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310_New Novel/315_[NEW] 노벨생리의학상

[1919 노벨생리의학상] 쥘 보르데 : 면역의 숨겨진 군대를 발견한, 보체 연구의 선구자

by 어셈블러 2026. 4. 25.
728x90
반응형

1919년 12월, 스톡홀름.

4년의 침묵이 끝났습니다.

1915년부터 매해 수여되지 못했던 노벨 생리의학상이, 1919년에 마침내 다시 수여되었습니다.

그 영예의 주인공은 쥘 보르데 였습니다. 벨기에의 세균학자이자 면역학자인 이 사람은, 우리 혈액 속에 숨어 있는 면역 체계의 정교한 무기들을 발견했습니다.

보르데의 이야기는 단순히 과학적 발견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독일에 점령당한 나라에서 연구를 계속한 과학자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자신의 발견이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유명해지는 것을 지켜봐야 했던 기초 연구자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4년을 기다려 마침내 자신의 공로를 인정받은 사람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 왜 보르데가 노벨상을 받았는가

 

 

 

"면역에 관한 발견을 인정하여"

 

 

1919년 노벨 위원회의 수상 이유는 간결했지만, 그 뒤에는 방대한 연구가 있었습니다.

보르데의 핵심 업적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 혈액 내에서 항체와 함께 작용하는 보체(complement) 라는 단백질 시스템을 발견하고, 그 역할을 규명했습니다. 보체는 항체가 세균에 결합하면 연쇄적으로 활성화되어 세균을 파괴합니다.

둘째, 이 보체가 항원-항체 반응 시에 소모(고정)된다는 원리를 이용하여 보체 고정 반응(complement fixation test) 을 개발했습니다. 이 반응은 특정 질병에 대한 항체가 혈액 속에 존재하는지를 확인하는 매우 예민한 진단 방법이었습니다.

셋째, 동료 과학자 옥타브 쟁구 와 함께 백일해의 원인균 (Bordetella pertussis)을 분리하고 배양하는 데 성공하여 백일해 백신 개발의 기초를 마련했습니다.

이 세 가지 업적은 면역학과 감염병 진단학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 면역의 미궁 — 항체만으로는 설명되지 않았던 것들

 

보르데가 연구를 시작한 19세기 말 20세기 초, 면역학은 막 체계를 갖춰가던 분야였습니다.

파스퇴르코흐 가 세균학의 기초를 다졌고, 에밀 베링기타사토 시바사부로 가 디프테리아와 파상풍에 대한 혈청 요법을 개발했습니다. 혈액 속에 특정 세균이나 독소를 무력화하는 물질이 있다는 것이 밝혀졌고, 이것이 항체라는 것이 점차 이해되어 갔습니다.

그런데 항체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현상들이 있었습니다.

항체를 많이 가진 혈청을 세균에 섞어도, 그것만으로는 세균이 완전히 파괴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신선한 혈청 — 특히 열을 가하지 않은 혈청 — 에는 세균을 파괴하는 추가적인 능력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혈청을 56도 이상으로 가열하면 이 파괴 능력이 사라졌습니다.

당시 과학자들은 이 현상을 어렴풋이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보르데는 이 미지의 영역으로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 파스퇴르 연구소의 젊은 벨기에 과학자

 

1870년 벨기에의 소네트에서 태어난 쥘 보르데는, 어린 시절부터 탁월한 지적 능력을 보였습니다. 브뤼셀 자유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한 그는 1892년 의학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졸업 후 그는 당시 면역학 연구의 세계적 중심지였던 파리의 파스퇴르 연구소 로 향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세포 면역 이론의 선구자인 엘리 메치니코프 의 지도를 받았습니다.

메치니코프는 식세포가 병원균을 잡아먹는 세포성 면역을 주창했습니다. 그러나 보르데의 관심은 다른 방향에 있었습니다. 그는 혈액의 액체 부분, 즉 혈청이 면역 반응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더 큰 관심을 가졌습니다.

파스퇴르 연구소에서 그는 주목할 만한 관찰을 했습니다. 동물의 혈청이 다른 종의 적혈구를 용해시키는 현상 — 이것은 혈청 속에 무언가 특별한 물질이 있음을 시사했습니다.

