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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0_New Novel/315_[NEW] 노벨생리의학상

[1942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 없음 : 스탈린그라드와 미드웨이 — 전쟁의 절정에서 멈춘 과학의 영광

by 어셈블러 2026. 5.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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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2년 : 전쟁의 가장 어두운 해, 그리고 세 번째 침묵

 

1940년, 1941년에 이어 1942년에도 노벨 생리의학상은 수여되지 않았다. 세 해 연속 시상이 없었다. 그러나 1942년의 공백은 앞선 두 해와 또 다른 결을 가지고 있었다. 1942년은 제2차 세계 대전이 절정을 향해 치닫던 해였고, 동시에 전쟁의 조류가 은밀하게 바뀌기 시작하던 전환점의 해이기도 했다.

스탈린그라드에서는 인류 역사상 가장 처참한 도시 전투가 시작되었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국 해군이 일본 항공모함 4척을 격침시키며 태평양의 전세를 뒤집기 시작했다. 북아프리카에서는 몽고메리가 이끄는 영국군이 롬멜의 독일군 아프리카 군단과 사투를 벌였다.

이 모든 포화 속에서, 한편으로는 역사를 바꿀 의학적 발견들이 조용히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 1942년의 전황 : 절정과 전환

 

1942년 1월, 일본군이 말라야 반도를 따라 내려와 싱가포르를 향해 진격했다. 2월 15일, 대영제국의 군사적 요새라고 여겨졌던 싱가포르가 함락되었다. 8만 명이 넘는 영국군과 연방군이 포로가 되었다. 처칠은 이것을 영국 군사사에서 최악의 재앙이라고 불렀다.

같은 시기 독일군은 소련 깊숙이 파고들어 스탈린그라드를 향해 진격했다. 8월에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시작되었다. 독일 제6군이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 모든 집, 모든 거리, 모든 공장이 전쟁터가 되었다. 저격수들이 잔해 더미 속에 숨어 있었고, 탱크들이 폭격으로 무너진 건물 잔해 사이를 헤쳐나갔다. 스탈린그라드는 지옥이 되었다.

6월 4일부터 7일까지 미드웨이 해전이 벌어졌다. 미국 해군은 암호 해독을 통해 일본의 작전 계획을 미리 파악하고 있었다. 수적으로 열세였음에도 미국은 일본의 항공모함 4척을 모두 격침시켰다. 이 전투는 태평양에서 전략적 주도권이 일본에서 미국으로 넘어가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11월, 북아프리카의 엘알라메인에서 몽고메리의 영국 제8군이 롬멜의 독일 아프리카 군단을 격파했다. 처칠은 이것을 끝의 시작이라고 불렀다. 전쟁의 조류가 바뀌기 시작했지만, 아직 끝은 까마득하게 멀었다.

이런 상황에서 노벨 위원회가 세 번째로 시상을 포기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다.


 

🚫 세 번째 침묵의 논리 : 일관성과 원칙의 수호

 

1942년의 노벨 생리의학상 미시상 결정은 1940년, 1941년과 같은 이유들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세 번째 결정에는 추가적인 의미가 있었다.

1940년의 결정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가장 어려운 결정이었다면, 1942년의 결정은 일관성의 문제이기도 했다. 세 해 연속 시상을 포기함으로써 노벨 위원회는 전쟁 중에는 정상적인 노벨상 운영이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명확하게 천명한 것이었다.

또한 1942년에 이르면 전시 과학의 방향이 크게 달라져 있었다. 많은 과학자들이 더 이상 자유로운 기초 연구에 종사하지 않고, 전시 과학 프로그램에 통합되어 있었다. 맨해튼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도 1942년이었다. 레오 실라르드, 에리코 페르미 등 물리학자들이 최초의 핵분열 연쇄 반응을 달성한 것이 바로 1942년 12월 2일이었다.

