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310_New Novel/315_[NEW] 노벨생리의학상

[1940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 없음 : 전쟁이 멈춘 과학의 시계 — 1940년 의학의 공백

by 어셈블러 2026. 5. 13.
728x90
반응형


 

🚫 메달이 없었던 해, 그러나 과학은 멈추지 않았다

 

1940년 12월의 스톡홀름은 조용했다. 왕립 콘서트홀에서 노벨상 시상식을 위한 음악이 울려 퍼지지 않았다. 스웨덴 국왕이 단상에 서서 수상자들에게 메달을 건네는 장면도 없었다. 그해 노벨 생리의학상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수상할 만한 업적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인류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전쟁이 세상을 삼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40년은 제2차 세계 대전이 유럽 전역을 불바다로 만들던 해였다. 노벨상의 의례적인 침묵은 그 시대의 비극을 가장 조용하고도 강력하게 증언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 속에서도 과학자들은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 혹은 멈출 수 없었다. 전쟁이 오히려 어떤 연구들을 가속시켰다. 1940년의 의학계에서는 인류의 미래를 바꿀 발견들이 조용히 진행되고 있었다. 그 이야기를 해야 한다.


 

🕰️ 1940년, 유럽이 불타다

 

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며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1940년은 전쟁의 규모가 유럽 전체로 확산되는 결정적인 해였다.

1940년 4월 9일, 독일군이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침공했다. 덴마크는 단 하루 만에 항복했다. 노르웨이는 두 달 간의 저항 끝에 굴복했다. 그리고 5월 10일, 독일은 서부 전선을 열었다.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를 동시에 공격한 것이었다. 아르덴 숲을 통과하는 기갑 부대의 기습은 연합군의 방어선을 순식간에 무너뜨렸다.

6월 4일, 됭케르크에서 33만 명이 넘는 영국과 프랑스 군인들이 바다를 통해 철수했다. 됭케르크 철수는 군사적으로는 대패였지만, 그 병력이 살아남아 이후 전쟁의 판도를 바꾸게 된다. 6월 14일, 파리가 독일에 함락되었다. 빛의 도시 파리에 나치의 깃발이 에펠탑 위에 꽂혔다. 유럽 문명의 심장부가 점령된 것이었다.

6월 22일,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했다. 이제 서유럽에서 독일에 맞서는 나라는 영국뿐이었다. 그해 여름과 가을, 독일 공군은 영국 본토 항공전(Battle of Britain)을 시작했다. 독일 폭격기들이 런던과 영국 도시들을 밤낮으로 폭격했다. 영국 왕립공군(RAF)의 전투기 조종사들은 압도적인 수에도 불구하고 영국 하늘을 지켜냈다.

이 모든 혼란 속에서 노벨 위원회가 정상적인 심사와 시상 절차를 진행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전 세계의 학자들로부터 후보를 추천받고, 그들의 업적을 평가하기 위한 자료를 수집하며, 국제적인 심사위원단을 구성하는 것은 전쟁 중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통신망은 단절되었고, 여행은 위험하거나 불가능했다.

스웨덴은 공식적으로 중립국이었지만, 독일에 포위된 상황에서 완전한 독립성을 유지하는 것은 외줄타기와 같았다. 노벨 재단은 상의 권위와 중립성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시상을 중단하는 고통스러운 결정을 내렸다.


 

🚫 왜 수상할 수 없었는가 : 노벨 위원회의 내부 사정

 

노벨 위원회의 결정은 단순한 행정적 어려움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 배경에는 여러 복잡한 요인들이 있었다.

첫째는 심사의 공정성 문제였다. 전쟁 중에는 특정 국가의 과학자를 수상하거나 배제하는 것이 불가피하게 정치적으로 해석될 수 있었다. 만약 독일이나 점령지 과학자를 수상한다면, 나치 정권을 간접적으로 지지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었다. 반대로 그들을 배제한다면, 순수한 과학적 공로를 정치적 이유로 무시하는 것이 되었다. 이 딜레마에서 벗어나는 가장 깔끔한 방법은 수상 자체를 하지 않는 것이었다.

