었습니다.

노벨 위원회는 "이들은 화학을 평형 상태(정지)에서 비평형 상태(움직임)로 끌어냈다"고 평가했습니다. 이들의 업적은 1830년대 전기 모터가 처음 발명되었을 때와 비교됩니다. 당시 사람들은 "빙빙 도는 장난감으로 뭘 해?"라고 물었지만, 오늘날 우리는 모터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분자 기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기초 단계지만, 미래에는:

  • 의료용 나노로봇: 혈관을 타고 들어가 암세포만 찾아 터뜨리는 로봇.
  • 스마트 소재: 흠집이 나면 스스로 움직여 복구하는 자동차 도장.
  • 분자 컴퓨터: 실리콘 칩보다 수천 배 집적도가 높은 컴퓨터.

 

📚 TMI : 기사 작위와 나노카 레이스

 

1. 스토다트 경(Sir)

프레이저 스토다트는 이 공로를 인정받아 영국 여왕으로부터 기사 작위(Knight Bachelor)를 받았습니다. 그는 평생 1,000편이 넘는 논문을 썼고, 자신의 연구실 출신 제자들을 전 세계 교수로 보낸 '화학계의 대부'입니다.

2. 나노카 레이스

2017년 프랑스 툴루즈에서는 세계 최초의 '나노카 레이스' 가 열렸습니다. 페링하의 나노카를 비롯해 전 세계 6개 팀이 참가했습니다. 금 위에서 분자 자동차를 굴려 100나노미터(머리카락 1/1000)를 누가 빨리 완주하나 겨루는 대회였습니다. (참고로 완주하는 데 몇 시간이 걸렸습니다.)

3. 소바주의 영감

소바주는 카테난 구조의 영감을 '예술' 에서 얻었다고 합니다. 켈트족의 매듭 문양이나 현대 미술 작품을 보며, "저렇게 꼬인 것을 분자로 만들 수 없을까?"를 고민했다고 합니다. 예술적 상상력이 과학적 실체로 변한 것입니다.

 

🌏 맺음말 : 상상은 현실이 된다

 

장 피에르 소바주, 프레이저 스토다트, 벤 페링하는 우리에게 "작은 것이 더 강력할 수 있다" 는 미래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원자들을 핀셋으로 집어 올리듯 조립하여, 사슬을 묶고, 바퀴를 끼우고, 모터를 달았습니다. 신이 만든 생명체(박테리아의 편모 등)만이 가능했던 기계적 움직임을 인간이 화학적으로 창조해 낸 것입니다.

지금은 실험실 안에서 비틀거리는 작은 자동차에 불과하지만, 이 기술은 머지않아 우리 몸속을 누비고 세상을 구성하는 물질을 스스로 조립하는 '나노봇(Nanobot)' 의 시대를 열어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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