의학 분야에서도 많은 연구가 군사적 필요에 의해 재편되어 있었다. 순수한 학문적 업적과 전시 의료 기술의 경계가 모호해진 상황에서, 공정한 심사는 더욱 어려워졌다.

노벨 위원회는 이렇게 세 해 연속 침묵을 선택했다. 이 침묵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1943년에는 헨릭 담과 에드워드 도이지가 비타민K 연구로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으며 의학상의 공백이 끝났다. 1943년 역시 전쟁 중이었지만, 위원회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고, 어느 정도의 국제적 과학 교류가 회복되었다는 판단도 있었을 것이다.


 

🕯️ 1942년의 잃어버린 후보들 : 구연산 회로와 페니실린

 

1942년 역시 의학계에서는 역사적인 연구들이 진행되고 있었다. 만약 전쟁이 없었다면 이 해에 노벨상을 받을 수 있었을 과학자들의 이야기를 해보자.

가장 유력한 후보 중 하나는 한스 크렙스(Hans Krebs)였다. 독일 출신의 유대인 생화학자인 크렙스는 나치 집권 후 1933년 독일에서 쫓겨나 영국으로 망명했다. 셰필드 대학교에서 연구를 계속하던 그는 1937년에 생화학의 가장 중요한 발견 중 하나를 완성했다. 바로 구연산 회로(citric acid cycle), 일명 크렙스 회로였다.

크렙스 회로는 세포가 산소를 이용하여 포도당을 완전히 분해하고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복잡한 순환 반응 경로다. 포도당이 먼저 해당 과정을 거쳐 피루브산이 되고, 피루브산이 미토콘드리아 안으로 들어와 아세틸-CoA가 되어 크렙스 회로에 진입한다. 이 회로에서 아세틸-CoA는 옥살아세트산과 결합하여 구연산(citric acid)을 만들고, 이후 일련의 반응을 거쳐 이산화탄소와 수소(NADH, FADH₂)를 생성하며 원래의 옥살아세트산으로 돌아온다. 이때 생성된 수소는 전자 전달계로 넘어가 ATP(에너지)를 만들어낸다.

이 발견은 세포 호흡의 전체 그림을 완성한 것이었다. 오토 바르부르크가 전자 전달계의 핵심 효소를 밝혔고, 얼베르트 센트죄르지가 C4-디카르복실산의 촉매 역할을 발견했다면, 크렙스는 그 사이에 있는 연결 고리 전체를 하나의 완결된 순환 경로로 정리했다. 크렙스 회로의 발견은 모든 생명체의 에너지 대사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이었다.

크렙스는 이 발견으로 마침내 1953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1942년에 이 업적은 이미 5년 이상 이어진 검증을 거치고 있었고, 그 중요성은 생화학계에서 충분히 인정받고 있었다. 전쟁만 없었다면, 그는 훨씬 일찍 노벨상을 받았을 것이다.

페니실린 연구도 1942년에 중요한 진전을 이루었다. 옥스퍼드의 플로리-체인 팀이 1941년에 첫 임상 실험에서 인상적인 결과를 얻은 이후, 1942년에는 더 많은 환자들에게 페니실린이 투여되었다. 그러나 가장 큰 과제는 여전히 대량 생산이었다.

1942년 여름, 플로리는 미국에서 대량 생산 방법을 개발하기 위한 작업을 진두지휘했다. 일리노이주 피오리아의 미국 농무부 연구소에서 중요한 돌파구가 열렸다. 연구팀은 변형된 배지 조성(옥수수 침출액)이 페니실린 생산량을 크게 늘린다는 것을 발견했다. 또한 메론에서 발견된 변이 균주가 기존 균주보다 200배나 많은 페니실린을 생산한다는 것도 밝혀졌다. 이러한 발견들이 페니실린 대량 생산의 길을 열었다.

1942년 말에는 미국의 제약 회사들이 페니실린 대량 생산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1943년부터는 임상 시험이 대규모로 이루어졌고, 1944년에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가하는 병사들에게 페니실린을 공급할 수 있는 수준의 생산량이 확보되었다.