그는 실험을 반복하고 조건을 바꾸어가며 분석했습니다. 그 결과, 혈청 속에는 두 종류의 활성 물질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는 열에 안정적이며 특정 항원에만 반응하는 항체 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열에 약하며 항체가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보조 물질이었습니다. 보르데는 이것을 알렉신(alexin) 이라 불렀습니다. 이것이 훗날 보체(complement) 로 이름이 바뀐 것입니다.

1901년, 벨기에 브뤼셀로 돌아온 그는 파스퇴르 연구소 브뤼셀 지부 를 설립하고 소장으로 취임했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평생 연구를 이어갔습니다.


 

🔬 보이지 않는 방어선 — 보체 고정 반응의 원리

 

보르데의 가장 중요한 실용적 업적은 보체 고정 반응 을 진단에 활용하는 방법을 개발한 것입니다.

그 원리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보체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 혈액 속에는 약 30가지 이상의 단백질로 이루어진 보체 시스템 이 있습니다. 이 단백질들은 평소에는 비활성 상태로 떠돌고 있습니다. 그런데 항체가 항원(예: 세균)에 결합하면, 이 항원-항체 복합체가 보체 단백질들을 연쇄적으로 활성화합니다. 마치 도미노처럼 하나가 다음 것을 활성화하는 연쇄 반응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활성화된 보체는 세균의 세포막에 구멍을 뚫어 세균을 죽이거나, 면역 세포가 세균을 더 잘 잡아먹도록 표시(옵소닌화)하거나, 염증 반응을 촉진합니다.

보르데가 발견한 핵심은, 이 과정에서 보체 단백질이 항원-항체 복합체에 결합하여 소모된다 는 것이었습니다. 즉, 항원-항체 반응이 일어난 혈청에는 보체가 거의 남아있지 않게 됩니다.

이 원리를 이용하면 어떤 항체가 혈청 속에 있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검사하고자 하는 혈청 샘플에 알고 있는 항원과 일정량의 보체를 함께 넣습니다. 만약 혈청 속에 그 항원에 대한 항체가 있다면, 항원-항체 복합체가 형성되고 보체가 소모됩니다. 만약 항체가 없다면 보체는 소모되지 않고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보체가 소모되었는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보르데는 여기에 지시 시스템 을 도입했습니다. 양의 적혈구와 이에 대한 용혈 항체를 추가합니다.

  • 보체가 소모되었다면: 남은 보체가 없으므로 적혈구가 용해되지 않음 → 양성 반응 (혈청 속에 검사하는 항체 있음)
  • 보체가 남아있다면: 남은 보체가 지시 시스템에 작용하여 적혈구를 용해시킴 → 음성 반응 (혈청 속에 검사하는 항체 없음)

이 방법은 매우 예민하고 특이적이었습니다. 소량의 항체도 감지할 수 있었고, 어떤 항원에 대한 항체인지를 특정할 수 있었습니다.

보르데는 이 방법을 쟁구 와 함께 백일해 진단에 적용했습니다(보르데-쟁구 반응). 독일의 바서만 은 이 원리를 응용하여 매독 진단에 적용했습니다(바서만 반응). 매독 진단법의 기초 원리가 보르데에게서 왔지만, 임상적으로 더 유명해진 것은 바서만의 이름이었습니다.


 

🎭 점령 아래에서의 연구, 그리고 공로 인정의 지연

 

보르데의 삶에는 두 가지 중요한 그림자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전쟁, 다른 하나는 공로 인정의 문제였습니다.

1914년 독일이 벨기에를 침공 했을 때, 보르데는 브뤼셀에 있었습니다. 그는 점령하에서도 브뤼셀 파스퇴르 연구소를 지키며 연구를 계속했습니다. 독일 점령군의 감시와 자원 부족 속에서, 그는 연구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 기간 그는 특히 백일해 연구에 집중했습니다. 백일해는 어린이들을 주로 감염시키는 치명적인 호흡기 질환이었습니다. 전쟁 중에도 어린이들은 계속 백일해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보르데의 연구는 전쟁 중에도 살아있는 아이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노벨상이 재개되면서, 보르데의 오랜 기다림도 끝났습니다. 1919년 노벨 생리의학상은 그에게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공로 인정 문제는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보르데의 보체 고정 반응 원리를 응용하여 매독 진단법을 개발한 바서만 반응 은 세계적으로 유명해졌습니다. 일반 대중에게는 매독 검사 = 바서만 반응으로 알려진 반면, 그 기초가 된 보르데의 이름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습니다.