둘째는 수상자의 안전 문제였다. 노벨상 시상식은 수상자가 스웨덴 스톡홀름을 방문하여 국왕에게서 직접 메달을 받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전쟁 중 유럽의 과학자들이 스웨덴까지 여행하는 것은 목숨을 건 일이었다.

셋째는 이미 발생한 전례가 부담이 되었다. 1939년 도마크의 경우처럼, 수상 결정 자체가 나치 정권의 간섭을 촉발할 수 있었다. 수상자를 체포하거나 수상을 강제로 거부하게 하는 일이 반복될 경우, 노벨상의 권위가 심각하게 손상될 수 있었다.

노벨 재단의 규정에 따르면, 수상자가 없을 경우 그 해의 상금은 다음 해 해당 분야의 상금으로 이월되거나 특별 기금으로 편입된다. 1940년의 상금은 이렇게 보존되었다가, 전쟁이 끝난 후 과학 진흥에 사용되었다.


 

🕯️ 전쟁이 가로막은 발견들 : 1940년의 유력 후보들

 

노벨상이 시상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해 의학계가 정지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전쟁은 특정 연구들을 급격히 가속시켰다. 전쟁터에서 수많은 병사들이 감염으로 죽어가는 현실은 의료계에 새로운 치료제 개발을 절박하게 요구했다.

만약 전쟁이 없었다면 1940년 또는 그 직후에 강력한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었을 가장 유력한 이름들이 있었다.

알렉산더 플레밍(Alexander Fleming), 하워드 플로리(Howard Florey), 에른스트 체인(Ernst Chain). 페니실린과 관련된 이 세 이름은 인류 의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 중 하나와 결부되어 있다.

플레밍은 1928년 런던의 성 메리 병원에서 포도상구균 배양 접시를 발견했다. 여름 휴가를 다녀온 후 실험대 위에 방치되어 있던 그 배양 접시에는 푸른곰팡이가 자라고 있었고, 그 주변의 세균들이 모두 죽어 있었다. 플레밍은 이 곰팡이가 세균을 죽이는 무언가를 분비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이 물질을 페니실린이라고 명명했다.

그러나 플레밍은 이 물질을 정제하고 안정화하는 데 실패했다. 페니실린은 매우 불안정하고 정제가 어려운 물질이었다. 관심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고, 그 중요성을 몰랐던 것도 아니었다. 단지 당시의 화학 기술로는 그것을 의약품으로 만드는 것이 가능하지 않았다.

그 도전을 이어받은 것이 옥스퍼드 대학의 하워드 플로리와 에른스트 체인이었다. 1938년부터 이들은 페니실린 정제와 임상 적용 가능성 연구를 시작했다. 1940년 5월, 그들은 획기적인 동물 실험 결과를 발표했다. 연쇄상구균으로 치명적인 감염을 일으킨 쥐들에게 정제된 페니실린을 투여했더니 쥐들이 살아남았다. 치료 효과가 있을 뿐만 아니라, 쥐에게 독성이 거의 없었다.

이 결과는 의학계를 흥분시켰다. 이제 사람에게 임상 실험을 해야 했다. 1941년 2월, 옥스퍼드 존 래드클리프 병원에서 첫 번째 인간 환자가 페니실린을 투여받았다. 알버트 알렉산더(Albert Alexander)라는 경찰관으로, 장미 가시에 긁혀 생긴 작은 상처에서 포도상구균과 연쇄상구균의 복합 감염으로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였다. 페니실린을 투여받자 놀라운 회복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공급량이 부족해서 치료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고, 환자는 결국 사망했다. 하지만 페니실린이 효과가 있다는 것은 이미 증명되었다.

