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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_Novel/305_노벨화학상

[2021 노벨화학상] 베냐민 리스트 & 데이비드 맥밀런 : 효소와 금속을 넘어선 제3의 촉매, '유기 촉매'의 발견

by 어셈블러 2025. 1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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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단순한 것이 가장 강력하다"

 

화학자들이 새로운 물질을 만들 때, 반응을 도와주는 도우미인 '촉매(Catalyst)' 는 필수적입니다. 20세기 내내 화학자들은 단 두 종류의 촉매만을 알고 있었습니다.

  1. 금속 촉매: 백금, 팔라듐, 철 등. (강력하지만 독성이 있고, 공기와 습기에 약하며 비싸다.)
  2. 효소(Enzyme): 생명체가 만든 단백질. (정교하지만 너무 크고 복잡해서 다루기 힘들다.)

마치 요리를 하는데 도구가 '무거운 무쇠 솥' 아니면 '초정밀 로봇 팔' 두 개밖에 없는 상황과 같았습니다. "좀 더 가볍고, 싸고, 쓰기 편한 도구는 없을까?"

2000년, 이 갈증을 해결해 줄 '제3의 촉매' 가 세상에 등장했습니다. 거창한 금속도 아니고 복잡한 단백질도 아닌, 우리 몸을 구성하는 흔하디흔한 탄소, 수소, 질소로 이루어진 작은 유기 분자가 그 주인공이었습니다.

오늘 소개할 2021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들은 화학의 도구 상자에 혁명적인 새 도구를 추가한 인물들입니다.

"효소 전체가 다 필요한 건 아닐 거야"라며 아미노산 하나로 반응을 성공시킨 독일의 베냐민 리스트(Benjamin List). "금속은 너무 까다로워"라며 유기물로 금속의 기능을 흉내 낸 미국의 데이비드 맥밀런(David W.C. MacMillan).

환경을 파괴하지 않으면서도 원하는 물질(특히 거울상 이성질체)을 정확하게 만들어내는 '비대칭 유기 촉매(Asymmetric Organocatalysis)' 의 탄생 비화를 소개합니다.

 

📜 베냐민 리스트 : 효소는 너무 크다

 

1990년대 후반, 미국 스크립스 연구소의 박사후 연구원이었던 베냐민 리스트는 거대한 효소(항체 효소)를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효소는 수천 개의 아미노산이 뭉친 거대한 단백질입니다. 하지만 리스트는 생각했습니다. "효소 전체가 화학 반응을 하는 게 아니다. 실제로 일을 하는 건 효소 구석에 있는 아미노산 한두 개뿐이잖아? 그렇다면 굳이 거대한 효소 전체를 쓸 필요가 있을까? 핵심 아미노산 하나만 떼어내도 작동하지 않을까?"

그는 아주 단순하고 무식한 실험을 해보기로 했습니다. 그는 20가지 아미노산 중 '프롤린(Proline)' 이라는 녀석을 골랐습니다. 프롤린은 아주 흔하고 구조도 간단한 아미노산입니다.

그는 프롤린을 반응 용기에 넣고 알돌 반응(Aldol reaction, 탄소끼리 잇는 반응)을 시도했습니다. "아마 안 되겠지. 이게 됐으면 벌써 누가 했겠지."

하지만 결과는 대성공이었습니다. 작디작은 프롤린 분자는 거대한 효소만큼이나 효율적으로 반응을 촉진했습니다. 심지어 효소처럼 왼손잡이 분자와 오른손잡이 분자를 구별(비대칭 합성) 해서 만들어내기까지 했습니다.

"이것 봐! 비싼 금속도, 거대한 효소도 필요 없다. 아미노산 가루 하나만 있으면 된다!"

리스트는 이 발견을 통해 "작은 유기 분자도 효소처럼 행동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습니다.

 

🧐 데이비드 맥밀런 : 금속은 너무 비싸고 예민하다

 

비슷한 시기, UC 버클리(나중에 칼텍)의 데이비드 맥밀런은 금속 촉매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습니다.

금속 촉매는 성능은 좋지만, 산소나 습기에 닿으면 금방 망가져서 진공 장비(글러브 박스) 안에서만 다뤄야 했습니다. 게다가 중금속이라 환경 오염 문제도 심각했고 가격도 비쌌습니다.