 

📜 과학의 진보를 멈추려 한 것들

 

1942년까지 세 해 연속 노벨 생리의학상이 수여되지 않은 것은, 그 기간 동안 의학의 진보가 멈췄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1940~1942년의 3년 동안 의학에서 일어난 일들을 돌아보면:

페니실린의 임상 응용 가능성이 증명되었고(1940년 동물 실험, 1941년 최초 인간 투여), 그 대량 생산 방법이 개발되기 시작했다(1942년). 이것만으로도 의학의 역사를 바꿀 발견이었다.

크렙스 회로는 1937년에 발견되었지만 이 3년 동안 점점 더 많은 검증과 인정을 받았고, 생화학 교과서의 핵심 내용으로 자리 잡았다.

비타민K의 화학적 구조 규명(도이지의 연구)도 이 시기에 마무리되었다.

항말라리아제 연구, 수혈 기술, 외상 처치, 화상 치료 등 전시 의학 기술들이 전투의 필요에 의해 급속히 발전했다.

이 발견들과 기술들 중 일부는 전쟁이 끝난 후 순차적으로 노벨상 수상으로 인정되었다. 1943년 비타민K, 1945년 페니실린, 1953년 크렙스 회로. 이것들은 모두 1940~1942년의 공백기 동안 이루어지거나 숙성된 연구들이었다.

노벨 재단의 규정에 따르면, 시상이 이루어지지 않은 해의 상금은 해당 분야의 특별 기금으로 편입된다. 1940, 1941, 1942년의 세 해 상금은 이렇게 보존되었다. 이 기금은 이후 과학 연구 지원에 활용되었을 것이다. 전쟁이 박탈한 영광은 전쟁이 끝난 세계의 과학을 위해 조용히 쌓여 있었다.


 

📝 세 번의 침묵, 하나의 메시지

 

1940, 1941, 1942년. 세 해에 걸친 노벨 생리의학상의 침묵은 하나의 일관된 메시지를 전한다.

과학은 국경을 넘는다. 과학은 국적이 없다. 과학은 이념을 초월한다. 그러나 과학이 꽃피우려면 과학자들이 자유롭게 연구하고 교류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 그 환경은 평화다.

전쟁은 과학의 방향을 비틀고, 과학자들을 위험에 빠뜨리며, 국제 협력을 파괴한다. 일부 과학 연구를 가속화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전쟁의 필요에 의한 왜곡된 가속이다. 인류 전체의 복지를 향한 진정한 과학적 탐구는 평화의 토양 위에서만 온전히 이루어질 수 있다.

노벨 위원회는 세 번에 걸쳐 침묵을 선택함으로써, 이 진실을 말없이 증언했다. 그 침묵은 무능의 증거가 아니라, 원칙의 수호였다.

1942년 스탈린그라드에서 수백만 명이 죽어가던 그 해에, 옥스퍼드의 실험실에서는 페니실린이 인류를 구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전쟁이 파괴하는 것과 과학이 건설하는 것이 동시에 진행되는 그 역설 속에서, 노벨상의 침묵은 과학이 결국 전쟁을 이길 것이라는 조용한 믿음이었다.

그리고 과학은 이겼다. 전쟁이 끝났고, 과학자들이 돌아왔다. 연구실의 불이 다시 켜졌다. 1943년부터 노벨 생리의학상은 다시 수여되기 시작했다. 세 해 동안 쌓인 빛이 한꺼번에 쏟아지듯, 1945년 페니실린, 1947년 곤충학 관련 연구, 1948년 DDT 개발 등 전쟁과 전후 시기의 업적들이 연이어 인정받았다.

1942년의 노벨 생리의학상 빈 자리는 과학사에 영원히 남아 있다. 그것은 전쟁이 인류에게 남긴 상처의 하나이며, 동시에 그 상처에도 불구하고 인류가 과학의 가치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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