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다윈을 실험실로 초대하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40억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진화(Evolution)' 를 통해 환경에 적응해 왔습니다. 무작위로 돌연변이가 일어나고, 그중 생존에 유리한 것만 살아남는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 의 과정은 느리지만 가장 강력한 설계자였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성격이 급합니다. 우리는 플라스틱을 분해하는 효소나, 암세포만 죽이는 항체가 당장 필요합니다. 하지만 자연이 진화를 통해 이것을 만들어 줄 때까지 몇억 년을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신처럼, 혹은 자연처럼 진화의 속도를 100만 배로 빠르게 돌릴 수는 없을까요?
오늘 소개할 2018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들은 이 엉뚱한 상상을 현실로 만든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복잡한 화학 식을 푸는 대신, '진화의 알고리즘' 을 실험관 속에 도입했습니다.
효소를 무작위로 돌연변이 시킨 뒤 가장 성능 좋은 놈만 골라내는 '유도 진화(Directed Evolution)' 의 창시자 프랜시스 아놀드(Frances H. Arnold). 바이러스의 껍질에 단백질을 전시하여 낚시하듯 골라내는 '파지 디스플레이(Phage Display)' 를 개발한 조지 스미스(George P. Smith). 그리고 이 기술로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의약품을 개발한 그레고리 윈터(Sir Gregory P. Winter).
자연의 힘을 빌려 자연을 뛰어넘는 물질을 창조한 현대의 연금술사들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 프랜시스 아놀드 : 인간은 신보다 빠르다
이야기는 1990년대 초, 미국 캘리포니아 공과대학(Caltech)에서 시작됩니다. 화학공학자 프랜시스 아놀드는 기존의 화학 공정이 너무 많은 오염 물질을 배출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친환경적인 '효소(Enzyme)' 를 산업 현장에 쓰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자연계의 효소는 물속에서는 잘 일하지만, 공장에서 쓰는 유기 용매(기름) 속에서는 금방 망가졌습니다. 아놀드는 처음에 효소의 구조를 이리저리 뜯어고쳐 설계해 보려 했습니다. 하지만 단백질 구조가 너무 복잡해서 인간의 머리로는 도저히 최적의 설계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과감하게 '설계' 를 포기하고 '진화' 를 선택했습니다.
[ 유도 진화 (Directed Evolution)의 과정 ]
- 무작위 변이: 효소 유전자에 일부러 에러를 내서 수천 가지의 '돌연변이 유전자' 를 만듭니다. (다양성 확보)
- 생산: 이 유전자들을 박테리아에 넣어서 각기 다른 변이 효소들을 생산하게 합니다.
- 선택 (Screening): 만들어진 효소들을 유기 용매에 넣어봅니다. 대부분은 죽지만, 개중에는 우연히 조금 더 잘 버티는 녀석이 있습니다. 그 녀석만 '골라냅니다(Selection)'.
- 반복: 골라낸 녀석을 부모로 삼아, 다시 1번부터 과정을 반복합니다.
이 과정을 몇 세대만 거치면, 원래 효소보다 수백 배 더 강력하고 튼튼한 '슈퍼 효소' 가 탄생합니다.
"나는 자연이 수억 년 동안 해온 일을 일주일 만에 해냈다."
아놀드의 이 방법 덕분에 오늘날 우리는 옥수수에서 바이오 에탄올을 만들고, 세제에 들어가는 강력한 효소를 만들며, 환경 오염 없는 화학 공정을 돌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노벨 화학상을 받은 5번째 여성이자, 미국 여성 최초의 화학상 수상자가 되었습니다.
🧐 조지 스미스 : 바이러스로 낚시를 하다
아놀드가 효소를 진화시켰다면, 미주리 대학의 조지 스미스는 유전자를 찾는 획기적인 방법을 고안했습니다.
1985년, 그는 세균을 잡아먹는 바이러스인 '박테리오파지(Bacteriophage)' 에 주목했습니다. 파지는 캡슐 안에 DNA가 있고, 겉은 단백질 껍질로 싸여 있는 단순한 구조입니다.
스미스의 아이디어는 이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찾고 싶은 미지의 유전자 조각을, 파지의 껍질 단백질 유전자 사이에 슬쩍 끼워 넣으면 어떨까?"
그러면 파지는 자신의 껍질을 만들 때, 우리가 끼워 넣은 유전자가 만드는 단백질(펩타이드)을 '껍질 표면' 에 덜렁덜렁 매달고 나오게 됩니다.
마치 옷 가게 쇼윈도에 옷을 전시(Display)하듯이, 파지가 자신이 가진 유전자의 생산물을 표면에 전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파지 디스플레이(Phage Display)' 입니다.
