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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_Novel/305_노벨화학상

[2017 노벨화학상] 자크 뒤보셰, 요아힘 프랑크, 리처드 헨더슨 : 생명을 얼려서 찍다, '초저온 전자 현미경'의 혁명

by 어셈블러 2025. 1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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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이지 않던 생명의 얼굴을 HD 화질로 보다"

 

생물학자들의 오랜 꿈은 생명 현상을 일으키는 단백질이나 바이러스의 얼굴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20세기 후반까지, 이들을 보는 방법에는 치명적인 약점들이 있었습니다.

  1. 엑스선 결정학: 아주 선명하지만, 시료를 '결정(Crystal)' 으로 만들어야만 합니다. 억지로 굳히다 보니 자연스러운 모습이 아니고, 결정이 안 되는 녀석들은 볼 수 없었습니다.
  2. 전자 현미경: 배율은 엄청나지만, 강력한 전자빔을 쏘기 때문에 연약한 생체 시료는 타버립니다. 게다가 진공 상태라 수분이 다 증발해서 단백질이 말라비틀어집니다.

"살아있는 것처럼 물을 머금은 채로, 결정도 만들지 않고, 타지도 않게 하면서 원자 하나하나까지 볼 수는 없을까?"

마치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이 모순적인 요구를 현실로 만든 기술이 2010년대에 등장하여 전 세계를 강타했습니다. 바로 '초저온 전자 현미경(Cryo-Electron Microscopy, Cryo-EM)' 입니다.

오늘 소개할 2017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들은 생화학의 풍경을 '흐릿한 흑백 TV'에서 '초고화질 4K TV' 로 바꾼 세 명의 개척자들입니다.

전자 현미경으로도 단백질을 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연 영국의 리처드 헨더슨(Richard Henderson). 흐릿한 2차원 사진들을 모아 선명한 3차원 입체로 만드는 알고리즘을 짠 미국의 요아힘 프랑크(Joachim Frank). 그리고 물을 얼음 결정이 아닌 '유리'처럼 투명하게 얼리는 기적의 기술을 개발한 스위스의 자크 뒤보셰(Jacques Dubochet).

지카 바이러스의 구조부터 생체 시계의 태엽까지, 보이지 않던 모든 것을 보게 만든 '해상도 혁명(Resolution Revolution)' 의 주역들을 소개합니다.

 

📜 리처드 헨더슨 : 불가능에 도전한 끈기

 

1970년대, 케임브리지 대학의 리처드 헨더슨은 난관에 봉착해 있었습니다. 그는 세포막에 박혀 있는 단백질인 '박테리오로돕신' 의 구조를 보고 싶었지만, 이 녀석은 엑스선 결정학을 쓰기에는 너무나 까다로웠습니다.

그는 대안으로 '전자 현미경' 을 선택했습니다. 당시 전자 현미경은 죽은 세포나 금속 표면을 보는 데나 쓰였지, 단백질을 보기엔 너무 거칠었습니다. 전자빔이 닿는 순간 단백질이 파괴되었기 때문입니다.

헨더슨은 역발상을 했습니다.

"전자빔을 아주 약하게 쏘면 어떨까? 파괴되지 않을 만큼만 살살."

물론 그러면 사진이 너무 어둡고 흐릿해서 아무것도 안 보입니다. 하지만 그는 수학적 계산을 통해, 흐릿한 사진도 수만 장을 겹쳐서 평균을 내면 선명해질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시료가 마르지 않게 포도당 용액으로 코팅하고, 약한 빔을 쏘아 1975년 박테리오로돕신의 3차원 구조를 대략적으로 얻어냈습니다. 그리고 1990년에는 기술을 발전시켜 마침내 원자 수준의 해상도를 달성합니다.

"전자 현미경으로도 원자를 볼 수 있다!" 그의 끈기가 편견을 깨뜨린 것입니다.

 

🧐 요아힘 프랑크 : 컴퓨터로 흐릿한 그림자를 맞추다

 

헨더슨이 하드웨어의 가능성을 열었다면, 미국의 요아힘 프랑크는 그것을 처리할 '소프트웨어' 를 만들었습니다.

전자 현미경으로 단백질을 찍으면, 단백질들이 제멋대로 흩어져 있습니다. 어떤 놈은 앞을 보고, 어떤 놈은 옆을 보고, 어떤 놈은 뒤를 보고 있죠. 찍힌 사진은 수만 개의 제각각인 검은 얼룩들뿐입니다.

프랑크는 1975년부터 1986년까지, 이 얼룩들을 분석하는 정교한 컴퓨터 알고리즘을 개발했습니다.

[ 단일 입자 분석법 (Single Particle Analysis) ]

  1. 컴퓨터가 현미경 사진 속의 수만 개의 단백질 얼룩을 스캔합니다.
  2. 비슷한 각도로 찍힌 녀석들끼리 그룹을 짓습니다. (앞면 그룹, 옆면 그룹 등)
  3. 그룹별로 사진을 겹쳐서 노이즈를 없애고 선명한 '대표 2D 이미지' 를 만듭니다.
  4. 이 2D 이미지들을 수학적으로 조합하여, 최종적인 '3D 입체 구조' 를 완성합니다.

