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복잡한 건 싫어, 안전벨트처럼 '딸깍' 끼우면 안 돼?"
화학자들이 새로운 약이나 신소재를 만들 때 가장 힘들어하는 것은 '원하는 대로 안 붙는다' 는 점입니다. 탄소 원자들은 고집이 세서 억지로 붙이려면 높은 열을 가하거나 독한 촉매를 써야 하고, 그러다 보면 원치 않는 부산물(쓰레기)이 잔뜩 나와서 정제하는 데 시간을 다 보냅니다.
"자연은 쉽게 만드는데 우리는 왜 이렇게 힘들게 만들까? 그냥 레고 블록처럼 튀어나온 부분과 들어간 부분을 맞추면 '딸깍(Click)' 하고 붙게 만들 수는 없을까?"
이 단순하고도 강력한 철학으로 21세기 화학의 패러다임을 바꾼 세 명의 과학자가 있습니다.
오늘 소개할 2022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들은 화학을 가장 '단순하고(Simple)', '신뢰할 수 있는(Reliable)' 기술로 진화시킨 영웅들입니다.
"화학은 쉬워야 한다"며 클릭 화학의 개념을 제안한 미국의 K. 배리 샤플리스(K. Barry Sharpless). 그 개념을 현실로 만드는 완벽한 촉매를 발견한 덴마크의 모르텐 멜달(Morten Meldal). 그리고 이 기술을 살아있는 세포 안에 적용하여 생명의 지도를 그린 미국의 캐럴린 버토지(Carolyn R. Bertozzi).
프레데릭 생어에 이어 역사상 두 번째로 노벨 화학상을 두 번이나 받은 샤플리스의 위엄과, 생체 내부를 탐험하는 새로운 화학의 세계를 소개합니다.
📜 배리 샤플리스 & 모르텐 멜달 : 구리와 아지드의 마법
이야기의 시작은 2001년, 첫 번째 노벨상을 받은 직후의 배리 샤플리스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는 2001년 비대칭 합성으로 노벨상을 받았습니다.)
그는 화학계에 도발적인 제안을 합니다. "이제 억지로 복잡한 탄소 뼈대를 만들려고 애쓰지 말자. 그냥 작은 모듈(블록)들을 만들어서, 그것들을 '딸깍' 하고 연결하는 탄탄한 버클(Buckle)만 있으면 되잖아?"
그는 안전벨트를 채울 때 나는 소리를 따서 이 개념을 '클릭 화학(Click Chemistry)' 이라고 불렀습니다. 조건은 까다로웠습니다. 산소나 물이 있어도 반응해야 하고, 부산물이 없어야 하며, 수율은 100%에 가까워야 했습니다.
이 꿈같은 반응을 현실로 만든 것은 덴마크의 모르텐 멜달과 샤플리스 자신이었습니다. 그들은 거의 동시에, 독립적으로 역사상 최고의 화학 반응을 발견합니다.
바로 '구리 촉매 아지드-알카인 고리화 반응(CuAAC)' 입니다. 이름은 어렵지만 원리는 간단합니다.
- 한쪽 분자에는 '아지드(Azide)' 라는 3개의 질소 원자 꼬리표를 답니다. (블록의 튀어나온 부분)
- 다른 쪽 분자에는 '알카인(Alkyne)' 이라는 탄소 꼬리표를 답니다. (블록의 들어간 부분)
- 이 둘은 서로 섞여 있어도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 하지만 여기에 '구리 이온(Cu)' 을 넣는 순간! 둘은 자석처럼 끌려가 '딸깍' 하고 결합합니다.
"이것은 완벽한 본드다. 물속이든 흙속이든 상관없다. 아지드와 알카인은 구리만 있으면 무조건 붙는다."
이 발견으로 화학자들은 복잡한 분자를 만들 때 고민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A물질과 B물질을 붙이고 싶으면, 각각 꼬리표만 달아서 섞어주면 끝이니까요.
🧐 캐럴린 버토지 : 살아있는 세포 안에서 '딸깍' 하고 싶다
하지만 클릭 화학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촉매로 쓰는 '구리(Copper)' 가 생명체에게는 독(Poison) 이라는 점입니다.
미국 스탠퍼드 대학의 캐럴린 버토지는 이 클릭 화학을 살아있는 세포 안에서 쓰고 싶었습니다. 그녀의 목표는 세포 표면에 붙어 있는 설탕 사슬(글리칸)을 연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세포 표면의 당분은 암세포나 바이러스를 식별하는 중요한 신분증이다. 여기에 형광 물질을 '딸깍' 붙여서 눈으로 보고 싶어. 그런데 구리를 쓰면 세포가 다 죽어버리잖아?"