이것은 기초 과학 연구자들이 종종 겪는 상황의 전형적인 예입니다. 응용 기술은 화려하게 알려지고, 그 기반이 된 기초 연구는 조용히 잊혀집니다. 보르데의 노벨상은 이러한 불균형을 바로잡으려는 시도이기도 했습니다.


 

📱 HIV 진단 키트에도 살아있는 보르데의 유산

 

보르데가 발견한 보체 고정 반응의 원리는 100년이 지난 지금도 의학의 핵심에 살아있습니다.

면역 진단학 이라는 분야 전체가 보르데의 유산 위에 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항원-항체 반응의 특이성을 이용하여 질병 여부를 진단하는 모든 방법의 뿌리가 보르데에게 있습니다.

ELISA(효소결합면역흡착법) 는 오늘날 가장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면역 진단법 중 하나입니다. HIV 감염 여부 검사, 간염 항체 검사, 임신 진단 검사, 코로나19 항체 검사 — 이 모든 검사들이 ELISA를 활용합니다. ELISA는 보체 고정 반응과는 다른 기술이지만, 항원-항체 결합을 감지하는 면역 진단의 기본 개념은 보르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백일해 백신 은 보르데의 직접적인 유산입니다. 그가 분리한 백일해균(Bordetella pertussis)을 바탕으로 개발된 백일해 백신은 오늘날 DTP(디프테리아, 파상풍, 백일해) 혼합 백신의 형태로 전 세계 어린이들에게 접종됩니다. 보르데가 균을 분리하지 않았다면 이 백신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보체 시스템 연구 는 현재 자가면역질환 치료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습니다. 보체가 과도하게 활성화되면 자가 조직을 공격하는 자가면역질환이 생긴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루푸스, 류마티스 관절염, 사구체신염 등 수많은 자가면역질환에서 보체 시스템이 핵심 역할을 합니다. 보체 활성화를 억제하는 약물들이 개발되어 임상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COVID-19 중증화 에서도 보체 과잉 활성화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연구들이 발표되었습니다. 코로나19 환자 중 일부가 사이토카인 폭풍과 함께 급격히 악화되는 것과 보체 시스템의 관계가 연구되고 있습니다.

보르데의 발견은, 그가 살아생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방식으로 계속 확장되고 응용되고 있습니다.


 

📝 보이지 않는 싸움 — 기초 연구자의 사명

 

쥘 보르데의 이야기는 기초 과학 연구의 가치와 그 연구자들이 직면하는 현실에 대한 깊은 성찰을 요구합니다.

그는 자신의 발견이 바서만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해지는 것을 보아야 했습니다. 기초 원리를 발견한 사람보다 그것을 응용한 사람이 더 많은 주목을 받는 일은, 과학사에서 드물지 않게 반복됩니다. 이것은 기초 연구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여전히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보르데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점령 아래에서도, 전쟁 중에도, 자신의 연구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그는 계속 연구했습니다. 그 끈기가 결국 노벨상이라는 형태로 인정받았습니다.

그의 보체 발견은 또한 중요한 과학적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자연의 작동 방식은 우리가 처음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정교합니다. 항체만으로 면역이 설명될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보체라는 정교한 지원 시스템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보체 시스템도 처음 이해된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 계속 밝혀지고 있습니다.

과학은 끝이 없습니다. 하나의 발견이 새로운 질문을 낳고, 그 질문이 또 다른 발견으로 이어집니다. 보르데가 보체를 발견한 그 순간부터, 인류는 면역 시스템의 더 깊은 비밀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여정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보르데는 1961년 브뤼셀에서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그가 브뤼셀 파스퇴르 연구소의 현미경 앞에서 발견한 것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전 세계 수백만 명의 생명을 지키고 있습니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