전쟁이 오히려 페니실린 개발을 가속시킨 아이러니가 있었다. 수많은 병사들이 감염으로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과 영국 정부는 페니실린의 대량 생산을 국가적 과제로 설정하고 막대한 자원을 투입했다.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 때는 연합군 병사들에게 페니실린이 보급되었고, 이전 전쟁들에 비해 감염으로 인한 사망이 크게 줄었다.

플레밍, 플로리, 체인은 결국 1945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전쟁이 없었다면 아마 1940년 또는 1941년에 이 영예를 받았을 것이다.

또 다른 유력 후보는 비타민K 관련 연구들이었다. 1934년에 헨릭 담(Henrik Dam)이 혈액 응고에 필수적인 새로운 비타민을 발견했고, 에드워드 도이지(Edward Doisy)가 이를 화학적으로 규명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 이들은 전쟁이 끝난 1943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 침묵의 해가 역사에 남긴 메시지

 

1940년 노벨 생리의학상의 공백은 단순한 행정적 중단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 시대의 비극을 담은 상징이었다.

노벨상이라는 제도는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했고, 동시에 자신의 발명이 전쟁 무기로 활용되는 것에 죄책감을 느꼈다. 그의 유언은 과학과 문화의 가장 고귀한 업적들을 기리고, 나아가 평화에 기여하는 인물을 표창하라는 것이었다. 노벨상의 정신은 근본적으로 반전(反戰)의 정신이었다.

그 노벨상이 전쟁 때문에 침묵한다는 것은 역설이었다. 그리고 그 역설은 우리에게 묻는다. 과학의 공로를 기리는 것은 평화의 토양 위에서만 가능한가? 전쟁은 과학의 진보와 그에 대한 공정한 인정을 얼마나 쉽게 유린할 수 있는가?

1940년대의 노벨상 공백들(1940, 1941, 1942년에 의학상이 수여되지 않았다)은 전후에 재평가되지 않았다. 그 해들에 이루어졌어야 할 수상들은 결국 전쟁 후에 순차적으로 이루어졌지만, 늦게나마 돌아온 메달들이 모든 것을 회복시킬 수는 없었다. 과학은 시간의 인질이고, 시간은 전쟁이 앗아간 것을 돌려주지 않는다.


 

📝 어둠 속에서도 등불을 들었던 사람들

 

1940년, 전 세계의 수많은 과학자들은 포탄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실험을 계속했다. 폭격으로 실험실 유리창이 깨지면 천으로 막고 연구를 이어갔다. 연구비가 끊기면 다른 방법을 찾았다. 연구 재료를 구하기 어려우면 창의적인 대안을 모색했다.

옥스퍼드의 플로리와 체인은 페니실린 정제에 필요한 동결 건조 장비를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전시 물자 부족 속에서도 그들은 결국 장비를 마련했고, 실험을 완성했다. 그 결과 1940년에 발표된 동물 실험 논문은 세상에 새로운 항생제 시대가 도래할 것임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독일 점령하의 벨기에에서 헤이만스(1938년 노벨상 수상자)는 대학을 지키며 연구를 계속했다. 독일 점령지의 프랑스 과학자들은 비밀리에 연구 결과를 영국이나 미국의 동료들에게 전달하며 학문의 연속성을 지키려 했다.

세균학, 영양학, 생리학, 면역학 등 수많은 분야에서 전쟁의 절박한 필요가 연구를 이끌었다. 전쟁터의 부상병들을 위한 수혈 기술이 발전했고, 파상풍과 티푸스 예방을 위한 백신 연구가 가속되었으며, 말라리아 치료를 위한 항말라리아제 개발이 급박하게 이루어졌다.

1940년의 노벨상 공백은 그 모든 과학자들의 존재를 지워버리지 않는다. 메달은 없었지만, 그들의 연구는 계속되었다. 그리고 그 연구들은 결국 전쟁 이후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

전쟁이 과학의 시계를 멈추려 했지만, 과학자들은 그 시계를 멈추지 않았다. 1940년의 빈 시상 자리는 그 침묵의 저항의 증거로, 역사 속에 남아 있다.

728x90
반응형