"공장에서 대량 생산을 하려면, 공기 중에 놔둬도 멀쩡한 튼튼한 촉매가 필요해. 금속을 쓰지 않고도 금속처럼 전자를 주고받을 수 있는 물질은 없을까?"

그는 화학 지식을 총동원해, 금속 원자 대신 '질소(Nitrogen)' 원자를 품고 있는 작은 유기 분자(이미다졸리디논)를 직접 설계했습니다.

이 인공 분자는 금속처럼 전자를 묘하게 끌어당기거나 밀어내면서 화학 반응을 유도했습니다. 성능은? 금속 촉매만큼 강력했습니다. 내구성은? 공기 중에 둬도 끄떡없었습니다.

맥밀런은 이 새로운 분야에 '유기 촉매(Organocatalysis)' 라는 멋진 이름을 붙였습니다. 유기물(Organic)이 촉매(Catalysis)를 한다는 뜻입니다.

 

⚡️ 왜 유기 촉매인가? : 녹색 화학의 꿈

 

리스트와 맥밀런이 2000년에 각각 발표한 논문은 화학계에 골드러시를 일으켰습니다. 유기 촉매의 장점은 너무나 명확했기 때문입니다.

  1. 친환경 (Green): 독성이 강한 중금속(팔라듐, 납 등)을 안 써도 됩니다. 폐수 처리 비용이 줄어듭니다.
  2. 저렴함: 금이나 백금 같은 귀금속 대신, 흔한 탄소나 질소 화합물을 씁니다.
  3. 간편함: 진공 장비나 특수 용기가 필요 없습니다. 그냥 비커에 넣고 저으면 됩니다.
  4. 정밀함: 2001년 노벨상 수상자들(놀즈, 노요리, 샤플리스)이 했던 '비대칭 합성(한쪽 거울상만 만들기)' 을 아주 쉽게 해냅니다.

이 기술 덕분에 제약 회사들은 신약을 개발할 때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게 되었고, 제조 과정에서 환경 오염도 막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 노벨상 : 화학을 더 심플하게

 

2021년, 스웨덴 왕립과학원은 베냐민 리스트와 데이비드 맥밀런에게 노벨 화학상을 수여합니다. 수상 이유는 "비대칭 유기 촉매 반응의 개발" 이었습니다.

노벨 위원회는 "이들의 발견은 분자 건설의 새로운 수준을 열었다. 화학을 더 친환경적으로, 그리고 더 저렴하게 만들었다"고 평가했습니다.

불과 20년 전만 해도 존재하지 않았던 개념이, 두 사람의 아이디어 덕분에 이제는 화학의 세 번째 기둥이 된 것입니다.

 

📚 TMI : 휴가와 내기

 

1. 리스트의 휴가 중 발견

베냐민 리스트는 프롤린 실험 아이디어를 떠올렸을 때, "이게 될 리가 없어. 너무 멍청한 아이디어야"라고 생각해서 동료들에게 말도 안 하고 혼자 몰래 실험했다고 합니다. 휴가 기간에 몰래 해본 실험이 성공하자 그는 너무 기뻐서 연구소 복도를 뛰어다녔다고 합니다.

2. 맥밀런의 이름 짓기

'유기 촉매(Organocatalysis)'라는 단어는 맥밀런이 논문을 쓰면서 처음 만든 말입니다. 그는 "이 분야가 널리 퍼지려면 부르기 쉽고 그럴듯한 이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작명 센스 덕분에 이 분야는 폭발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3. 한국과의 인연

데이비드 맥밀런 교수는 서울대학교 석좌교수로 임용되기도 했으며, 한국의 젊은 과학자들과 활발히 교류하고 있습니다. 그는 유쾌하고 유머러스한 성격으로, 강연 때마다 청중을 웃기기로 유명합니다.

 

🌏 맺음말 : 단순함이 복잡함을 이긴다

 

베냐민 리스트와 데이비드 맥밀런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해결책은 종종 가장 단순한 것에 있다" 는 진리를 보여주었습니다.

복잡하고 비싼 금속이나 거대한 효소 대신, 우리 주변에 널려 있는 작은 아미노산 조각 하나가 세상을 바꾸는 촉매가 될 수 있음을 증명했습니다.

그들이 선물한 '유기 촉매' 덕분에, 인류는 자연을 덜 해치면서도 필요한 물질을 얻을 수 있는 '녹색 화학' 의 시대로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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