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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_Novel/305_노벨화학상

[2025 노벨화학상] 기타가와 스스무, 리처드 롭슨, 오마르 야기 : 분자 건축의 혁명, '금속-유기 골격체(MOF)'로 빈 공간을 설계하다

by 어셈블러 2025. 1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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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기를 담는 가장 가벼운 그릇을 만들다"

 

우리가 물을 담으려면 컵이 필요하고, 짐을 담으려면 가방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기체(Gas)를 담으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수소나 메탄 같은 기체는 부피가 너무 커서, 이를 저장하려면 강철로 된 무겁고 위험한 고압 탱크가 필요했습니다.

화학자들은 오랫동안 꿈꿔왔습니다.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기체 분자를 쏙쏙 빨아들여서 안전하고 빽빽하게 저장할 수는 없을까?"

이 꿈을 이루려면 아주 특별한 물질이 필요했습니다. 겉보기에는 모래알처럼 작지만, 그 내부에는 미세한 구멍이 무수히 뚫려 있어서 펼치면 축구장 하나를 덮을 만큼 거대한 표면적을 가진 물질 말입니다.

오늘 소개할 2025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들은 원자와 분자를 벽돌 삼아 이 마법 같은 공간을 지은 '분자 건축가(Molecular Architect)' 들입니다.

금속과 유기물을 연결해 무한히 뻗어나가는 구조를 처음 제안한 호주의 선구자 리처드 롭슨(Richard Robson). 그 구조를 견고하게 만들어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물질로 완성한 미국의 오마르 야기(Omar M. Yaghi). 그리고 기체가 드나들 수 있도록 숨 쉬는 유연한 구조를 만든 일본의 기타가와 스스무(Susumu Kitagawa).

이들이 만든 '금속-유기 골격체(MOF, Metal-Organic Frameworks)' 는 공기 중의 탄소를 잡아 지구를 식히고, 사막의 공기에서 물을 짜내어 생명을 살리는 현대의 연금술이 되었습니다.

 

📜 리처드 롭슨 : 분자로 정글짐을 짓다

 

이야기의 시작은 1980년대 후반, 호주 멜버른 대학입니다. 화학자 리처드 롭슨은 아주 엉뚱한 상상을 했습니다.

"아이들이 노는 정글짐을 보자. 쇠막대(봉)와 연결부(조인트)가 반복되면서 거대한 구조를 만든다. 그리고 그 안은 텅 비어 있다."

그는 화학적으로도 이런 구조를 만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 연결부: 금속 이온 (구리, 아연 등)
  • 막대: 유기 분자 (탄소 사슬)

롭슨은 금속 이온을 중심에 두고, 그 사이에 긴 유기 분자 다리를 놓아 연결했습니다. 그러자 분자들은 스스로 알아서 착착 조립되더니, 마치 에펠탑의 철골 구조처럼 텅 빈 공간을 가진 3차원 격자무늬를 만들어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결정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설계한 대로 지어진 '배위 고분자(Coordination Polymer)'다."

롭슨은 분자 세계에서 '공간'을 창조하는 방법을 처음으로 제시했습니다. 하지만 초기 모델은 너무 약해서, 구멍 안에 있던 용매가 빠져나가면 구조가 와르르 무너져버리곤 했습니다. 튼튼한 기둥이 필요했습니다.

 

🧐 오마르 야기 : 무너지지 않는 성, 'MOF-5'

 

1990년대 중반, 미국으로 건너온 요르단 출신의 화학자 오마르 야기는 롭슨의 아이디어를 이어받아 '무너지지 않는 집'을 짓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금속 이온 하나만 쓰는 대신, 금속 원자 여러 개가 뭉친 단단한 '금속 클러스터' 를 연결부(조인트)로 사용했습니다. 마치 텐트를 칠 때 팩 하나만 박는 게 아니라 튼튼한 주춧돌을 놓는 것과 같았습니다.

1999년, 야기는 전설적인 물질인 'MOF-5' 를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이 물질은 아연 산화물 클러스터를 유기물 지지대로 연결한 것인데, 아무리 가열하거나 진공을 걸어도 무너지지 않고 그 거대한 빈 공간(기공)을 유지했습니다.

야기의 MOF-5는 1그램(g)만 있어도, 그 내부 표면적을 펼치면 축구장 절반을 덮을 정도로 넓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분자 수준에서 레고 블록을 조립하듯 원하는 물질을 디자인할 수 있다. 이것은 '망상 화학(Reticular Chemistry)'의 시작이다."