마치 수천 명의 군중 속에 섞인 범인의 흐릿한 CCTV 사진들을 모아서, 범인의 3D 몽타주를 완벽하게 그려내는 것과 같은 기술이었습니다.

 

⚡️ 자크 뒤보셰 : 물을 유리처럼 얼리다 (Vitrification)

 

마지막이자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물(Water)' 이었습니다. 전자 현미경은 진공 상태라 물이 있으면 증발해 버립니다. 그렇다고 물을 얼리면? 뾰족한 '얼음 결정(Ice Crystal)' 이 생겨서 단백질을 찔러 파괴하고, 빛을 산란시켜 시야를 가립니다.

"물을 증발시키지도 않고, 얼음 결정도 안 생기게 할 수 있을까?"

스위스의 자크 뒤보셰는 1980년대 초, '유리화(Vitrification)' 라는 기술을 개발하여 이 난제를 해결합니다.

[ 급속 동결의 마법 ]

  1. 그는 액체 질소(-196℃)로 차갑게 식힌 '액체 에탄(Ethane)' 을 준비했습니다.
  2. 단백질이 들어있는 물방울을 얇게 펴서, 이 액체 에탄 속에 '순식간에' 풍덩 빠뜨립니다.
  3. 물이 너무 빨리 얼어버려서, 물 분자들이 미처 얼음 결정(육각형)으로 정렬할 시간조차 없이 그 자리에서 굳어버립니다.

이 상태의 물을 '유리화된 물(Vitreous Water)' 이라고 합니다. 유리창처럼 투명하고 결정이 없는 고체 상태의 물입니다.

"이제 단백질은 투명한 얼음 유리 속에 갇혀, 살아있을 때의 모양 그대로 완벽하게 정지했다."

뒤보셰 덕분에 우리는 진공 속에서도 물을 머금은 천연 상태의 단백질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 노벨상 : 해상도 혁명 (Resolution Revolution)

 

이 세 가지 기술(약한 빔, 이미지 처리, 급속 동결)이 2010년대에 최첨단 카메라 센서 기술과 결합하자, 생물학계에는 빅뱅이 일어났습니다. 이를 '해상도 혁명' 이라고 부릅니다.

이전에는 뿌연 덩어리로만 보이던 거대 단백질들이, 이제는 원자 하나하나가 보일 정도로 선명하게 드러났습니다.

  • 지카 바이러스: 2016년 브라질을 강타했을 때, Cryo-EM으로 바이러스 표면 구조를 몇 달 만에 밝혀냈습니다.
  • 코로나19: 코로나 바이러스의 스파이크 단백질 구조도 이 기술로 순식간에 규명되어 백신 개발을 도왔습니다.
  • 생체 시계: 2017년 노벨 생리의학상 주제였던 생체 시계 단백질의 결합 구조도 이것으로 확인했습니다.

2017년, 스웨덴 왕립과학원은 자크 뒤보셰, 요아힘 프랑크, 리처드 헨더슨에게 노벨 화학상을 수여합니다. 수상 이유는 "용액 속의 생체 분자 구조를 고해상도로 결정하기 위한 초저온 전자 현미경 관찰법 개발" 이었습니다.

 

📚 TMI : 괴짜들의 이력서

 

1. 뒤보셰의 유머러스한 CV

자크 뒤보셰는 유머 감각이 뛰어납니다. 로잔 대학교 홈페이지에 올라온 그의 공식 이력서(CV)는 전설입니다.

  • 1946년: 더 이상 어둠을 무서워하지 않게 됨.
  • 1955년: 텍사스 주 최초의 난독증 진단 환자가 됨. (그는 난독증을 극복했습니다.)
  • 1968년: 68혁명에 참가하느라 공부를 별로 안 함.

2. 헨더슨의 예언

리처드 헨더슨은 1990년대부터 "결국 Cryo-EM이 엑스선 결정학을 뛰어넘어 구조 생물학의 대세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당시에는 아무도 믿지 않았지만, 20년 뒤 그의 말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3. 프랑크의 문학

요아힘 프랑크는 과학자이자 소설가, 시인입니다. 그는 자신의 블로그에 시와 소설을 연재하며, "과학과 예술은 세상을 보는 두 가지 창문"이라고 말합니다.

 

🌏 맺음말 : 차가움 속에 영원히 멈춘 찰나

 

자크 뒤보셰, 요아힘 프랑크, 리처드 헨더슨은 생명의 시간을 멈추는 마법사들입니다.

그들이 만든 영하 196도의 차가운 유리 감옥 속에서, 바이러스와 단백질은 가장 역동적인 순간의 모습을 간직한 채 멈춰 섰습니다.

우리는 이제 그 멈춰진 시간을 들여다보며, 생명이 어떻게 움직이고 질병이 어떻게 시작되는지를 원자 단위에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보이지 않던 것을 보게 만든 기술, 그것이 바로 현대 의학의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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