이 기술이 왜 혁명적일까요? 수십억 마리의 파지 도서관(Phage Library)을 만들었다고 칩시다. 여기서 내가 원하는 특정 단백질(항체 등)과 결합하는 녀석을 찾고 싶다면? 미끼를 던져서 낚아 올리기만 하면 됩니다. 낚여 올라온 파지의 껍질에는 단백질이 있고, 그 속에는 그 단백질을 만드는 '유전자(DNA)' 가 들어있으니, 유전자를 따로 찾을 필요 없이 한 방에 해결되는 것입니다.
⚡️ 그레고리 윈터 : 항체 의약품의 시대를 열다
영국 케임브리지의 그레고리 윈터는 조지 스미스의 '파지 디스플레이' 기술을 '항체(Antibody)' 개발에 적용했습니다.
우리 몸의 항체는 바이러스나 암세포 같은 적을 정확하게 알아보고 결합합니다. 윈터는 이 항체를 약으로 쓰고 싶었지만, 동물(쥐)에서 만든 항체는 사람 몸에 들어가면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윈터는 '파지 디스플레이' 와 아놀드의 '유도 진화' 를 결합했습니다.
- 파지 표면에 수십억 종류의 인간 항체 조각을 매달아 놓습니다. (항체 라이브러리)
- 여기에 암세포나 염증 물질 같은 '표적(Target)' 을 던져 넣습니다.
- 표적에 가장 잘 달라붙는 파지만 골라냅니다. (선택)
- 골라낸 파지를 증식시키면서 돌연변이를 일으켜 더 강력하게 결합하는 놈을 찾습니다. (진화)
이 과정을 반복하면, 인간의 몸속에서 자연적으로 만들어지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부작용이 없는 '완전 인간 항체' 를 실험실에서 진화시킬 수 있습니다.
💊 휴미라(Humira)의 탄생
이 기술로 탄생한 최초의 의약품이 바로 2002년 승인된 류머티즘 관절염 치료제 '휴미라(아달리무맙)' 입니다. 휴미라는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의약품(블록버스터)이 되었으며, 이후 수많은 항암제와 자가면역질환 치료제가 이 '파지 디스플레이' 기술로 개발되었습니다.
🏆 노벨상 : 자연의 힘을 빌린 공학
2018년, 스웨덴 왕립과학원은 이 세 사람에게 노벨 화학상을 수여합니다.
- 프랜시스 아놀드: 효소의 유도 진화 (1/2)
- 조지 스미스 & 그레고리 윈터: 펩타이드와 항체의 파지 디스플레이 (1/2)
노벨 위원회는 "이들은 화학의 힘으로 진화를 가속화했다. 다윈의 원리를 시험관 안에서 구현하여 인류에게 유익한 물질을 창조했다"고 평가했습니다.
이들의 연구는 기존의 화학이 '설계와 합성'에 의존하던 것에서, '무작위성과 선택' 이라는 생물학적 원리를 이용하는 것으로 패러다임을 확장시켰습니다.
📚 TMI : 인생은 진화한다
1. 프랜시스 아놀드의 시련
프랜시스 아놀드의 삶은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유방암을 겪었고, 첫 번째 남편과 사별했으며, 두 번째 남편은 자살로 잃었고, 아들마저 사고로 잃는 끔찍한 비극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무너지지 않고 연구에 몰두하며 슬픔을 승화시켰습니다. 그녀는 "과학은 나를 구원한 동아줄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녀는 상금 전액을 미래의 여성 과학자들을 위해 기부했습니다.
2. 조지 스미스의 겸손
조지 스미스는 노벨상 수상 소감에서 "내 연구는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연구자가 함께 쌓아 올린 피라미드의 한 조각일 뿐이다"라며 동료 과학자들에게 공을 돌렸습니다.
3. 기사 작위를 받은 윈터
그레고리 윈터는 자신이 세운 바이오 벤처 기업(Cambridge Antibody Technology)으로 큰돈을 벌었지만, 그 돈을 다시 연구와 교육에 투자했습니다. 그는 영국 과학계에 기여한 공로로 기사 작위(Sir)를 받았습니다.
🌏 맺음말 : 우리는 진화의 조종사가 되었다
2018년 노벨상 수상자들은 우리에게 "인간은 이제 진화의 구경꾼이 아니라 조종사가 되었다" 는 사실을 선포했습니다.
자연이 수억 년에 걸쳐 느릿느릿 진행하던 시행착오를, 우리는 실험실에서 며칠 만에 압축해서 실행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개발한 '가속 진화' 기술 덕분에 우리는 더 깨끗한 에너지를 얻고, 불치병을 치료하는 기적의 항체를 갖게 되었습니다. 자연의 지혜를 빌려 자연을 넘어서려는 인류의 도전은 지금도 계속 진화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