야기는 구멍의 크기와 모양을 마음대로 조절하여, 수소만 잡는 MOF, 이산화탄소만 잡는 MOF, 메탄만 잡는 MOF를 맞춤 정장처럼 제작할 수 있는 길을 열었습니다.

 

⚡️ 기타가와 스스무 : 숨 쉬는 건축물

 

비슷한 시기, 일본 교토 대학의 기타가와 스스무는 또 다른 차원의 혁신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야기가 '튼튼한 건물'을 지었다면, 기타가와는 '유연한 건물' 을 꿈꿨습니다.

보통의 고체는 딱딱합니다. 하지만 기타가와는 "기체를 받아들일 때는 늘어나고, 뱉을 때는 줄어드는 폐(Lung) 같은 물질은 없을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유기물 연결 다리를 유연한 소재로 바꿔서, 외부 자극에 따라 구조가 변하는 '다공성 배위 고분자(PCP)' 를 만들었습니다. 이 물질은 평소에는 문을 닫고 있다가, 특정 가스(예: 아세틸렌)가 오면 문을 활짝 열어 흡수하고, 다른 가스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은 딱딱한 돌이 아니다. 살아있는 생물처럼 부드럽게 움직이며 분자를 구별하는 '소프트 결정'이다."

기타가와 덕분에 MOF는 단순한 저장 창고를 넘어, 혼합된 가스를 분리하거나 센서로 작동하는 지능형 소재로 진화했습니다.

 

🏆 노벨상 : 기후 위기의 구원투수

 

2025년 10월, 스웨덴 왕립과학원은 기타가와 스스무, 리처드 롭슨, 오마르 야기에게 노벨 화학상을 수여합니다. 수상 이유는 "금속-유기 골격체(MOF)의 개발을 통해 다공성 재료의 새로운 지평을 연 공로" 였습니다.

이 기술이 2025년에 노벨상을 받은 이유는 명확합니다. 인류가 직면한 '기후 위기' 를 해결할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기 때문입니다.

  1. 탄소 포집: 공장 굴뚝이나 대기 중에서 이산화탄소만 쏙쏙 골라내어 저장합니다. 나무 수천 그루가 할 일을 MOF 필터 하나가 해냅니다.
  2. 수소 저장: 폭발 위험이 있는 고압 탱크 대신, MOF 가루 속에 수소를 안전하게 저장하여 수소 자동차의 상용화를 앞당깁니다.
  3. 물 수확: 사막의 건조한 공기 중에서도 밤에 수분을 흡수했다가, 낮에 햇빛을 받으면 깨끗한 식수를 뱉어내는 기적의 장치가 개발되었습니다. (야기의 연구팀이 실제로 구현했습니다.)

 

📚 TMI : 스팸 전화와 흙수저

 

1. 스팸 전화인 줄 알았어

기타가와 스스무 교수는 노벨상 수상 전화를 받고 "스팸 전화인 줄 알고 끊으려 했다"고 고백했습니다. 일본은 2019년 요시노 아키라 이후 6년 만에 화학상 수상자를 배출하며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습니다.

2. 난민 출신의 거장

오마르 야기는 요르단 난민 가정 출신입니다. 15세 때 미국으로 건너와 영어를 거의 못하는 상태에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도서관에서 우연히 분자 그림을 보고 화학에 빠졌다고 합니다. 그는 현재 UC 버클리 교수로, 사우디아라비아와 베트남 등 전 세계에 연구 센터를 세워 젊은 과학자들을 돕고 있습니다.

3. 고려대와의 인연

놀랍게도 수상자 발표 직후, 오마르 야기와 기타가와 스스무 두 교수가 한국의 고려대학교 석좌교수로 임용된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한국의 연구진들과 함께 차세대 에너지 소재를 개발하기 위한 협력이라고 하니, 노벨상의 기술이 우리 곁에 더욱 가까이 다가온 셈입니다.

 

🌏 맺음말 : 빈 공간의 미학

 

기타가와, 롭슨, 야기. 세 명의 건축가는 우리에게 "비어 있음(Void)의 가치" 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들이 만든 MOF는 90% 이상이 텅 비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빈 공간은 아무것도 없는 허무한 공간이 아니라, 인류에게 필요한 에너지와 깨끗한 공기, 그리고 생명의 물을 채울 수 있는 '가능성의 공간' 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나노 세계에 지어진 이 아름다운 궁전들이, 뜨거워지는 지구를 식히고 메마른 땅을 적시는 희망의 저장고가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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