버토지는 고민 끝에 '구리 없는 클릭 화학' 을 고안해 냅니다. 그녀는 알카인(Alkyne) 분자를 둥글게 휘어서 링 모양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하면 분자 안에 '비틀림(Strain)' 이 생겨서 에너지가 넘치게 됩니다. 마치 튕겨 나가기 직전의 스프링처럼요.
이 '화난 알카인'을 세포에 넣어주면, 구리 촉매가 없어도 아지드 꼬리표를 만나자마자 폭발적으로 반응해서 결합해 버립니다.
버토지는 이 기술에 '생체 직교 화학(Bioorthogonal Chemistry)' 이라는 멋진 이름을 붙였습니다.
- 직교(Orthogonal): 서로 간섭하지 않고 90도로 만난다는 뜻.
- 즉, 세포 안에서 일어나는 수만 가지의 생화학 반응(생명 활동)에는 전혀 간섭하지 않으면서, 우리가 원하는 클릭 반응만 따로 진행된다는 뜻입니다.
⚡️ 세포를 염색하고 암을 추적하다
버토지의 기술은 생물학 연구의 판도를 바꿨습니다.
[ 버토지의 실험 ]
- 세포에게 '아지드'가 달린 설탕 먹이를 줍니다.
- 세포는 아무것도 모르고 이 설탕을 먹고, 자신의 표면에 아지드 꼬리표가 달린 당 사슬을 만듭니다. (세포는 건강하게 살아있습니다.)
- 여기에 '형광 물질'이 달린 '화난 알카인'을 넣어줍니다.
- 딸깍! 형광 물질이 세포 표면의 설탕에만 정확히 달라붙습니다.
이제 현미경으로 보면 세포가 형광색으로 빛납니다. 이 기술을 이용하면 암세포가 어디로 이동하는지 실시간으로 추적할 수 있고, 항체에 항암제를 '딸깍' 붙여서 암세포에게만 배달하는 '유도 미사일 치료제(ADC)' 도 쉽게 만들 수 있습니다.
🏆 노벨상 : 두 번째 왕관과 여성의 쾌거
2022년, 스웨덴 왕립과학원은 이 세 사람에게 노벨 화학상을 수여합니다.
이 수상은 여러모로 역사적이었습니다.
- 배리 샤플리스: 2001년에 이어 두 번째 노벨 화학상을 받았습니다. 프레데릭 생어(1958, 1980) 이후 42년 만에 탄생한 두 번째 화학상 2관왕입니다. 그는 "좋은 아이디어는 늙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 캐럴린 버토지: 노벨 화학상을 받은 8번째 여성 과학자이자, 성소수자(레즈비언)임을 공개적으로 밝힌 과학자로서 다양성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노벨 위원회는 "이들은 화학을 복잡한 이론에서 꺼내어, 기능적이고 실용적인 도구로 만들었다"고 평가했습니다.
📚 TMI : 록 밴드 키보디스트와 맨발의 교수
1. 록커 버토지
캐럴린 버토지는 하버드 대학 시절 록 밴드 'Bored of Education'에서 키보드를 연주했습니다. 밴드의 기타리스트는 훗날 전설적인 밴드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RATM)' 의 기타리스트가 된 톰 모렐로였습니다. 그녀는 지금도 음악을 사랑하는 힙한 과학자입니다.
2. 샤플리스의 직관
샤플리스는 "화학자의 최고의 도구는 직관"이라고 믿습니다. 그는 복잡한 계산보다는 분자의 모양을 보고 "얘랑 쟤랑 붙으면 딱 맞겠네"라고 느끼는 감각을 중시했습니다. 클릭 화학 아이디어도 그런 직관에서 나왔습니다.
3. 멜달의 우연
모르텐 멜달은 원래 구리를 쓸 생각이 없었습니다. 다른 반응을 실험하다가 실수로 구리가 들어갔는데, 반응 속도가 폭발적으로 빨라지는 것을 보고 CuAAC 반응을 발견했습니다. 역시 위대한 발견 뒤에는 준비된 자에게 찾아오는 우연이 있었습니다.
🌏 맺음말 : 단순함이 복잡함을 이긴다
캐럴린 버토지, 모르텐 멜달, 배리 샤플리스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디자인은 가장 단순한 디자인" 이라는 진리를 보여주었습니다.
복잡하게 꼬인 자연의 분자들을 억지로 흉내 내는 대신, 그들은 레고 블록처럼 규격화된 부품을 만들어 쉽고 정확하게 조립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들이 만든 '분자 똑딱단추' 덕분에 인류는 이제 살아있는 세포 안에서도 화학 반응을 통제하고, 질병을 추적하며, 새로운 약물을 디자인하는 '화학의 자유' 를 얻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